ⓒ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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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건국 68년이다. 70년을 코앞에 두고 있다. 동북아 구석에 있는 신생 근대국가가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충격과 격변의 강물이 흘렀다. 거센 강물 속에서 9명의 대통령이 떠내려갔다. 이제 한국은 10번째를 보내려 한다.

국회의 탄핵소추로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과 사실상 이별했다. 박근혜의 시대는 끝났다. 설사 헌재가 탄핵을 기각해도 그럴 것이다. 박 대통령이 내년 4월 퇴진에 이미 동의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물러나지 않으면 이 사회는 그 상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박근혜 인생에는 운명의 숫자가 숨어 있는 것 같다. 9와 18이다. 아버지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1961년, 그는 9살이었다. 1979년 아버지가 피살될 때까지 18년 동안 그는 최고권력자의 딸이었다. 청와대에서 나온 후 은둔의 세월 또한 18년이었다. 18년이 되는 1997년 그는 여당에 입당하면서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이듬해인 1998년 그는 국회의원이 됐다.

9년 후인 2007년 그는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에게 아슬아슬하게 패했다. 생애 최초의 선거 패배였다. 그는 그렇게 17대 대통령을 놓쳤다. 그리고는 18대 대통령이 됐다. 경선 패배 9년 후인 올해 그는 정치 인생을 마감하고 있다. 국회의원 당선으로 따지면 18년이다. 그는 18이란 운명의 숫자를 넘어서지 못했다.

올해 한국인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한국인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박근혜의 실패는 어디쯤인가. 강물에 떠내려간 대통령들에 비해 그는 얼마나 더 잘못한 걸까. 세계사에서, 아시아의 역사에서, 한국 여성 대통령의 끔찍한 추락은 어떤 의미인가. 박근혜의 폐허 위에서 한국인은 어떻게 재건해야 하나. 다음 대통령은 해낼 수 있을까.

헌재가 결정하면 박근혜는 한국 역사상 처음 탄핵으로 물러나는 대통령이 된다. ‘사상 최초 탄핵’이라는 비극을 피하려고 사회의 지도자들은 한때 편법을 동원하려 했다. 대통령의 4월 하야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한국인에게 탄핵이 치명적인 충격은 아니다. 역대 대통령들과 관련해 한국인은 이미 여러 가지 ‘극한 경험’을 치렀기 때문이다. 탄핵은 새 경험을 하나 추가하는 것뿐이다. 한국 사회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민중 봉기로 축출됐다. 하야하고 외국으로 망명했다. 이처럼 국민 봉기로 물러난 지도자들은 세계에 많다. 가깝게는 2011년 아랍의 봄이었다. 튀니지의 벤 알리, 리비아의 카다피, 이집트의 무바라크가 있다. 이들은 망명하거나, 피살되거나, 법정에 섰다. 이들 모두 한때 국민의 인정을 받던 지도자였다. 그런데 인정이 증오로 바뀌었다. 이처럼 존경과 분노의 대조법으로 보면 이승만의 퇴진이 가장 극적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전 평생을 국가개혁과 독립운동에 바쳤다. 그는 다수 국민의 추앙을 받은 건국의 아버지였다. 국부(國父)가 국민의 고함 속에 쫓겨난 건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들다. 장기적으로 이승만의 하야는 역사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민주주의 실험을 하던 한국인에게 정신적 충격이었다.

국가원수의 피격은 세계사에 많다. 그런데 역시 같은 피살이라도 박정희만큼 드라마틱한 경우는 별로 없다. 미국의 링컨과 케네디, 이집트의 사다트, 인도의 인디라 간디는 모두 이념·종교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세력에 당했다. 레이건을 죽이려고 한 힝클리는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를 짝사랑한 정신이상자였다.

반면 박정희는 자신이 가장 믿었던 정보부장에게 피살됐다. 그것도 비서실장·경호실장과 함께한 ‘권력의 만찬’에서 그렇게 당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한국은 대통령 피격조차도 유별나게 경험한 나라다. 박정희의 경호장교를 지낸 두 명의 장군이 나란히 권력을 이어받았다. 전두환·노태우다. 두 사람은 퇴임 후 나란히 법정에 섰다. 물론 전직 대통령들이 사법 처리되는 건 다른 나라에서도 종종 있다. 페루의 후지모리는 부정·비리로 25년 징역형을 살고 있다. 세계 최초 여성 대통령인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도 퇴임 후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분야 역시 전두환·노태우만큼 극적인 경우는 드물다. 두 사람은 육사 동기고, 평생 요직을 이어갔고, 군사반란을 주도했으며, 대통령 권력을 승계했다. 나중에 틀어졌지만 두 사람은 권력의 쌍둥이였다. 그런 이들이 흰색 수의를 입은 채 손을 잡고 법정에 선 것이다.

김영삼 정권 말기는 추문과 혼란으로 가득했다. 30대 아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자금을 챙겼다. 그러다가 구속됐다. OECD 국가 중에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이런 일을 저지르는 건 유례를 찾기 어렵다. 1997년 말엔 기억하기도 끔찍한 외환위기가 터졌다. 1998년 2월 퇴임한 후 김영삼은 오랫동안 상도동 자택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는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연금을 당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엔 국민의 신음과 분노가 그를 가두었다. 한때 민주화 투사로 추앙받던 지도자가 이런 처지가 된 것이다.

김대중의 아들들도 비리를 저지르고 감옥에 갔다. DJ가 현직에 있을 때였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정권의 범죄들은 모두 퇴임 후에 적발됐다. DJ정권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에 4억5000만달러를 뒷돈으로 주었다. 국정원이 민간인 1000명을 상대로 불법 도청을 저지른 것도 밝혀졌다. 두 사건 모두 사법처리됐다. 국정원장, 대통령 경제수석, 대통령의 회담특사 등이 모두 감옥에 갔다. 하지만 DJ는 수사를 받지도, 사법처리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굴레에서 벗어난 건 아니다. 그가 북한에 건네준 4억5000만달러는 핵 개발에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다. 지금 북한의 핵폭탄은 한국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같은 민주화 지도자였던 YS처럼 그도 상당수 국민의 분노를 피할 수 없다. 그는 죽었지만 역사의 법정은 살아 있다.

노무현은 전직 대통령 자살이라는 ‘극한 충격’을 세계사에 남겼다. 자신이 아니라 부인의 비리 때문이었다. 나는 부엉이바위에 두 번 올랐다. 노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웠다는 자리에도 앉아 보았다. 바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엄청난 공포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도대체 어떤 심리였기에, 어떤 강심장이기에 그런 투신(投身)이 가능할까. 이것도 한국 사회가 겪은 ‘극한 경험’이다.

대통령의 충격적 말로로 보면 이명박은 유일한 예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도 재임 중엔 친인척·측근 비리라는 고질을 앓았다. 이번엔 아들이 아니라 형님이었다. 그리고 친구·선배·처가식구·부하가 줄줄이 감옥에 갔다. 그러나 자신만큼은 늪에 빠지지 않았다.

세계사적으로도 박근혜의 탄핵은 허탈한 실패로 기록될 것이다. 세계 주요 10개국은 미국과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 그리고 중국·일본·한국·인도다. GDP로는 브라질이 9위, 캐나다가 10위다. 그러나 세계 무대의 존재감으로 보면 이들 대신 한국과 러시아가 들어가야 한다. 박근혜는 10개국의 최초 여성 대통령이다.

여성 총리는 3명 있다. 인도의 간디, 영국의 대처 그리고 독일의 메르켈이다. 그런데 등극의 어려움으로 보면 총리는 대통령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총리는 당내 경선만 이기면 되지만 대통령은 경선과 대선 모두 돌파해야 한다. 박근혜가 여성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에서도 힐러리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그런데 그는 낙선했다. 브라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는 탄핵당했다. 3대 여성 지도자 재앙이 모두 올해 일어났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가문의 대결이 펼쳐졌다. 3개국 지도자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중요한 국가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은 덩샤오핑 등과 더불어 중국 공산당 혁명 8인 원로에 꼽힌다.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와 사토 에이사쿠는 전후 일본의 재건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는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역사의 개척자다. 그래서 박근혜-시진핑-아베의 제2라운드가 주목됐다. 결과는 박근혜의 참혹한 탈락이다.

대통령의 추락이 역사의 발전으로 이어지느냐는 전적으로 국민에게 달려 있다. 어떤 국민은 실패한 지도자의 폐허 위에서 새로 튼튼한 집을 짓는다. 닉슨의 탄핵과 하야는 미국 역사에 부끄러운 기록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의 발전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오히려 미국 민주주의에 효과적인 경종으로 남아 있다. 미국 대통령은 법을 어기는 걸 두려워한다. 클린턴의 탄핵 미수 사건은 본질적으로 법보다는 성욕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이승만의 하야나 박정희의 피살은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의 경계심을 높였다. 물론 역사적으로 시기가 성숙하기도 했지만 1987년 대통령 직선제 혁명이 가능했던 건 하야와 피살의 기억 때문이었다. 전두환·노태우의 재판 이후 현직 대통령이 거대한 불법자금을 받는 건 사라졌다. 김영삼은 안기부 계좌에 수천억원을 숨겨놓기는 했다. 그러나 이 돈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모은 것이다. YS는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를 단행했다. DJ정권은 4억5000만달러 불법송금을 저질렀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금품부정 스캔들을 일으킨 것은 없다. 이런 일들은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기억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의 권위주의를 청산하려고 애썼다. YS와 DJ라는 양김이 얼마나 권위주의에 사로잡혔는가를 생생히 경험한 것이다. 권력이 권위주의에 갇히면 심각한 ‘내부독재’가 발생한다. 대통령 아들의 농단이나 정권의 권력남용은 대부분 내부독재나 내부불통에서 온다. 노무현 정권에서 이런 일이 드문 건 과거에서 교훈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한 건 노무현이 ‘교훈의 속도’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의 정권에서는 권위주의와 함께 대통령의 권위도 청산됐다. 권위주의는 혁파의 대상이지만 권위는 국가통치에 필수적인 요소다. 그런데 그는 이를 몰랐다. 권위를 제대로 챙기지 못해 국내적으로 그는 탄핵의 심판대에 올랐다. 대외적으론 국가의 위신을 김정일에게 헌납했다.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은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회담이었다.

원칙 있는 對北정책, 한·미동맹 강화 등은 지켜야

이제 박근혜의 폐허 위에서 대한민국을 재건해야 한다. 리모델링이 아니라 완전한 재건축이다. 무엇을 부수고 건질 것인가. 재건축은 철거로부터 시작된다. 철저하게 부순 다음 쓸 만한 철골은 건져내야 한다. 소중한 철골이 몇 개 있다. 원칙 있는 대북정책, 한·미 동맹 강화, 불법 폭력시위와 파업에 대한 엄정한 대처, 통진당 해산이나 좌편향 교과서 시정 같은 국가 정체성 수호 등이다.

반면 나머지는 모두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서 소통은 지도자의 필수 덕목이다. 밀접하게 소통하지 않으면 국정이 돌아가지 않는다. 오바마의 백악관은 소통의 광장이다.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비서실장, 홍보·전략 참모들이 옹기종기 모여 미국과 세계를 논의한다. 영국의 다우닝가 10번지, 독일의 연방청사, 일본의 총리실이 모두 그러하다.

반면 박근혜의 청와대는 불통과 고립의 섬이었다. 최순실 사태로 대통령의 끔찍한 실태가 다 드러났다. 공식 일정이 없으면 대통령은 거의 관저에서 혼자 TV 보고 밥을 먹었다. 세월호 7시간 때도 그랬다. 친박계 어느 인사는 “대통령은 다른 사람과 밥을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되는 체질”이라고 증언했다. 성장과정이 어떻든 박근혜는 자폐적 성격의 소유자다. 자신이 그렇다면 박근혜는 대통령을 추가하지 말았어야 했다. 최태민의 예언을 믿었든지, 영부인 역할 시절이 그리웠든지, 아니면 정말로 외환위기를 보고 국가를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든지 그는 대통령의 야심을 키웠다. 자신에게도 국가에도 불행한 일이었다.

철골을 챙긴 후 다음 대통령은 새 정권을 건설해야 한다. 제1의 필수요소는 소통이다. 우선 구중궁궐 본관 집무실을 떠나 참모진의 건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신속히 새로운 통합 집무센터를 신축해야 한다. 공간이 많은 문제를 해결해준다. 소통의 공간에 뛰어들면 대통령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최고 수준의 전문가를 옆방에 두고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대통령은 국민 앞에 나서는 게 두렵지 않다. 기자회견도 한 달에 한 번씩 할 수 있다. 박근혜는 기자회견을 겨우 1년에 한 번 했다.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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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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