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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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고백하자면 대한민국 대표 보수논객 전원책 변호사와의 인터뷰는 실패했다. 인터뷰를 하러 갔다 강연을 듣고 왔다. 지난해 12월 20일, 서울 서초구 서초중앙로에 있는 전원책 변호사사무실에서 그와 마주 앉은 시간은 밤 9시였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그의 강의는 날짜를 바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준비해 간 질문지는 만지작거리다가 제대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기사의 방향이 ‘인간 전원책’ 연구였던 만큼 그에 대해 궁금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한번 시작한 한국 정치 비판은 질문 던질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말발’과 에너지에 완벽하게 밀렸다.

전원책 이름 뒤에는 변호사라는 직함이 따라붙지만 현재 그의 본업은 방송인에 가깝다. 변호사 일은 개점휴업 상태, 사무실은 주로 방송을 준비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그의 사무실 한쪽에는 여러 방송사에서 받은 기념패, 감사패 10여개가 진열돼 있었다. 그 가운데 특이하게 한국담배소비자보호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받은 공로패가 놓여 있다. 그는 애연가다. 2008년 MBC ‘100분 토론’ 400회 기념으로 받은 ‘최고의 논객’ 상패도 있다. 그는 요즘 가장 ‘핫’한 논객, 이 시대 ‘최고의 입’으로 꼽힌다. 탄탄한 논리와 거침없는 언변으로 토론계의 ‘전거성(巨星)’으로 불리며 예능인을 뛰어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전거성’ 이외에도 그의 수식어는 많다. 그의 예측이 착착 맞아떨어지면서 ‘전스트라다무스’로 추대됐다. 진영 없는 비판의 칼을 휘두르며 ‘올 단두대’를 외쳐대는 통에 ‘단두대장’ ‘모두까기 인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jtbc 시사예능 프로그램인 ‘썰전’에서는 토론 상대인 유시민과 ‘좌우’를 대표하는 입담 배틀을 벌이면서 진보가 인정하는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는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한 TV조선의 시사토크쇼 ‘이것이 정치다’ 진행을 맡고부터는 더욱더 그렇다. 매일 오후 5시부터 생방송을 진행하다 보니 대부분 일정을 그 이후로 잡고 있다. 월요일엔 ‘썰전’ 녹화까지 뛰어야 한다. 다른 사무실 불이 꺼진 저녁에야 그는 사무실로 돌아와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다음 날 방송 원고를 쓴다. 퇴근 시간은 새벽 3시를 넘기는 것이 보통이고, 새벽 5시에 빌딩 문을 나설 때도 있다. 그가 “빌딩 수위도 포기했다”면서 말했다. “새벽 5시 넘어야 잠자리에 들고 오전 10시30분 전에 일어납니다. 그전에 전화가 오면 난 미치는 겁니다. 쪽잠을 자야 하잖아요. 최근에 그런 분들이 부쩍 많아졌어요.” 이날 기자는 인터뷰 일정 확인차 오전 시간 그의 잠을 두 번이나 깨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혹시 전원책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 때는 오후 시간을 권한다.

1990년 전원책 변호사가 군법무관 시절 집무실에서 시를 쓰고 있다.
1990년 전원책 변호사가 군법무관 시절 집무실에서 시를 쓰고 있다.

인간 전원책

변호사, 방송인 외에 그가 자신의 본업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있다. 그는 등단한 시인이다. 그것도 문단에서 ‘천재의 등장’이라고 할 만큼 촉망받던 시인이다. 한때 문학 계간지들이 그의 특집기사를 실을 정도였다. 2016년 10월 세 번째 시집 ‘나에게 정부는 없다’(포엠포엠)를 펴냈다. 시인 이근배는 그를 이렇게 평한다. ‘전원책은 시인이다. 그의 시는 언제나 시대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날 선 칼끝이었고 남의 눈치를 보거나 문단 권력에 영합하지 않는 독보적이면서도 번득이는 감성의 언어를 채집한다. 그의 시는 외도가 아니고 정도이다.’

그는 1955년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여천리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 살 때 말보다 글을 먼저 깨우쳤다.’ 그에 대해 이렇게 써놓은 글을 읽은 기억이 나서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실은 제가 온 동네에 벙어리로 소문이 나 있었어요.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도 말을 못했습니다.” 말은 안 터져도 영특했던 모양이다. 여섯 살에 조기입학한 그는 1학년 때부터 문재(文才)를 드러냈다. 학년 대표로 울산 학생백일장을 나가 ‘돌’이라는 시로 입상을 했다. ‘돌에도 생명이 있을까’로 시작한 작품을 보고 심사위원이 극찬을 했다. 상품으로 국어사전을 받았다.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칭찬을 받았어요. 그 일이 제 인생을 바꾼 일이 됐습니다. 그때부터 ‘글을 써야 한다’는 집착에 빠졌던 것 같아요.”

이후로 그는 학창 시절 내내 글로 이름을 날렸다. 부산중학교 때는 학교 교지에 시뿐만이 아니라 ‘영화광’이라는 가명으로 시나리오도 발표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영화였다. 하숙집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죽치고 앉아 ‘콰이강의 다리’ 등 명작부터 19금 영화까지 섭렵했다.

부산고 시절에는 2학년 때 문예반장을 지내고 최초의 고교동인지로 기록된 ‘청조문예’를 창간했다. 3학년인 1971년에는 진해군항제 백일장에서 ‘항해’라는 시로 학생부가 아닌 일반부에 도전해 장원을 차지했다.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대학 가기까지 3년이 걸렸다. 원하는 전기 대학에 계속 떨어져 당시 후기대였던 경희대 법대에 들어갔다. 종로학원을 중심으로 입시생이라기보다 ‘낭인’으로 살았다. 한때는 당구에 빠졌다. 프로선수였던 주인이 수제자로 삼고 싶어할 정도였다. 이때 함께 몰려다닌 ‘재수 3인방’이 있는데, 정우택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홍석우 전 산자부 장관이다. 그가 “요즘 제가 우택이를 열심히 씹고 있긴 하지만 그때 우정이 평생을 가더라”고 말했다. 사실 이 시기는 오늘의 전원책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100권짜리 한국사상대전집과 세계사상대전집을 사놓으셨어요. 엄청난 분량이었습니다. 니체, 쇼펜하우어, 플라톤 등 근대철학까지 관통하고 동양사상이 집대성돼 있었습니다. 밑줄 그어가며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금도 서재에 꽂혀 있는데 제 책 ‘잡초와 우상’을 쓸 때도 참조를 많이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교 생활은 뒷전이고 문학이 먼저였다. 입학식과 졸업식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때 대학에 소홀했던 부채감으로 10년 동안 경희대에 출강을 하기도 했다.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것은 대학 시절인 1977년. 연작시 ‘동해단장’으로 100만원 고료 제2회 한국문학신인상을 수상했다.

한동안 시를 놓았던 그는 199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나무를 꿈꾸며’로 재등단한다. 그가 군대에 있던 시절이다. 그는 사법고시가 아닌 1981년 제4회 군법무관 임용시험을 통해 법조인의 길로 들어섰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제30기계화보병사단 법무참모로 군복무를 시작해 1991년 제6군단 법무참모를 마지막으로 전역하기까지 10년6개월 복무했다. 2006년 폐지된 군법무관 임용시험은 10년 이상 군복무를 해야 변호사 자격이 유지됐다.

당시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박두진·조병화 시인이었다. 그의 사무실 책상에는 심사평과 당선소감이 실린 조선일보 지면이 누렇게 빛이 바랜 채 액자 속에 보관돼 있었다. 심사평에는 ‘청순하고 섬세한 정서와 표현력이 공감을 얻어 앞으로 기대가 된다’고 적혀 있다. 당선소감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법률가가 된 것을 극심하게 후회하였으며 내 문화적 허영심은 다시 시를 쓰도록 부추겼다. 그러니까 글을 포기한 지 10년 만이었다…. 투고한 후 당선고료에 해당하는 술을 미리 마시고 투고한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인간을 심판하는 일보다 시를 쓰는 것은 확실히 멋이 있는 일이요,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시(詩) 이야기가 나오자 그가 최근에 쓴 기가 막힌 작품이 있다고 했다. 새벽 퇴근길에 가끔 마주치는 폐지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가 모델이라고 말했다. “내가 한 번은 할머니 대신 리어카를 끌고 폐지 버리는 곳까지 간 적이 있어요. 3200원 벌이인데 진짜 힘듭디다.” 그가 시가 실린 문예잡지를 들고 와 낭독했다. 제목이 ‘습관에 대해’이다.

‘수레 하나

늘 같은 시간에 길을 건넌다.

이 집 저 집

폐지들, 구긴 깡통들

하루 동안 버려진 것들의 부활을 위해

바퀴 둘 부지런히 길을 건넌다.

어제 싣고 간 희망에 대해

먹고 살려는 욕망에 대해

습관에 대해

언제나 오늘은

그저 매일 겪는 것들이라고 말해본다.

혹은 반복만이

버려진 생명의 반복만이

바퀴처럼 돌고 돌아

진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전거성’의 어록

그는 전역 후 서울 서초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연예인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연예인과 소속사 간의 계약 등이 법적으로 비화되기 시작한 때였다. 그가 맡은 사건 하나하나가 새로운 판례가 됐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칼럼을 실으면서 정치평론가로도 활약했다. 겁 없이 휘두르는 펜에 독자들은 환호했다. “칼럼이 실리고 2~3일은 사무실 전화가 불이 났어요. 울면서 전화한 사람도 있고, 복사해서 거리에 배포한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가 화제가 된 칼럼들을 나열하며 말했다.

방송 대담 프로그램에서도 출연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대표 논객의 탄생이었다.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은 경인방송 ‘박찬숙의 터놓고 말합시다’, 현대방송 ‘갑론을박’, KBS ‘열린토론’, MBC ‘100분 토론’ ‘손석희의 시선집중’ 등 셀 수 없이 많다. 인터넷에는 그의 돌직구 같은 발언들을 모은 ‘전거성 어록’도 돌아다닌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2007년 KBS 1TV ‘생방송 심야토론’에서 ‘군복무 가산점제’ 부활을 주장하며 내뱉은 발언이다.

“이 세상에 가고 싶은 군대가 어딨습니까?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고 아무리 자도 졸리고 아무리 입어도 추운 데가 군대입니다. 가고 싶은 군대요? 100만원 줘도 안 갑니다.”

다음날 ‘전원책’ 이름은 인터넷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전거성’이라는 별명은 이때 얻었다. 전원책 팬카페도 생겼다. 현재까지 활동 중이고 회원수가 1만7000명을 넘었다. 그도 팬카페 모임이 있을 때는 가끔 얼굴을 비춘다. SBS 제작자문 변호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그 덕분에 ‘썰전’에서 보여주는 예능감각이 길러졌다고 말했다. 그와 만난다고 하니 주변에서 ‘유시민’과의 찰떡궁합을 궁금해했다.

“둘이서 대화를 하면 단어만 이야기해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어요. 읽은 책이 비슷하고 생각이 비슷하니 굳이 설명이 필요 없어요. 하나의 즐거움이죠. 대본이요? 작가들이 자료집을 주는데 유시민은 열심히 읽고 옵니다. 정리를 잘해요. 난 대충 읽고 꼭 해야 할 부분만 짚죠. 첫 회 녹화가 끝나기 전에 벌써 호흡이 맞더라고요. 대신 역할분담은 하죠. 시사예능이니 누군가는 망가져야 한다. 그걸 내가 하는 거지. 시청률 5%가 넘으면 하차하자 했는데 10%를 몇 번 찍었어요. 머지않아 20% 넘을 테니, 박수 칠 때 떠나자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1989년 군법무관 시절의 전원책 변호사.
1989년 군법무관 시절의 전원책 변호사.

전원책이 말하는 대선주자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4시간여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큰일이다” “걱정이다”였다. 향후 10년에 대한민국의 100년, 200년이 결정되는데 선동가만 있고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도 정치에 잠깐 발을 담근 적이 있다. 2007년 17대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정무특보로 일했다. 자유선진당 대변인에 임명됐다가

4일 만에 그만뒀다. 대선주자들에 대한 그의 평가는 독했다.

“우리나라 정치판 물갈이해야 합니다. 정치를 하는 인간이 세 부류입니다. 무지한 인간, 천박한 인간, 세 번째는 천박하면서 무지한 인간. 한 정치인이 자신은 어디 속하냐고 묻기에 ‘세 번째’라고 놀려줬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무지한 자들이 70%에 속합니다. 30%는 알지만 천박해요. 교활하고 꾀를 부립니다. 여야 가리지 않고 친분 있는 의원들이 많지만 공부가 된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지식이 없는 지혜는 ‘말짱 꽝’이라고 했다. 특히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공부가 돼 있느냐, 무지하냐에 따라 대응능력이 다르다는 것. 어젠다에 대한 이해까지는 기대하지 못해도 브리핑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소양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도자가 꼭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지식, 용기, 결단력, 균형감각, 용인술’을 꼽았다. 현재 드러난 대선주자 중에서 ‘그래도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범보수 세력은 반기문 총장에 대한 기대가 많겠지만 단점이 많아요. 생가에 동상 만들 때 진짜 충격받았어요. 귀국할 때마다 카메라 세례 받으며 영웅이 된 줄 알아요. 지도자의 첫째 미덕인 겸손함을 잃었어요. 아무한테나 고개 숙인다고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과잉의전이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겁니다.”

“이재명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아요. 어려운 환경에서 컸으니 어두운 곳을 알겠지만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틀을 허물어버리려는 욕심이 너무 많아요. 너무 포퓰리스트식입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인 후안 페론과 비슷해요. 포퓰리스트도 체 게바라처럼 이념적이거나 드골처럼 애국적이면 괜찮은데 페론은 문자 그대로 권력을 위한 포퓰리스트입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우리 정치를 ‘패거리 정치’로 지적해왔다. 정당들이 이념과 정책이 아닌 보스나 명망가 밑에 수많은 권력지향성 인물들이 모인 ‘패거리’라는 것이다. 말이 명망가이지 바꾸어 말하자면 선동가이다. 그는 우리나라처럼 아직 이념이 대중화되지 않은 후진적 민주주의에서는 특히 선동가를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에 대한 비판도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혁명밖에 없다, 가짜 보수를 불태우자, 문제 있는 발언을 하는데 문재인이 말하는 진짜 보수가 무슨 보수인지 모르겠어요. 우리 진보주의도 반성할 점이 많습니다. 너무 대중에 의존하고 선동적이에요. 박수 받을 말들을 하면 대중에게 환심을 살 순 있겠죠. 그렇지만 제대로 된 지도자가 되려면 대중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고, 때로는 진실을 알려서 고통을 함께 겪자고 인내심을 강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짜든 진짜든 우리나라에는 그런 용기 있는 정치인이 한 명도 없어요.”

“안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철수가 새정치 하겠다고 나오니까 교수니 법조인이니 다 몰려들어요. 그런데 정책이라고 나온 것은 하나도 없고 ‘새·정·치’ 딱 세 글자란 말이죠. 뭐하자는 겁니까? 정책이나 이념을 보고 뭉쳤으면 절대 안 깨집니다. 안철수는 맹탕입니다. 고질적인 ‘보스’ 정치예요. 다들 자기가 정권 잡으면 나라를 당장 제대로 만들고 부패를 없애고 빈부격차 줄여주고 기업은 잘나갈 것이고, 꿈 같은 소리 하는데 말이 안 됩니다. 재화는 한정돼 있고 환경은 점점 어려워지는데 무슨 방법으로? 다음 정부는 누가 집권하더라도 국민에게 욕먹을 각오하고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지도자가 아니면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손학규는 안정감은 있는데….”

“잠룡들요? 대선판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이야기 듣고 있으면 기가 막힙니다. 제발 공부 좀 하고 나왔으면 좋겠어요. 국가 재정부터 하다못해 개고기 문제까지 공부해야 할 것이 끝이 없습니다. 대중을 감동시키려면 어젠다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보세요. 창조경제니 문화융성이니 본인도 모르는 말을 하고 있으니 국민 귀에 안 들리는 거예요.”

“대선주자들 보면 저는 정말 걱정이 많습니다. 북핵 등 내실 리스크도 많은 상황에서 이 사람들에게 5년을 또 맡겨?” 그가 고개를 연신 흔들었다.

정치비판서 3권을 포함한 전원책의 책.
정치비판서 3권을 포함한 전원책의 책.

전원책의 꿈

한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옮기려면 지면이 부족하다.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부터 보수와 진보의 정의, 국가 재정, 개헌 문제까지 끝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반공만 하면 보수가 되는데 정말 코미디입니다. 보수주의의 핵은 자유, 책임, 도덕성입니다. 이 세 개만 제대로 이해해도 보수적 정책인지 아닌지 구별이 됩니다. 그래서 이념의 대중화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편 가르자는 것이 아니라 이념 대중화가 되면 정책을 제대로 만들 수 있고 정책 개선의 길이 보입니다.”

“작년 말 기준으로 590조5000억원이 중앙정부 부채예요. 공기업 부채 500조원은 빠져 있는 수치입니다. 한전부터 가스공사까지 12개가 1년 내내 장사를 해도 이자를 못 갚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작년 14조원 줄였다고 큰소리치는데 쓸 만한 자산 팔아치운 겁니다. 두 개만 합쳐도 1100조원이 넘습니다. 지방공기업 부채 있지, 지자체 부채 있지, 다음 정권은 재정을 펴려고 해도 돈이 없습니다. 미국, 일본처럼 기초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에 양적완화도 마음대로 못 합니다. 제2의 그리스가 될 수도 있어요.”

재단법인 자유경제원장을 역임한 만큼 경제 관련 수치도 줄줄 꿰고 있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유난히 미래세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사실 청년들이 빚 내서 복지하겠다는 정치인 앞에 가서 시위를 해야 해요. 그 빚을 누가 갚아야 합니까? 바로 청년들이에요.”

“SNS의 폐해도 큽니다. SNS는 분노 인큐베이터입니다. 분노를 증폭시키고 우상화를 위한 도구로 사용될 위험이 아주 커요.”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보수의 몰락입니다. 보수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도 못하고 진보주의로 이행을 하면 우리나라는 참 회복하기 힘든 영원한 중진국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스가 우리나라와 너무 똑같아요. 내가 정말 걱정하는 것이 그겁니다.”

그는 “나도 일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야기를 끊지 못하고 핏대를 올렸다. 자정이 다 돼가는 시간에 전화가 울렸다. 집에서 온 부인의 전화였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만들어놓고 사진 찍어 보냈다고 봤냐고 하네요. 하~참.” 메시지를 확인한 그가 사진을 보여주는데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그는 만 47세에 현재 고려대병원 의사인 김성은씨와 결혼했다. 아이는 없고 부부 둘, 단출하다. 얼굴은 언제 보느냐 물었더니 “견우와 직녀죠 뭐. 별과 별이 돌다 보면 만나게 되겠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10월 이후부터는 모임도 끊고 책을 읽을 시간도 없다고 했다.

“평균 1주일에 10권 정도는 읽었는데 이번 달엔 새로 산 책이 한 권도 없어요. 그만큼 바빠졌어요. 내가 세 가지 꿈이 있어요. 자식도 없으니 돈 쓸 데도 없고. 돈 열심히 모아 예쁜 인문학 도서관 만들기, 죽기 전에 영화 만들기, 그리고 정치 비판서 다섯 권 쓰기.”

그는 지금까지 ‘자유의 적들’ 등 비판서만 3권을 썼다. 요즘엔 정치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방송에서 그가 농담처럼 대선 출마 발언을 던진 것이 생각나 물었다.

“돈이 없어 못 해요. 100만명이 1000원씩만 내면 할 수 있는데.” 농담처럼 받아 넘기고는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덧붙였다. “좋은 일이 생기겠죠.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기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어요. 대중들은 이제 다 압니다. 임계점에 도달하면 나오겠죠. 정 없으면 나라도 나설 테니 걱정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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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 장민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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