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ㆍ16군사정변 당시의 박정희 소장. ⓒphoto 조선일보
1961년 5ㆍ16군사정변 당시의 박정희 소장. ⓒphoto 조선일보

1961년 5월 17일. 전차 바닥에는 어제 몇 번씩이나 읽었던 신문호외가 뒹굴고 있었다. ‘군부 반공혁명’ ‘총지휘 장도영 중장’. 서울 용두동의 친구 권근술(훗날 한겨레신문 사장) 집으로 갔다.

안채에 무슨 일이 있는지 행랑채 격인 제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얼핏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놈의 일기장이었다. 거의 한 장을 채운 5월 16일 일기에는 민주주의와 헌법을 파괴한 군사쿠데타 ‘장도영은 나기브이고, 나세르는 나중에 등장할 것’ ‘남미처럼 군사 쿠데타 악순환에 빠질까 걱정’ 등이 쓰여 있었다.

천재였다. 감탄했다. 놈은 1961년 그해 입학한 문리대에서 발견한 첫 번째 천재였다. 혁명과 쿠데타의 분간은 그 후 신상초 선생이 글로 밝혔고, 박정희 소장이 나세르였음도 며칠 만에 드러났다. 다만 외모 하며 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나세르였다.

어영부영 1학년을 마치고 이듬해 입대한 해병대에서는 제대하는 날까지 나는 거의 매일 혁명공약을 복창·합창했다.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로 시작하는 혁명공약을 외칠 때마다 나는 근술이의 싱거운 듯한 웃음을 떠올렸고, 동기생 김진수는 늘 ‘국시’를 ‘국수’로 슬쩍 바꾸었다.

1963년 말 대통령 선거 때 해병대 사령부 의장대는 비밀·자유투표를 했다. 중대 선임장교인 송대원 대위(작고·해병소장)와 의장대장인 홍경식 중위가 독단적으로 준 선물이었다. 영호남의 구분은 전혀 없었고 대부분이 박정희를 찍었다. 중절모에 조끼, 거기다가 지팡이까지 짚은 윤보선보다는 젊고 없는 집 출신인 박정희가 해병대 기질에 맞았기 때문이다.

복학한 캠퍼스는 한·일수교 반대 시위로 몹시 시끄러웠다. 그리고 박정희는 내 예상보다 훨씬 나쁜 놈이 되어 있었다. 김중태·현승일·김도현의 활약은 눈부셨고 나는 그들이 지휘하는 데모에 수시로 참여했다. 일본의 경제 발전 단계가 우리를 도울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는 서울대 상대 홍성유 교수의 말씀은 청구권자금 확보에 안달하는 박정희의 진의를 의심케 하는 또 하나의 자료가 되었다.

요컨대 우리는 박정희의 모든 것을 믿지 않았다. 이 무렵 훗날 ‘내 평가의 여로’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칠 일이 하나 있었다. 1964년 말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파독광부와 간호원(그때는 다 이렇게 호칭했다)들을 만났을 때의 보도다. 대표로 나선 간호원이 “우리는 언제나 잘살아 봅니까” 하자 모두가 눈물을 훔쳤다는 기사였다.

당시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도시로 나가 식모살이나 점원 노릇을 하는 일이 흔했다.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서였고 어른들은 그걸 ‘사발 농사’라고 했다. 본가에 큰 우환이 생기면 식모살이하는 주인집에 가서 사정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는데, 그때 딸이 부모에게 하는 말이 바로 “우리 언제나 잘살아 봅니까”였다. 나는 많이 울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걸로 끝이었다.

독일을 방문 중인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1964년 12월 11일 베를린장벽을 방문해 동독 지역을 바라보고 있다. ⓒphoto 권이종
독일을 방문 중인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1964년 12월 11일 베를린장벽을 방문해 동독 지역을 바라보고 있다. ⓒphoto 권이종

최악으로 치달은 평가의 여로

1967년 말, 나는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편집국과 언론계는 신천지였다. 캠퍼스의 영웅들이 붕어로 보일 만큼 수많은 잉어들이 노닐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외신부에서 월척 왕잉어를 만났다. 유근일 선배였다. 그는 박정희를 손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7년 감옥생활 동안 영어·일어·독어·프랑스어를 완전 마스터했고 무슨 까닭인지 에스페란토어와 스페인어까지 익힌 사람인데 사람 아닌 사람(필자가 붙인 우리말 아호)이었다. 우리는 허구한 날 박정희를 비판했다. 그러나 지면에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궁리 끝에 두꺼운 공책 한 권을 사다가(나중에 두 권 합본이 되었다) ‘보고가는일보(日報)’를 창간했다. 내가 사장, 고흥길(3선의원·문체부 장관)이 주필을 맡고 훗날 중앙일보 고위 간부직을 두루 꿰찬 김동수·한남규·김영배·전육·이수근 등이 필진이었다. 배후 총두목은 물론 유근일.

신나게 박정희 욕을 써댔고 권력에 순응하는 국장·부장들 심지어 사장 주필까지 가끔 과녁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병철 회장만큼은 신성불가침이었다. 어느 날인가 김인호 편집국장(작고·새한제지 신라호텔 사장)이 야근 때 ‘보고가는일보’를 탐독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엄청난 자기 욕이 실려 있었는데도 전혀 내색이 없었다. 우리는 상의 끝에 높은 놈들이 다시는 읽을 생각이 들지 않도록 얼마 동안 최저질의 음담패설만 기고했다. 정말이지 열심히 열심히 박정희를 매도했다.(‘보고가는日報’는 지금도 필자가 보관 중이다.) 딱히 그렇게 규정한 건 아니지만 우리는 철학과 비전이 있으면 독재자에게도 호의를 보였다. 그 무렵 이런 범주에 든 독재자로는 카스트로, 나세르, 엥크루마 등이 꼽혔다.

1971년 4월, 중앙일보 순회특파원으로 카이로에 들른 나는 1년 전 죽은 나세르의 묘를 참배했다. 늦은 오후 그들이 모스크라고 부르는 영묘에는 시민들이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사랑과 존경의 증거였다. 그보다 앞선 3월에는 가나의 엥크루마 때문에 잊지 못할 경험도 했다. 3년 전 군사쿠데타로 실각한 그의 ‘블랙 스타 스퀘어(Black Star Square)’를 보려고 24시간 체류허가를 받아 가나에 갔을 때다. 행선지를 말하자 택시는 쾌속으로 질주했고 곧 숲길로 접어들었다. 한국에는 엥크루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라며 말을 걸었다. 갑자기 차를 되돌리더니 오던 길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검은 별 두 개가 장식된 타워 앞에서 그는 아예 관광가이드가 되었다. 한사코 택시비를 사양한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호텔에서 불러주는 택시만 타라”다. 사실 나는 그날 죽을 뻔했던 것이다.

다 같은 독재자지만 거대한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하고 멀리 떨어진 시리아와 통일아랍공화국을 출범시킨 나세르, 국민에게 높은 자존심을 갖도록 만든 엥크루마에 비해 박정희는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자긍심을 갖게 했는가. 아프리카에 오기 전 베를린에서 만난 윤이상씨 부부는 동백림간첩단사건의 전말(顚末)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박정희에 대한 나의 혐오감은 더욱 커져갔다.

그렇다고 내 평가의 여로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68년 1월 김신조 청와대습격사건 때는 ‘김일성 눈에 박정희는 죽여야 할 정도로 유능한 라이벌인가’ 싶었고, 1971년 ‘수출 10억달러 달성’ 때는 ‘우리 경제가 정말 이륙단계에 접어들었나’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에 대한 ‘내 평가의 여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분노했다. 증오했다. 강사로 나갔던 명지대·숭전대에서는 학생들에게 “새마을운동이 시멘트회사 재고처리 수단”이라고 떠들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일 정도로 박정희가 싫었던 것이다.

1974년 3월, 연초에 선포한 긴급조치 1·2호 위반자들이 조기 두름처럼 묶여 줄줄이 잡혀가던 어느 날 유근일 선배가 농을 건넸다. “요즘도 세상 사는 게 재미있어 죽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웃었다. 가장 큰 웃음소리는 외신부 옆 문화부의 장명수 선배(한국일보 사장)로부터 나왔다.

얼마 후 유근일 선배가 결근하기 시작했고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그의 얼굴은 한참 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방대한 조직표 속에서 조그마한 사진으로 접했다. 민청학련사건이었다. 이듬해 4월에는 내 차례였다. 기자협회 회장단 전원이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초대되었고, 풀려난 다음에는 김병익 회장(문학과지성 대표) 이하 거의 모두가 언론사를 떠났다. 나도 1975년 말 주필 겸 부사장과 대판 붙은 다음 신문사를 작별했다. 박정희는 개인적으로도 좋아할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유신 말기에는 언론계에서 쫓겨나거나 제 발로 뛰쳐나온 낭인들이 흘러넘쳤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곳곳에 출판사 간판이 걸렸다. 박정희 욕하러 모이기에는 딱인 장소였다. 특히 권근술이 광화문 인근에 차린 출판사 ‘청람’은 우리 모두의 대본영(大本營)이었고 권근술은 맹상군(孟嘗君)이었다.

나는 친구들이 온갖 미사여구와 허풍으로 소개해준 덕에 현대건설·대한조선공사·롯데건설에서 그때 막 불붙은 해외건설 수주부문 일을 했다. 하지만 번번이 6개월을 못 넘기고 복을 제 발로 차고 나오기를 반복했다. 짬날 때면 청람 등 출판사에 들러 아마도 6개월 이내 길어야 1년 이내에 유신정권이 붕괴할 거라는 견강부회 분석을 듣는 게 낙이었다.

1977년 12월 22일 한국 사상 최초로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했다. 사진은 광화문네거리에 세워진 기념 아치. ⓒphoto 조선일보
1977년 12월 22일 한국 사상 최초로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했다. 사진은 광화문네거리에 세워진 기념 아치. ⓒphoto 조선일보

개발독재 성공의 증거 앞에서

그러는 동안 ‘내 평가의 여로’에 영향을 끼친 두 가지 일이 있었다. KDI의 서상목 박사(3선 의원·보건복지부 장관)와 주학중 박사(작고·아시아개발은행 부총재)가 각각 국민소득분배에 관한 역저를 냈는데 로렌츠곡선이 공정분배의 대표 격이던 이스라엘보다 양호한 결과로 나왔다. 박정희가 재벌과 한통속이거나 적어도 주구(?)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또 하나는 신격호 회장에게서 발견한 애국심이었다. 신 회장은 격월로 서울에 와서 그룹사 주요 업무를 직접 챙겼는데 롯데건설이 100억원짜리 포항제철 확장공사에서 10억원이 넘는 적자를 내자 그 자리에서 당장 현장감사를 하라고 명령했다. 출근한 지 며칠 안 되어서였다. 나는 그날 밤기차로 감사팀을 데리고(?) 내려갔다가 밤기차로 되돌아왔다. 현장소장인 박상무가 “박태준 회장이 엄격해서 속일 기회가 전혀 없고 6개월 공기단축을 시키면서 추가경비는 한 푼도 계상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였다. 두 달 후 신 회장에게 보고하는 날 나는 안주머니에 사직서를 품고 말씀드렸다. “10억원은 대한민국에 헌납한 것입니다. 박태준 회장님이 애국자라서 생긴 적자이고 누구도 도둑질한 사람은 없습니다.” 신 회장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더니 손짓으로 물러가라고 했다. 그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대통령이 키우는 재벌 중에도 애국자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와 같은 흔들림은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녹음테이프 한 번만 들어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두 장만 읽어도 복날 눈송이처럼 깨끗이 사라졌다. 믿지 않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내 평가의 여로’는 1982년 5월 장영자 어음사기사건 때 대전환을 했다. 그해 지방세수 총액이 7400억원이었는데 6400억원어치의 어음이 휴지가 된 사건이었다.

초선의원이었던 나는 국민경제 전체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봤다. 한데 아니었다. 우리 경제의 볼륨은 어느 사이엔가 어마어마하게 커져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완전히 성공했다는 살아있는 증거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했다.

인식이 바뀌자 성공의 증거는 수없이 눈에 들어왔다. “박정희는 성공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스칼라피노 교수의 말도 비로소 제대로 귀에 들어왔다. 김정남(김영삼 대통령 교문수석)에게 털어놓았다가 엄청 혼이 났지만 나는 그동안 박 대통령에게 퍼부었던 온갖 비난이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1970년대 내내 심리학에서 말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서 깨어나자 모든 사실들이 새롭게 보였다. 1964년 1억달러, 1971년 10억달러, 1977년 100억달러 수출이 그때서야 기적으로 받아들여졌고 1977년의 쌀 자급자족도 고마워졌다.

산업화가 되어야 두꺼운 중산층이 생기고, 이들이 있어야 민주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1987년 6·10항쟁과 1990년 동구공산권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거듭거듭 확인되었다. 행동에 나섰다. 글과 말이었다. 13대 국회 낙선 후에는 4년간 총 274회의 초청강연을 다녔는데 거의 100회가량이 NL·PD계열에서 장악한 대학 총학생회 초청이었다. 거기에서도 나는 매번 정면으로 말했다. 동남아나 남미의 여러 나라들과 비교하면서 박정희를 옹호했다.

100억달러 수출 달성에 대해 “산야의 다람쥐까지 잡아 내다파는 수출 일변도 정책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을 주냐”고 떠들던 확증편향이, 박정희 대통령 사후 과잉투자로 공격받던 중화학공업 투자를 오히려 두둔하는 자세로 바뀌었다. 실제로 1990년대 중국 특수에 힘입어 번영을 누린 것은 이때의 과잉투자 덕분이었다. 이름깨나 있는 야당 투사의 자세 변화는 가끔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1997년 김영삼 정부 정무장관 시절 ‘박정희와 육영수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명의로 5단 통단 광고가 나가고 창립멤버였던 내 이름이 실리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문제 삼는다면 사표를 내겠다고 맞섰고 그냥 지나갔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기 1년 전쯤이었다. 김대중 총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표트르 대제를 꼽았고 그 얼마 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라를 위해 교회 종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수염에 세금을 매겼던 표트르와 박정희의 독재가 러시아와 한국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인상적인 말이었다.

2007년 5월 24일, 여의도 맨하탄호텔 양식당. 박근혜 대표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병기(주일대사·대통령비서실장)가 주선한 자리였다. 대선후보를 놓고 이명박과 경쟁 중이었는데 지지율은 절반도 안 되었고 게다가 나는 며칠 전 이명박에게 반(半)승낙을 한 상태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앉아 있는 박 대표를 보는 순간 ‘아버지에게 미안했던 일들을 이번에 딸 앞으로 갚아버리자’는 생각이 스쳤고 나를 사로잡았다. 전혀 검토한 적 없는 생각이었다.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거들겠다”고 답했다. 박 대표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홍사덕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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