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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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大衆)경제론과의 충돌이 ‘10월 유신’을 불러왔다.”

운동권에서 전향한 뉴라이트의 대표적 경제학자인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을 던졌다. 이 교수는 ‘장기집권 획책’과 같은 정치적으로만 접근했던 ‘10월 유신(維新)’을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이 교수는 박정희가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한 단초를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찾는다. 당시 대선에서 박정희는 ‘대중경제론’를 설파했던 김대중 후보와의 대결에서 신승을 거두었다. 박정희는 남미식 포퓰리즘의 변형인 ‘대중경제론’이 일반 국민의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결국 ‘수출주도형 공업화’라는 기존 정책의 연속성을 위해 불가피하게 ‘유신’을 단행했다는 것이다. 지난 12월 23일 서울대에서 만난 이영훈 교수는 “10월 유신을 경제적 측면에서 분석한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 박정희의 업적을 긍정평가하는 사람도 ‘10월 유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1972년 11월 ‘10월 유신’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90% 이상(91.5%)이 찬성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투표는 ‘준봉(遵奉)투표’라고 해서 강제적 측면이 있었다. 운동권 말단이던 나는 1971년 10월 학교에서 제적당해 경북 칠곡에 있는 집에 있었다. 유신 찬반투표를 하러 가니 동장이 ‘자네 투표는 내가 했네’라고 하더라. 결국 나는 찬반투표를 못했지만 90%가 넘는 찬성표에서 보듯 시대정신에 따른 국민적 동의가 있었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도 적지 않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 ‘유신’이 경제정책 지속을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인가. “박정희는 1963년 ‘한국형 국가혁신체제’를 마련했다. 기업, 정부, 노동자가 단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국민적 협동체제였다. 1963년부터 갑자기 성장률이 7%로 급등하면서 고도성장을 시작했다. 외자(外資) 도입과 수출공업 육성 등의 호(好)순환 구조가 마련됐다. 그 결과 한국은 1963년부터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연평균 9.1%의 성장률을 유지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이런 나라가 없고 아직 기록이 깨어지지 않았다.”

- ‘유신’을 촉발한 ‘대중경제론’은 무엇인가. “박정희가 ‘국가혁신체제’를 가동시킨 직후인 1965년쯤부터 세계적으로 ‘종속이론’ 광풍이 불었다. 마르크스주의가 후진국에 들어와 변형된 이론이다. 후진국은 선진국에 종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관계를 단절하고 자립경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도 없는데 외자를 도입하면 대외적으로 종속되고 이에 수출보다는 내수, 대기업보다는 농업과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을 제외하고 베트남·캄보디아·태국·인도 등 거의 모든 나라가 이를 수용했다. 체제는 다르지만 중국과 북한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보면 된다.”

- ‘대중경제론’은 어떻게 야당에 뿌리를 내렸나. “1965년 1월 박순천 민중당 대표가 국회 연두연설에서 박정희의 개발정책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100만 안정농가’ 창설을 주장하면서다. 1966년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유진오 박사는 ‘대중경제’를 제창하며 ‘제헌헌법에 명시된 사회균점을 실현하고 재벌경제로부터 대중경제로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주장했다.”

- ‘대중경제론’이 김대중에 의해 완성됐다고 알려졌는데. “유진오의 대중경제론은 1967년 통합 야당(민중당+신한당)인 신민당의 정강정책으로 발전했다. 재벌에 대한 특혜투자 지양과 대중(大衆)투자 실현, 외자도입 지양과 합작투자로의 전환, 공업제일주의의 지양과 농공합작의 실현, 대일(對日) 예속체제 지양과 자주체제로의 전환이 정강정책의 핵심이었다. 1971년 3월 김대중은 ‘김대중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을 출간했다. 좌파 지식인인 박현채, 정윤형, 임동규 등에 의해 대리집필된 것으로 알려진 책이다. 그리고 1971년 대선 때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공약으로 완성됐다.”

- 당시 지식층은 ‘대중경제론’을 지지했다는데. “당시 한국 지식인 가운데 세상 물정에 눈뜬 사람이 있었나? 당시 나는 대학교 1학년 운동권 말단이었다. 내 고향이 경북 칠곡인데,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부정선거를 감시한다고 대구로 파견됐다. ‘김대중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 책을 손에 들고 당시 김대중 후보 연설을 졸졸 따라다녔다. 당시 대선이 1971년 4월이었는데,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나는 투표권도 없었다. 홍위병(紅衛兵)들이 ‘마오쩌둥(毛澤東) 어록’을 들고 따라다닌 것과 똑같다.”

- 박정희는 ‘대중경제론’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나. “박정희는 경제를 몰랐다. 집권 초에는 우왕좌왕했다. 고도성장도 예상 못했다. 박정희가 ‘수출만이 살길이다’라고 확신을 가진 것은 1965년이다. 박정희는 ‘당장 모든 사람을 잘살게 하겠다고 공약을 내거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김대중은 1971년 대선 때 ‘대중경제론’을 앞세워 상당한 국민적 지지를 끌었다. 정치적으로 흥행했다. 다음 대선이 예정된 1975년에는 정권교체가 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지난 8년간 구축해온 국가혁신체제의 해체를 의미했다. 결국 박정희는 ‘국가혁신체제’가 1975년에 끝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 박정희는 누구로부터 조언을 받았나. “박정희는 강단 이론가보다 수출전선에서 뛰는 기업가의 말을 중시했다. 천우사(天友社)의 전택보란 기업가가 있었다. 대성목재를 인수해 국내 최초로 합판수출을 한 전택보는 일제 때부터 만주에서 무역을 했다. 광복 직후에는 홍콩으로 건너갔는데,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사람들이 홍콩으로 건너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아무것도 없는 홍콩은 수출가공업과 보세공업을 하고 있었다. 전택보는 박정희에게 홍콩의 이런 사정을 소개하며 수출가공업과 보세공업 육성을 주장했다. 또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 같은 기업인은 ‘우리가 가진 것이 왜 없냐. 여자들 머리카락이 있다. 가발이라도 만들어 수출하자’고 주장했다.”

- 결과적으로 ‘대중경제론’은 실패했다. “대중경제론은 박정희가 무너뜨렸다. 동아시아 신흥부국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1990년대 완전히 소멸했다. 대중경제론은 시장경제의 본질과 큰 차이가 있다. 시장경제의 본질은 경쟁이다. 시장경제는 항상 새로운 시장을 모색해야 한다. 새로운 시장에서 새롭고 창조적인 지식이 나오고, 좋은 제품이 나온다. 좋은 제품이 없으면 물건이 팔리나. 좁은 내수시장에만 머무르는 ‘대중경제론’에서는 절대 좋은 제품이 안 나온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1971년 대선, 1972년 유신 찬반투표를 못 했다고 했는데, 다시 투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박정희에 투표할 것이다. 그의 과학적·합리적 경제정책에 찬성한다는 뜻이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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