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에게는 있고 문재인에게 없는 것은? 정답은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 후원자’다.

197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많은 젊은이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들 중에는 미국에서 사업가로서 성공을 거둔 뒤 국내로 복귀해 정치적 꿈까지 이룬 인사가 더러 있다.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과 김혁규 전 경남지사가 대표적 인물이다. 뉴욕 한인사업가였던 김혁규와 박지원의 후원을 받은 김영삼(YS)과 김대중(DJ)은 모두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김혁규는 YS를 경제적으로 지원한 뒤 국내로 돌아와 경남지사와 국회의원을 지냈고, 박지원은 DJ를 후원한 인연으로 청와대 비서실장, 문체부 장관 등을 거쳐 현재 국민의당을 이끄는 4선의 중진의원이 됐다.

최근 사실상 대선 출마를 선언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귀국과 함께 다시 뉴욕 출신의 재미동포 사업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의 친구이면서 조언자인 김선남 전 뉴욕한인경제인협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1970년대 중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김선남씨는 뉴욕에서 식료품점과 부동산업을 하며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그는 1980년대 들어서 김영삼 전 대통령 측, 즉 상도동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런 까닭에 한때 정치인으로 변신을 고민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미국 생활을 유지한 채 국내에서 부동산 거래와 투자자문을 하며 경제인으로 남았다.

모두 뉴욕 한인경제인협회장 지내

2007년 평소 알고 지내던 반기문 전 외교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뉴욕에 둥지를 틀었다. 김씨는 반 총장이 뉴욕에 거주한 지난 10년 동안 반 총장의 가족보다 더 가까운 이웃으로 지냈다. 김씨와 김혁규 전 지사와 박지원 의원 모두 뉴욕에서 돈을 벌었고 뉴욕 한인경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사람은 모두 70대다. 올해 73세의 김선남씨는 이른바 ‘뉴욕 3인방’ 중 한 명이지만 아직까지 정치에 몸을 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온 걸까. 최근 귀국한 김선남씨는 반 전 총장의 대선 가도에서 모종의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3인방 중 마지막으로 정치적 꿈을 이루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씨의 고향은 충남 서산이다. 반 전 총장보다 나이가 두 살 위인 김씨는 1975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민 초기 그는 뉴욕에서 기념품을 주로 취급하는 사업체를 운영했다. 동시에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상대로 부동산 중개업도 했다. 김씨는 뉴욕에서의 사업 성공을 발판으로 1989~1990년 뉴욕 한인경제인협회장과 한미교류협회 상임이사 등을 두루 맡으며 한인사회의 대표로 활동했다. 이때 김씨는 YS는 물론이고 김덕룡 전 의원과도 교분을 쌓았다. 이렇게 김씨는 YS계에 편입돼 정치권 인사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반 전 총장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반 전 총장은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 겸 총영사로 미국 근무를 했고, 귀국 후에도 미주국장을 맡아 미국 한인단체와 만나곤 했다. 이에 앞서 반 총장은 1980년대 중반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반 전 총장은 YS정권에서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과 외보안보수석비서관을 맡았었다.

반기문·김선남 부인 충주여고 동창생

김씨와 반 전 총장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진 것은 두 사람의 부인이 충주여고 동창생이라는 사실을 알고나서부터다. 김씨의 부인 A씨와 반 전 총장 부인 유순택씨는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로 알려져 있다. 2007년 1월 반 전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면서 두 부부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반 전 총장 입장에서도 격의 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고 여기에 김선남씨는 안성맞춤이었다. 휴일이면 부부동반 골프를 치고 등산을 함께했다. 반 전 총장 부부는 일정이 없는 날 김씨 부부와 함께 저녁식사를 자주 했다. 사실 반 전 총장에게는 뉴욕 생활에서 집사 역할을 한 오모씨라는 존재가 있었다. 그러나 오씨가 얼마 전 고인이 되고 나서 반 전 총장과 김선남씨는 더욱 가까워졌다고 한다. 김씨는 반 전 총장의 외교관 후배들이 하지 못하는 사적 조언도 서슴없이 하는 관계다.

1989년 김씨는 뉴욕 한인경제인협회장 등의 단체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을 빈번하게 드나들었다. 그는 YS가 집권한 뒤 한때 정계입문을 고민한 적도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강남 소재 특급호텔 매각을 성사시키며 상당한 돈을 벌었다. 호텔 매각으로 종잣돈을 마련한 김선남씨는 각종 투자자문과 아프리카 자원개발을 추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김선남씨는 특히 김덕룡 전 의원과 친분이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전 의원은 최근 ‘국민이만드는헌법운동본부’(가칭)를 조직해 개헌에 앞장서고 있다. 반 전 총장이 개헌을 주요 공약 중 하나로 밀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덕룡 전 의원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김선남씨와는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김 전 의원의 말이다. “YS정권 초기 김선남씨는 미국에 주로 거주했다. 정권 말기에 한국에 들어와 사업을 했다. 이번 대선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할지 모르지만, 며칠 전 전화통화를 할 때 반 총장보다 하루 일찍 귀국한다는 얘기를 내게 했다.”

김선남씨는 반 전 총장의 정치적 조언자 역할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해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해 반 전 총장의 측근, 정치권 인사들을 두루 접촉한 바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김선남씨가 국내 정치동향을 파악하고 반 전 총장의 향후 행보를 지원하기 위해 역할을 하는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다. 실제 지난해 10월 말 한국을 방문한 김씨는 현역의원 여럿을 만나 정국현안을 듣기도 했다. 당시 김씨를 만난 국회의원 A씨는 “지인의 소개로 김선남씨를 만나 정국 흐름과 관련한 대화를 나눈 바 있다”면서 “혹시 오해를 살까봐 이런 얘기를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 주변의 외교관들 중에는 ‘사업가’인 김씨의 이런 행보를 우려 섞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반 전 총장은 관련 보고를 받고 나서 김씨에게 “행동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했다가 오히려 김씨가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무안해한 적이 있다고 한다.

반 전 총장 캠프의 좌장 격인 김숙 전 유엔대사는 “김선남씨는 사적으로 총장님께 조언을 하는 친구 같은 존재다. 반 총장님도 ‘김선남씨 잘 대하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선남씨는 귀국 전 기자와 두 차례 전화통화에서 “나는 (반 전 총장) 주변에 있는 사람일 뿐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김씨는 “정치는 메시지가 중요하다” “한국은 최순실병에 걸려 매우 힘든 상황”이라는 말도 했다.

김선남씨가 한국에 들어와 유력 대선주자인 반 전 총장을 어떻게 도울지는 아직 알려진 게 없다. 다만 반 전 총장의 대선캠프가 차려진 마포와 여의도팀이 그와 자주 소통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씨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도 잘 아는 사이라고 한다. 친이명박계 인사들 일부는 현재 반기문 캠프에 합류한 상태다. 캠프 일부 인사는 김씨에 대해 “비선이라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어서 조심스럽다”고 했다. 현재 반기문 캠프에서는 외교관 출신 인사들과 정치권 출신 인사들의 주도권 싸움도 일고 있다. 일부 정치권 출신 인사는 “정치를 잘 모르는 외교관들이 반기문 총장을 에워싸고 있어 걱정”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다.

김혁규, YS 첫 대면 때 거액 베팅

뉴욕 한인 이민자 가운데 제일 먼저 정치적 성공을 거둔 인물은 김혁규 전 경남지사다. 김씨는 197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혁무역’ ‘혁가방’ 등의 회사를 차려 성공을 거뒀다. 1979년 뉴욕 한인경제인협회장을 역임한 김씨는 1980년대 중반 뉴욕 현지에서 YS를 처음 만났다. 당시 YS와 동행한 김덕룡 전 의원의 설명을 들어보자.

“1985년경 나는 YS와 함께 뉴욕을 방문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고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뉴욕에 사는 YS의 매제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자리에 뉴욕서 사업하는 사람이 동석했다. 김혁규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87년 6·29선언 이후 김혁규씨는 한국으로 돌아와 정치를 시작했다. YS가 각별하게 챙겨줬던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뉴욕에 살았던 한 인사는 “김혁규씨가 YS와의 첫 만남에서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고 회고했다. 익명을 요구한 그의 말이다. “1980년대 중반 YS는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다. 근데 김혁규씨가 뉴욕을 방문한 YS와 처음 만나 거액의 정치자금을 내놓았다고 들었다. YS와 그 자리에 동석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액수였다. 그전에도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뉴욕에 오면 김혁규씨가 잘 대접했지만, YS를 직접 만날 때 확실하게 올인에 가까운 베팅을 했다.”

YS계로 편입된 김혁규는 1987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그는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부터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했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김혁규는 1993년 청와대 사정1비서관에 발탁됐고, 같은 해 관선 경남도지사에 파격적으로 임명됐다. 이후 민선 도지사로 내리 3선을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부산에서 나온 김 지사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권유로 한나라당을 버리고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바꾸며 정치적 변신을 꾀했다. 2003년 12월 당시 김혁규 지사는 “노무현 대통령이 지역구도를 깨고 경제를 살리는 일을 도와달라고 해 한나라당 탈당과 도지사직 사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김혁규 지사가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노무현 대통령과 물밑 교감을 가졌다는 뒷얘기가 파다했다. 1980년대 뉴욕에서 동포로 함께 어울렸던 김경재 자유총연맹 총재는 “김혁규는 사람이 점잖고 정치적으로도 무게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때 대권까지 염두에 두고 정치를 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2004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김씨는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지명될 것이 유력시됐다. 그러나 그해 6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패배했고 당내에서 김혁규 총리 지명을 철회하라는 요구가 빗발쳐 결국 지명이 철회됐다. 2007년 노무현 정권의 레임덕과 열린우리당 분당 사태로 파국을 맞을 때 김씨는 스스로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나며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미국 이민 후 성공한 사업가로 화려하게 복귀했던 그는 정계 입문 20년 만에 정치권에서 초라하게 퇴장했다.

김덕룡 전 의원은 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김혁규 지사는 뉴욕 한인사회에서나 국내 정치권에서 인간적 평가가 좋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을 탈당하며 변절자로 지목됐고 이후 입당한 열린우리당에서는 굴러온 돌로 인식돼 정치적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

김혁규 전 지사는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치권 인사들과는 교감하지 않고 지낸다. 종종 뉴욕을 방문하지만 현지 사업에서도 손을 뗐다. 뉴욕의 한 교민 사업가는 “김혁규 회장님은 어느새 70대 후반의 나이다. 현역에서 물러나 서울에 주로 머무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박지원, 김경재 소개로 DJ 후원 시작

뉴욕 교민사회가 낳은 대표 정치인은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이다. 박 의원은 뉴욕에서 가발과 주얼리 사업을 통해 상당한 부를 쌓았고 김선남·김혁규씨와 마찬가지로 1980년 뉴욕경제인협회장을 거쳤다. 박 의원의 사업은 현재도 그의 조카들이 물려받아 델리사업 등으로 사세를 확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1980년대 초반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씨와 가깝게 지냈다. 박씨는 당시 정권을 잡은 형 전두환 덕분에 권세를 두린 전경환과 어울리다 달걀세례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뉴욕에서 독립신문이라는 주간지를 발행하던 김경재 현 자유총연맹 총재가 DJ를 소개해 인생역전의 기회를 잡았었다. 김경재 총재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미국에 살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두 차례 망명을 모두 보필했던 사람이다. 1982년 DJ께서 미국으로 두 번째 망명을 왔을 때 워싱턴에 자리를 잡고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운영했다. 그런데 자금난을 겪어 사무실 문을 닫고 자택으로 사무실을 옮긴 일이 있다. 당시 DJ는 내게 전화를 걸어 ‘자네는 만날 뉴욕서 신문만 만들면 되겠는가?’라며 화를 내셨다. 자금난이 문제였다. 그래서 당시 뉴욕 32번가 브로드웨이에서 사업을 하던 박지원을 불러내 ‘YS보다 DJ에게 베팅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게 인연이 되어 오늘날 정치인 박지원이 만들어졌다.”

김경재씨는 DJ와 전화통화를 하고 나서 며칠 뒤 박씨를 데리고 워싱턴 소재 DJ의 자택에 방문했다. 당시 자택에는 이희호 여사와 김홍업씨가 함께 있었다. 이때부터 박씨는 DJ의 경제적 후원자가 됐다. 정치적 망명생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던 시절, 경제적으로도 곤궁했던 DJ는 박지원의 헌신적 지원을 받았고 이때부터 박지원은 ‘DJ의 남자’가 됐다. 박지원은 DJ가 운영하던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도 맡았다. 1987년 6·29선언 이후 미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온 박씨는 DJ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 온몸을 던졌다. 김경재 총재는 “박지원 의원은 머리가 좋은 재주꾼”이라면서 “DJ는 직언을 하기보다 맹목적으로 충성을 다하는 박지원을 더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는 1992년 민주당 전국구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DJ가 대통령 출마를 위해 만든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15대 총선에 나선 그는 부천시 소사구에서 김문수 의원에게 패했다. 이듬해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뒤 당선자 대변인부터 공보수석, 문화부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DJ정권이 끝나고 노무현 정권에서 진행한 불법대북송금사건에 휘말려 징역 3년형을 받는 등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2007년 노무현 정권 말기에 사면복권을 받은 그는 18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전남 목포에 출마해 당선되며 정치적으로 재기했다. 현재 4선 중진의 박 의원은 1월 15일 열리는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유력한 당대표 후보로 거론된다.

뉴욕 출신 한인 가운데 경남 출신의 김혁규 전 지사는 YS와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유력 정치인 반열에 올랐었다. DJ의 후광을 등에 업은 박지원 의원은 아직도 야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남아 있다. 과연 충청 출신의 반기문 전 사무총장이 올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뉴욕 3인방 중 한 명인 김선남씨가 정치적으로 빛을 보려면 반 전 총장의 대권 도전이 성공을 거둬야 한다.

김혁규, 박지원, 김선남 세 사람은 각각 사업 영역과 성격이 달라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고 있는 이모씨는 세 사람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김혁규 지사와 박지원 의원은 지역과 이념적 노선이 달라 친하게 지내지 않았고, 김선남씨도 박지원 의원과 잘 통하는 성격이 아니다. 특히 김선남씨는 목표 달성을 위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성격이다.”

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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