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대선이 가시화되면서 ‘정치공학’이라는 말이 난무하고 있다. 유래가 불분명한 이 용어는 요즘 정치권에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단골 무기로 쓰인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지난 2007년 개헌 성사를 위해 차기 대통령의 임기를 1년 가까이 단축하자고 주장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 주장도 문 전 대표 논리에 따르면 정치공학적 발상에 불과하다.”

이 말은 지난해 말 천정배 국민의당 전 대표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를 공격한 내용이다. 문 전 대표가 임기단축 개헌을 정치공학이라고 일축하자 오히려 문 전 대표의 주장이 정치공학이라고 되받아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기 위한 근거로 정치공학이라는 용어를 빌리고 있다.

정치공학이란 용어가 얼마나 자주 쓰이는지는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지난 연말 정병국 당시 개혁보수신당 창당준비위원장은 “진정한 보수 가치에 동의하는 분들과는 함께할 수 있지만 정치공학적 연대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은 지난 1월 6일 “제3지대론은 사실상 특정 유력주자(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개헌을 고리로 뭉치자는 것”이라며 “무엇을 하겠다는 청사진 없이 정치공학적 구도만 짜서는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1월 8일 미국의 가전전시회 CES 2017을 관람하고 돌아온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도 귀국 일성으로 “국민은 이제는 연대 이야기에 신물이 난다”면서 “이번에야말로 정치공학적 연대 시나리오가 난무하고 네거티브 선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 같아서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정치권의 누군가가 입에 올리는 단어가 정치공학이다.

정체불명의 한국식 용어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정치공학이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뭘까. 위키피디아는 이렇게 규정한다. ‘유권자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되지는 않는 형식적인 것(예를 들면 공통점이 없는 두 당의 합종연횡이라든가 선거제도 변경 등)을 정치인들의 이익을 위해 행하는 행위’. 결국 민심과는 동떨어진 정치인들끼리의 ‘꼼수’ ‘술수’ 정도의 의미로 해석된다.

정치공학이라는 용어를 이처럼 부정적으로 쓰는 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용례다. 영어에도 ‘정치공학(political engineering)’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그야말로 정치를 공학적으로 다루는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선거 표심을 정밀한 데이터 처리나 수학적 기법을 통해 분석한다든지, 특정 효과를 노리고 인위적으로 정치 제도 변경을 꾀하는 경우를 뜻하는 말이다. 미국 정치 전공자인 손병권 중앙대 교수는 “미국에서는 정치공학이라는 용어가 중립적인 의미로 쓰이지 우리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우리 정치인들은 상대방의 짝짓기는 정치공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짝짓기는 ‘정책연대’ ‘정치철학 공유’ 등으로 포장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치공학이라는 정체불명의 용어를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학자까지 등장했다. 홍영진 동명대 전기공학과 교수는 최근 경향신문에 기고한 ‘정체불명의 정치공학’이라는 글에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정치공학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횡행하고 있다”며 “정치공학이라는 단어의 탄생에는 분명히 정치라는 물건에 어떤 음험한 덧칠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홍 교수는 “정치에 더해진 음험한 덧칠, 이를 간결히 그리고 격에 맞게 표현하는 단어는 정치공학이 아니라 ‘정치기법’,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정치술수’”라며 “정치공학이라는 말은 퇴출되어야 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정치술수 자체가 퇴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정치공학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2010년 이후로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2010년 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의미의 정치공학이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았다. 특히 2010년 벽두를 달군 세종시 수정안 사태와 관련해 정치공학이라는 용어가 신문 지면을 장식한 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여당의 주요 계파인 친이(親李)와 친박(親朴)계가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복잡한 정치게임을 하면서 정치공학이라는 용어가 정치 해설에 등장했다. 세종시 수정안이 관철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당 주도권과 대통령의 레임덕, 대권의 향배가 전부 영향을 받는 고차방정식 같은 싸움이 전개되면서 이를 풀이하는 데 정치공학이라는 용어가 동원됐다.

정치공학이라는 용어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안철수 바람’이 불면서 당시에도 고차방정식을 풀듯 대선구도를 정치공학적으로 예견했다. 특히 ‘새 정치’를 상징하던 안철수가 과연 독자출마할지, 아니면 특정 세력과 연대할지를 놓고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돌았다. 당시에는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포위전략이 합종연횡 시나리오의 화두였다. 친이계와 동교동계가 안철수와 붙었다 떨어지며 대선 시나리오가 다양하게 변주됐다. 하지만 2012년 대선은 결국 문재인·안철수 후보 간의 야권 후보 단일화를 거쳐 박근혜·문재인 후보 간의 양자 대결로 승부를 가렸다. 숱한 정치공학적 계산과 시나리오들은 양자 대결을 원하는 민심의 흐름 속에 파묻히며 허망하게 사라졌다.

뉴DJP연합의 정치공학

최근 정치공학이라는 용어가 정치권에 무성한 것도 2012년과 비슷한 맥락이다. 조기대선이 가시화되고 2012년에 비해 대선구도가 더 복잡하게 얽히면서 정치인들 간의 이합집산을 염두에 둔 다양한 시나리오가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2017 조기대선이 어떻게 치러질지를 점치는 시나리오는 어지러울 만큼 종류가 많다. 유력 후보를 중심으로 하자면 문재인·반기문·안철수 3자 대결론이 일반적이지만 여기에 후보 단일화 가능성이라는 변수가 끼어든다. 2012년 대선처럼 문재인·안철수 두 사람이 또 한 번의 단일화를 거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대결하는 구도가 거론된다. 하지만 안철수 의원은 과거와 같은 연대나 단일화가 아니라 결선투표제 도입을 주장하며 문재인 전 대표를 압박하고 있다. 국민의당은 결선투표제가 과거와 같은 정치공학적 후보 단일화를 방지하는 장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통적인 야권 후보 단일화와는 정반대의 단일화론도 있다. 즉 안철수 의원이 반기문 전 총장과 단일화해 문재인 전 대표와 맞붙는다는 식의 시나리오다. 이는 ‘문재인 포위전략’으로 포장돼 돌아다닌다. 여기에 진영 논리가 가미된 제3지대론까지 끼어들면 더 복잡해진다. 개헌론을 매개로 제3지대에 모든 세력이 모여서 단일 후보를 낸 후 문재인 전 대표와 맞붙으면 더 큰 ‘문재인 포위전략’이 된다.

만약 반기문 전 총장이 막판까지 무소속 후보를 고집하면 어떻게 될까. 이는 정치공학자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변수다. 이럴 경우 막판 보수 후보끼리의 단일화 여부가 주목되면서 3파전, 내지는 4파전 그림이 그려진다. 만약 보수와 진보 진영에서 세대교체론이 부상한다면? 정치공학자들과 정치권 주변의 호사가들은 모든 가능한 변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더 복잡한 그림을 그린다. 물론 여기에서도 유권자들의 뜻에는 별 관심이 없다.

현재 나도는 정치공학적 대선 시나리오 중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은 제3지대론이다. 요즘은 비슷한 맥락에서 ‘뉴DJP연합’이라는 신조어도 자주 쓰인다. ‘친박’과 ‘친문(親文)’을 제외한 패권주의 거부 세력들이 개헌을 매개로 제3 지대에 모인다는 것이 골자다. 지역적으로는 과거 김대중·김종필 연대와 같은 호남·충청 연대를 바탕으로 제3지대에서 다양한 정파들이 뭉치자는 의미로 뉴DJP연합이라는 말이 쓰인다.

하지만 제3지대론이든 뉴DJP연합이든 아직은 ‘그림의 떡’이다. 이것이 제대로 성사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더 많아 보인다. 당장 제3지대에 나와 있는 세력 중 국민의당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간의 합침 정도가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아직까지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우호적이고, 필요성도 인정하고 있어서다. 안철수 의원 등 국민의당 지도부는 최근까지도 손학규 전 대표에게 러브콜을 보내왔다. 이는 지역적으로 보면 호남(국민의당)과 경기(손학규)의 연대다.

하지만 여기에 새누리당에서 떨어져 나온 ‘바른정당’이 가세할 수 있느냐만 해도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호남을 기반으로 한 국민의당 내부에서 바른정당에 드리워져 있는 새누리당 색깔에 대한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요즘 들어서는 바른정당에서 뉴DJP연합에 더 적극적으로 보인다.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는 1월 10일 한 라디오에 출연해 뉴DJP연합이 대선용 이합집산만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뉴DJP연합에 합류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협력은 크게 보면 국민통합, 협치, 지역 감정해소 등에 도움이 될 수 있고,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을 쓸 수 있는 제도를 만들 수 있는 기회”라면서 “(반기문 전 총장이) 저희들 후보가 된다면 가장 좋고, 저희들 후보가 안 된다면 그렇게라도 하는 것(뉴DJP연합)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고 말했다.

주호영 원내대표의 기대대로 제3지대에 나와 있는 대다수 정치인들은 뉴DJP연합의 방점이 반기문 전 총장의 합류에 있다고 보고 있지만 요즘에는 이것도 사정이 복잡하다. 당초 박지원 의원 등 국민의당 호남 의원들은 호남 기반 외연확장을 뜻하는 ‘선도정당론’을 주장하며 반기문 전 총장과의 연대와 뉴DJP연합에 관심을 보여왔다. 하지만 1월 15일 전당대회를 앞두고는 대체적인 기류가 안철수 의원이 주장해온 ‘자강론’으로 기우는 듯한 분위기다. 당권 도전을 선언한 문병호 전 의원은 1월 6일 부산 합동연설회에서 “원칙 없는 연대나 정치공학적 단일화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당권 주자 중 가장 유력한 박지원 의원도 지난 1월 10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일부 보도에 의하면 ‘박지원이 반기문 전 총장에게 뉴DJP연합에 관심이 있다’라고 잘못 보도되고 있으며 이를 민주당에서 곡해, 비난하고 나섰다”며 이렇게 해명했다.

“저는 약 1개월 전 반 전 총장과 가까우신 분이며 저와도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부터 ‘반기문 총장께서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으로는 가지 않고 국민의당에 관심이 있다. 또한 뉴DJP연합에도 관심을 가지십니다’라는 말씀을 듣고 ‘제가 뉴DJP연합에 대한 말씀을 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당 후보인 안철수 전 대표를 지지하지만 안 대표께서는 열린 정당, 열린 자세로 우리 국민의당 정체성을 인정하고 들어오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런 차원에서 손학규 대표, 정운찬 총리에게도 제안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반 총장께서도 우리 당에 오셔서 안철수, 천정배, 손학규, 정운찬, 반기문 이렇게 강한 경선을 하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3김의 정치공학 신화

이와 관련 국민의당의 한 의원은 “당장은 박지원 의원이 전당대회 전략 차원에서 안철수 의원의 자강론을 지지하는 듯하지만 안철수 의원의 지지율이 계속 뜨지 않을 경우 반기문 전 총장과의 연대에 다시 관심을 보일 것이 분명하다. 그럴 경우 국민의당은 전통적인 야권 연대를 주장하는 쪽과 뉴DJP연합을 지지하는 쪽으로 양분될 수 있다”고 했다.

뉴DJP연합론자들은 이른바 9회 말 역전을 꿈꾸는 세력들이라 할 수 있다. ‘큰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역전의 찬스가 온다고 믿고 있다. 그들이 꿈꾸는 마지막 ‘큰 그림’의 완성은 강력한 개헌론자인 김종인 의원 등 민주당 비문(非文) 세력의 합류다. 그럴 경우 전세가 하루아침에 역전되면서 가장 앞선 문재인 전 대표를 고립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대세론’이 타격을 받아 꺾이지 않을 경우 이는 정치적 공상에 가깝다. 문재인 대세론과 정권교체 논리를 떠받치는 민심이 떠나가는 것이 선결 조건이다.

정치공학을 위키피디아의 정의대로 ‘유권자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되지는 않는 형식적인 것(예를 들면 공통점이 없는 두 당의 합종연횡이라던가 선거제도 변경 등)을 정치인들의 이익을 위해 행하는 행위’로 보면 성공한 정치공학은 모두 3김(金) 시대에 나왔다. 대표적인 것은 YS가 주도한 3당 합당과 DJP 연합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패권을 추구해오던 정치 거물들이 그야말로 정치공학적 계산을 앞세워 정치판을 인위적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민심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어떻게 보면 ‘그들만의 승부수’였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정치공학적 계산이 먹허들면서 3김이 정권 획득에 성공하는 기록을 남겼다. YS는 3당 합당을 통해 1993년 14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DJ와 JP는 DJP 연합을 통해 1998년 공동 정권을 창출해냈다.

이러한 3김의 족적을 지나오면 성공한 정치공학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2002년 대선 당시의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정도가 성공에 근접했던 정치공학이었다. 당시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후보 자리를 꿰찬 노무현은 오히려 후보가 된 이후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이회창 대세론’에 눌려 있었다. 결국 그는 2002 월드컵 바람을 타고 인기를 얻던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와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라는 전대미문의 승부수를 던져 노무현·정몽준 공동 정권이 탄생하는 게 아니냐는 기대감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정몽준이 투표일 하루 전 단일화 합의를 파기하면서 노무현 1인의 승리로 끝이 났다.

대다수 정치 전문가들은 이제 정치공학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말한다. 대통령 탄핵을 몰고온 촛불민심에서 보듯 이제 정치판을 움직이는 것은 소수의 정치인이 아니라 여론과 민심이라는 것이다. 2017 대선은 과연 정치공학의 무덤이 될까 아니면 이례적으로 ‘큰 그림’ 그리기에 성공할까. 대선 판도가 너무 많은 변수 속에 안갯속 국면을 이어가는 한 정치인들이 정치공학적으로 판을 한번 바꿔보겠다는 유혹을 끊어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정장열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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