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저우여우광
故 저우여우광

중국인들이 쓰는 스마트폰의 자판은 얼마나 많을까. 놀랍게도 우리와 비슷한 수의 자판으로 되어 있다. 중국인들이 스마트폰에 ‘韓國’이라고 입력을 하려면 영어철자로 된 자판에서 ‘h-a-n-g-u-o’라고 입력하면 LED창에 ‘1.韓國 2.喊過 3.汗國 4.漢國’이라고 네 개의 같은 발음 한자 단어가 뜬다. 스마트폰 자판으로 ‘1’을 누르면 LED창에 ‘韓國’이 입력된다. 우리가 ‘한국’을 스마트폰에 입력할 때 ‘ㅎ-ㅏ-ㄴ-ㄱ-ㅜ-ㄱ’을 입력하면 ‘한국’이라는 글자가 조자(造字) 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입력하는 데 걸린 시간은? 중국어 쪽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지만 중국 스마트폰에서는 때때로 ‘h-g’만 입력해도 ‘韓國’이라는 글자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우리의 스마트폰 자판으로 한국어를 입력하는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韓國’을 입력할 수 있다. 더구나 요즘 중국 젊은 세대들의 손가락이 스마트폰 자판 위에서 움직이는 속도는 놀라워서 중국어 문장 입력 속도가 우리 젊은 세대들의 한글 입력 속도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데스크톱 컴퓨터에 붙어 있는 키보드의 구조도 스마트폰의 구조와 똑같다. 중국의 젊은 세대들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의 박자는 우리 젊은이들이 키보드 두드리는 속도보다 느리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현대 중국에서 컴퓨터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스마트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한자(漢字)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한어병음(漢語併音·Pinyin)’이라는 발음 표기 시스템이 일찍이 만들어져서 1958년 우리의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채택됐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중국인들이 그 복잡하고 엄청난 숫자를 자랑하는 상형문자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시대와 스마트폰 시대를 맞을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1월 14일 베이징(北京)에서 111세로 세상을 떠난 저우여우광(周有光)의 공(功)이다.

이 인물에 대해서 미 뉴욕타임스는 ‘저우여우광, 중국어를 ABC처럼 쓸 수 있게 한 사람, 111세로 타계’라고 썼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그가 한어병음 방안을 만들고, 간소화된 한자를 제정하지 않았으면 중국의 이전 문맹률 85%가 그대로 유지됐을 것’이라고 저우여우광의 공을 기렸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외국인들이 중국의 문자 언어 생활에 접근하려 할 때 받는 고통도 저우여우광이 크게 줄여주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저우여우광은 1906년생이다. 중국 동부의 창저우(常州)에서 출생해서 만청(晩淸),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세 시대를 살아왔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에는 중국의 근대사가 그대로 녹아 있다.

원래 그는 언어학자가 아니었다. 청조의 관리 집안에서 태어난 저우여우광은 상하이(上海) 성 요한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신화(新華)은행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1946년 신화은행 뉴욕 대표기구로 발령이 났다.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3년간 일하고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중국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몇 년간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통일된 중국을 관리하기 위해 ‘보통화(普通話)’라는 이름의 표준어를 제정해서 보다 체계적인 언어소통이 이루어지도록 애쓰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주도로 언어주비위원회를 만들어서 문자의 간소화와 표준어의 보급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때 저우언라이 총리의 눈에 띈 사람이 저우여우광이었다.

그때로서는 많지 않았던 미국 뉴욕 근무자로 영어를 잘 이해하고 있던 은행원 저우여우광을 언어위원회에 발탁한 것은 저우언라이 특유의 안목 때문이다. 저우 총리는 저우여우광이 평소에 언어학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저우여우광은 언어위원회 근무에 난색을 보였다. 저우언라이는 “어차피 우리 모두가 문외한”이라는 말로 저우여우광을 끌어들였다.

더구나 당시 이상적인 공산사회의 건설을 꿈꾸고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른바 ‘반우파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상황도 저우여우광을 언어학자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 뉴욕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경제학자로 분류된 저우여우광을 어쨌든 본보기로 처형하려던 것이 마오의 생각이었다면, 저우언라이는 저우여우광의 근무지를 언어위원회로 바꾸어줘서 중국인의 언어 문자 생활 개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저우여우광은 이때부터 평생 동안 중국어와 한자의 간소화를 연구하도록 새로운 임무가 부여됐다. 저우여우광은 1955년 중국어를 로마자로 적는 한어병음 방안을 만들어냈다. 중국 어음의 표기를 로마나이즈화하고, 음소(音素)를 분리하고, 문어(文語)가 아닌 구어(口語)로 적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저우여우광은 베이징(北京)대학을 비롯한 대학들을 순회하면서 ‘한자개혁 개론’을 강의하기도 했고, 한어병음 사전을 만드는가 하면 중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한어병음 방안에 국제 표준화 기호 ISO7098를 따서 붙여놓기도 했다.

저우여우광의 한 세기에 걸친 노력 덕분에 중국인은 컴퓨터 부품 이름과 컴퓨터에 사용하는 용어를 모두 중국어로 번역해 표기하는 게 가능해진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으로 중국어를 배워 중국을 잘 이해해 보기를 원하는 외국인들에게는 모든 컴퓨터 용어를 중국어로 통일적으로 번역해서 표기하는 중국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안 그래도 중·고등학교 수준에서 간체자를 배울 기회가 없어 중국의 거리에서 문맹이 되어버리는 한국인들이 듣도 보도 못한 중국어 컴퓨터 용어 앞에서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는 상황은 갈수록 심화될 것 같다. 각종 컴퓨터 용어를 영어 그대로 사용하는 우리도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번역을 주관하는 통일적 언어관리 위원회를 조속히 만들어서 컴퓨터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는 중국어에 보조를 맞춰나가야 할 것이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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