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6일 제주도에서 열린 ‘자유·법치사회 회복을 위한 시국강연회’에 참석한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photo 뉴시스
지난 2월 6일 제주도에서 열린 ‘자유·법치사회 회복을 위한 시국강연회’에 참석한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photo 뉴시스

지난 2월 11일 오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탄핵반대 국민대회’ 참가자 중에 주목받은 인물이 있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제주도지사를 지낸 신구범씨다.

신씨의 이력은 특이하다. 마지막 관선(官選) 도지사를 지내고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1995년 첫 민선(民選) 도지사에 당선됐을 당시 신씨는 무소속이었다. 그러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으로 원희룡 현 도지사와 맞붙었다. 7만3000표 차로 원 후보에게 패하고 나서는 경쟁자였던 원 후보를 도왔다. 원희룡 당선자의 요청에 따라 인수위원장 자리를 맡았다. 이 때문에 신씨는 당으로부터 당원 자격 1년 정지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징계가 끝나고 나서도 더불어민주당 당적을 유지하던 신씨는 지난해 12월 탈당계를 제출했다. 지난 2월 6일 신씨는 제주도에서 처음 열린 탄핵 반대 시국 강연회, ‘자유·법치사회 회복을 위한 시국강연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2월 11일 집회에서는 연단에 서서 탄핵에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연설하기도 했다.

신씨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한 제주 지역 신문은 “아연실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왜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연단 앞에 서게 됐을까. 당적을 버리고 탄핵 반대 목소리를 내기로 한 과정에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주말 집회를 마치고 제주도에서 생업에 복귀한 신씨와 두 차례 전화인터뷰를 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진실이 바뀌었다”

신씨는 처음부터 탄핵 반대 집회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저는 원칙, 법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일단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됐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남았으니 조용히 지켜보자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탄핵소추안 통과 이후에도 계속된 촛불집회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얼른 인용하라고 압력을 주는 모습을 보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판에 대해 부당한 압력을 가하고 간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탄핵 과정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더불어민주당 당원이었다. “사실 당으로부터 징계도 받았고 더불어민주당이 제가 원래 입당하려던 당이 아니라 합당된 곳이기는 하지만, 이 나이에 탈당이니 뭐니 부산스럽게 구는 것도 아니다 싶어서 당적을 잊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 것이 아니다. 2014년 2월, 그가 손을 잡았던 사람은 안철수 의원이었다. 안 의원이 ‘새정치’를 표방하며 등장했을 때 신씨는 “우리에게는 새정치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해 함께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 의원과 손잡은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의 소속은 생각지도 않게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바뀌었다. “사실 저와 안철수 의원과의 인연은 그때 끝난 겁니다. 새정치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해 함께 손을 잡은 사람에게, 최소한 합당하기 전에 동의를 구하지는 못할망정 다른 곳에서 합당 소식을 듣게 해서 되겠습니까. 합당이 되고 나서 저는 안철수 의원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6월에 열리는 지방선거를 3개월 앞두고 있었던 일이었다.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4월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습니다. 당내에서 치열하게 경선하는 모습을 자제하자는 분위기에, 유력한 후보인 원희룡 지사에 대항할 후보가 마땅치 않자 저를 추대하는 분위기가 됐어요.” 신씨는 수십 년 몸담아온 정치판에 멋진 작별을 고할 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정치인으로 어떻게 경력을 마무리해야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저를 믿고 지지해주던 제주도민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라고 생각했어요. 아내의 손을 잡고 신나게 선거 운동을 했습니다.”

선거에서 떨어지고 그는 정치판을 떠났다. 그런 그에게 민주당이든 다른 정당이든 당적은 별 의미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탄핵 정국이 모든 것을 바꿨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제가 알던 것이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탄핵을 인용해라 기각해라 말이 많은데, 제가 줄곧 주장하는 바는 이 탄핵 정국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신씨는 “수사 중인 사항으로 중대한 헌법 위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잡범 취급하는 언론과 야당에 특히 실망했다”고 말했다.

“탄핵이 인용되고 나서 야당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여당을 제쳐두고 야당과 둘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황 대행에게 ‘대통령인 것처럼 굴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치 점령군이 된 것처럼요.”

나라를 바로잡는 기회가 되길

신씨는 그런 야당의 당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탄핵 정국에 야당의 책임은 아예 없는 것처럼 의기양양해 하는 게 지금 취해야 할 모습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야당 역시 국정 운영의 동반자로서 국민에게 사죄를 하고 자숙해야 하는 상황에서 황 권한대행을 비난하고 탄핵 심판에 압력을 가하는 모습이 경악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난해 12월 15일 탈당계를 제출했다.

신씨가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언론이 아니라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였다. “주변 사람에게 많이 물어보고 혼자서 정보를 많이 찾아봤습니다. 집회에 나가 보고 강연회를 참석해 보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정보를 찾아본 사람만이 진실을 알겠더라고요. 그렇게 눈이 가려져 있었던 겁니다.” 신씨는 다른 ‘눈 가려진 사람들’에게도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난 2월 6일 제주도에서 처음 열린 시국강연회가 그런 자리였다. “서경석 목사와는 오랜 인연이 있어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좌파 시민단체에서 달려와 서경석 목사를 욕하는 시위를 벌이더라고요. 저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얘기하려던 것은 오로지 탄핵 정국에 대한 것이었는데 서 목사가 예전에 제주 4·3사건에 대해 발언한 것을 두고 오히려 사상 비판을 해대더군요. 우리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고 되레 색깔론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신씨는 서울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제가 육사 22기인데 동기들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사실 제주도에는 촛불밖에 없거든요. 태극기 집회에 3번 정도 나가 봤는데 제주도에도 태극기를 옮겨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평범한 시민인 신씨가 집회를 이끌 힘은 없다. 다만 사람들을 모아 두고 진실을 알리는 일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521장 ‘어느 민족 누구게나’를 부르다 보면 참과 거짓이 싸울 때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촛불만 있는 제주도에서 태극기를 펼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참을 선택하고 밀고 나가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이 나라를 바로잡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이 나이에 나라를 위해 할 일이 있어 즐겁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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