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김정남을 독살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 현지 매체 더스타가 공항 CCTV에 포착된 여성 동영상을 입수해 보도한 것이다. ⓒphoto 더스타 영상 캡처·뉴시스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김정남을 독살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 현지 매체 더스타가 공항 CCTV에 포착된 여성 동영상을 입수해 보도한 것이다. ⓒphoto 더스타 영상 캡처·뉴시스

김정남의 독살이 김정은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 맞다면 상식적인 질문이 남는다. 왜 김정은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용의자까지 노출해가면서 김정남을 죽였느냐는 점이다. 지난 2월 13일 김정남이 독살된 장소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 2청사의 항공편 탑승권 발매용 키오스크(무인단말기) 부근이었다. 인적이 붐비는 공공장소였고, 특히 입출국으로 바쁜 오전 9시경이었다. 용의자가 노출되기 쉬운 장소와 시간대에 엽기적인 방법으로 암살을 자행한 것이다. 말레이시아에는 북한 정찰총국 산하의 사이버 작전 기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은은 왜 ‘은밀한 암살’이라는 상식을 뒤엎은 걸까.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급박하게 김정남을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고, 만약 그렇다면 김정남의 망명이 그 이유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공항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암살을 자행했다면 그럴 만한 긴박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며 “최근 김정남의 망명설이 유포돼 있었고 실제 제3국 망명이 추진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유 원장은 “김정남이 중국령인 마카오로 들어가기 전에 암살을 시도한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며 “김정남을 보호해온 중국령 마카오로 일단 들어가면 김정남을 건드리기 쉽지 않고 망명이 추진되더라도 막을 수 없게 되자 공항에서 급하게 죽인 게 아닌지 의심된다”고 했다.

국가정보원이 지난 2월 15일 국회 브리핑에서 김정남의 망명 시도설에 대해 “그런 건 없었다”고 밝혔지만 최근 외교가에는 “김정남이 2월 초 신변 위협을 느끼고 한국 망명을 시도한 정황이 있다”는 말이 돌았던 게 사실이다. 김정남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몇몇 측근 외교관과 함께 한국 망명을 준비 중이란 소문이 있었고, 이러한 소문에 대해서는 국정원에서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남이 남한으로의 망명을 위해 우리 측과 접촉하려다가 북한 정보망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MB정권서 추진됐던 김정남 망명說

김정남은 과거에도 남한으로의 망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한 대북 소식통은 “MB정부 초반기인 2009년 김정남 망명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추진됐었는데 임태희 청와대 비서실장의 싱가포르 대북 비밀 접촉으로 남북관계 회복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중단된 걸로 안다”고 했다. 임태희 전 실장은 200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을 만나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양해각서 초안까지 만들었으나 최종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밝힌 바 있다. 임 전 실장은 전화통화에서 “당시 김정남 망명이 추진됐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MB정권 당시의 김정남 망명 시도는 최근 한 국내 매체가 보도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지난 2월 11일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낸 편지가 김정남을 통해 김정일에게 전달됐다고 보도하면서 2012년 대선 때 국정원이 김정남 망명 공작을 시도한 정황을 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당시 김정남은 한국보다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미국 측과의 협상이 결렬됐고, 한국도 김정남의 ‘요구’를 맞출 수 없어 포기했다는 것이다. 대북 전문가들은 최근 김정은이 이 같은 보도를 보고 격분했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김정남은 과거 남한으로의 망명을 고려하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선뜻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단 베이징과 마카오, 유럽 등에 흩어져 있는 가족들을 한꺼번에 몰래 빼내오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고 한다. 또 자신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온 중국보다 남한이 더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도 서지 않았던 것 같다. 이종사촌인 이한영이 1997년 남한에서 암살당한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최근 다시 불거진 김정남 망명설과 관련해서는 ‘말레이시아 루트’도 주목받고 있다. 한 대북 소식통은 “말레이시아는 북한 고위층이 남한으로 망명할 때 은밀하게 자주 쓰는 루트”라며 “김정남도 말레이시아에서 한국 등 제3국 망명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지난해 중국에서 일하다가 탈북한 북한 여종업원 13명도 말레이시아 루트를 이용해 한국에 들어왔다. 김정남은 말레이시아에 자주 머물면서 싱가포르에 있는 내연녀를 방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 망명정권설과 이번 암살과의 연관성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지지통신은 “최근에도 (김정남이) 일종의 망명정권 간부로 취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관측이 있었다”며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종종 그에 대한 암살미수 정보가 퍼졌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김정남이 후계 경쟁에서 탈락하고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한 후에도, 김정남이 장성택 등과 연대해 중국을 방패 삼아 김정남을 새로운 지도자로 세운다는 계획이 있다는 소문이 난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이러한 중국 후견하의 김정남 역할설은 특히 미국의 트럼프 정권 등장과 맞물려서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미국으로부터 세컨더리 보이콧 등 대북 제재 동참 압박을 받고 있는 중국이 실제 김정은을 김정남으로 대체하는 데 관심을 가졌을 수 있고,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김정은이 김정남 소환을 추진하다 여의치 않자 제거한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대내외 경고 위한 충격요법?

물론 김정남을 공항에서 암살한 데는 전혀 다른 배경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즉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행동에 옮길 수 있다’는 대내외 경고를 위해 비상식적인 암살을 자행했다는 시각이다. 일종의 충격요법이라는 것이다. 북한은 1997년 이한영을 암살할 때도 공작원용 권총을 사용해 ‘우리가 암살했다’는 흔적을 남겼다.

국정원에 따르면, 김정은은 5년 전부터 김정남 암살을 집요하게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 15일 국회 정보위 간담회에 나온 이병호 국정원장은 김정남 암살이 김정은의 ‘스탠딩 오더’라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즉 김정남 암살이 취소 명령을 내릴 때까지 유효한, 반드시 처리해야 할 명령이었다는 것이다. 김정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5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고, 집요한 암살 시도에 시달린 김정남이 2012년 4월 ‘저와 제 가족을 살려달라’ ‘저와 제 가족에 대한 응징 명령을 취소해달라’ ‘저희는 갈 곳도 피할 곳도 없다. 도망가는 길은 자살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등의 하소연을 담은 서신을 김정은에게 보낸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김정남은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기던 중국 베이징에서도 암살당할 뻔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2012년 10월 국가보안법상 특수입·탈출 등 혐의로 북한 공작원 김모(50)씨를 구속기소하는 과정에서 김씨가 2010년 7월 북한 보위부 윗선으로부터 베이징에서 택시기사를 매수한 뒤 교통사고를 가장해 김정남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는 진술을 얻었다. 암살 기도는 김정남이 중국에 들어오지 않아 무산됐는데, 당시 중국 정부는 북한 측에 “중국 내에서 이런 일을 벌이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철우 국회 정보위원장은 “(김정남 피살은) 통치에 위협된다는 계산적 행동보다는 김정은의 편집광적 성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정남 암살이라는 돌발 사건이 향후 남북관계와 국내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우리만 모를 뿐 이미 북한에서 심각한 내부 균열이 진행되고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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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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