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푸동(좌)과 푸시(우)를 배경으로 사진 찍은 김정남. ⓒphoto 김정남 페이스북
상하이 푸동(좌)과 푸시(우)를 배경으로 사진 찍은 김정남. ⓒphoto 김정남 페이스북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독살당한 김정남(金正男·46)은 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북한의 체제 구조상 최고권력자 김정은(金正恩·33)의 교사(敎唆) 없이는 김정남의 죽음은 현실화될 수 없었다. 김정은의 생모는 재일동포 출신의 고용희였고, 김정남의 생모는 성혜림이었다. 김정일(金正日)을 같은 아버지로 하는 이복형제라는 핏줄과 권력 다툼이 김정은으로 하여금 김정남을 죽이지 않고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불구대천의 관계로 만든 것일까.

김정남의 사망을 보는 중국 웨이보(微博) 블로거들의 견해는 좀 다르다. 김정은이 김정남을 독살 교사한 것은 당연히 패륜이지만 그것은 북한 내에 중국식 개혁개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노선 투쟁에서 최종적으로 김정남이 지지하던 개혁개방 노선이 패배한 결과라는 것이다. 김정남의 패배는 2013년 12월 12일 친중(親中)주의자 장성택 조선노동당 행정부장이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고사총 숙청을 당함으로써 예고됐던 패배였다. 2010년 김정일이 세 차례나 베이징을 방문해서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을 만나 이른바 ‘개혁개방 학습’을 할 때 김정일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중국 지도자들과 김정일의 대화를 메모하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장성택이었다. 김정일과 장성택의 그런 모습은 많은 중국 지도자들에게 김정일의 북한이 보다 개방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의 돌연한 사망은 북한 내 중국식 개혁개방 노선의 사망선고이기도 했다. 웨이보 블로그에 뜬 차이나데일리 뉴스에 따르면, 1971년생인 김정남은 9세 때부터 스위스 유학을 하는 10년 동안 개방적인 서양을 충분히 구경하고 왔다. 이후 귀국해서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해야 국제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생각의 씨앗을 갖게 됐다. 김정남은 1990년 평양으로 귀국한 뒤 1994년 할아버지 김일성이 사망하자 기회 있을 때마다 아버지 김정일에게 중국식 개혁개방에 대한 자신 나름의 생각을 전달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1989년 12월 처음으로 중국 여행을 했고,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은 주로 중국에서 거주하면서 특히 상하이(上海)의 고속발전을 자주 가서 보았다. 그러나 김정일의 생각은 확고했다.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면 더 이상 김씨 왕조의 권력세습은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더구나 2008년 9월 9일 김정일은 북한 정권 수립 기념일 행사에 불참했고, 이유는 뇌출혈과 심장쇼크로 반신불수 상태에 빠진 때문이라는 사실이 공개됐다. 김정일의 마음은 다급해졌고, 그런 김정일의 눈에 순수 백두혈통은 아니지만 어린 김정은이 자신의 후계자로 더 적합한 것으로 판단됐다.

당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이미 2001년 5월 도미니카공화국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적발돼 추방당하는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김정일의 눈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났다. 김정남은 그 이전에도 세 차례나 일본에 밀입국을 시도한 일이 있었으며,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정남은 일본의 홍등가에도 출현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2003년부터는 북한 군부에서 김정은과 김정철의 생모인 고용희 숭배 분위기가 조성됐고, 이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바라지 않는 군부가 김정은을 지지한다는 의사표시로 인식됐다. 2004년 고용희가 병사했을 때 김정은은 23세가 됐다. 김정남은 이미 자신을 컴퓨터게임과 주색(酒色)에 빠진 플레이보이로 위장하고 있었다. 도쿄(東京)신문 서울특파원과 베이징특파원을 지낸 고미 요지(五味洋治)가 김정남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바탕으로 쓴 ‘아버지 김정일과 나 : 김정남의 고백’이라는 책에 따르면 김정남은 겉으로는 주색에 빠진 인간으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독서도 많이 하고, 주변 상황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의 사망은 북한 내 개혁개방파들에 대한 사망선고였고, 김정남과 김정남을 지지하는 장성택 그룹에 최후의 날이 됐다. 여기에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거부하는 북한 군부의 동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국 2017년 2월 13일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독살당함으로써 당분간 북한 내에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선호하거나 추진하는 세력은 발붙일 수 없게 됐다.

중국식 개혁개방이란 1976년 9월 원론적인 중앙계획경제주의자 마오쩌둥(毛澤東)이 죽고 1978년 12월 권좌에 오른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공산당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통해 ‘사상해방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외에 선포함으로써 시작된 또 다른 혁명이다. 덩샤오핑이 말한 ‘사상해방’은 “마오쩌둥 사상에서 해방되자”는 말이며, ‘실사구시’란 “마오쩌둥의 유훈에 따른 유훈통치를 거부하고 모든 판단은 현실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한다”는 말이었다. 북한이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다음 아들 김정일이 ‘유훈통치’를 선택한 사실과 사뭇 다른 흐름이었다.

그때로부터 40년, 중국 경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사회주의 상품경제 단계를 거쳐 사회주의 시장경제 단계에 도달해 있다. 물론 여기에는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던진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전유물이 아니며,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할 수 있다”는 말과 ‘선부론(先富論·누구든 먼저 부자가 되면 여러 사람이 먹고살 수 있다)’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현재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이미 헌법에서 지워버렸으며, 생산수단의 공유화란 구절도 삭제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부자가 된 사람도 중국공산당 가입이 전면적으로 허용되는 변화를 이루어왔다.

중국식 개혁개방을 선호하던 김정남의 사망으로 이제 북한은 스탈린주의자 김정은과 개혁개방을 거부하는 군부가 끌고 가는 세상이 됐다. 이제 겨우 22세인 김한솔이 백두혈통의 장손이기는 하지만 김한솔 역시 언제 김정은의 공작에 희생될 지 모르는 처지다. 말 그대로 북한은 퇴색한 스탈린주의자 김정은이 아무런 출구 없는 통치를 하는 국면을 맞게 됐다. 김한솔이 제2의 김정남이 되어 북한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김정은 정권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플랜의 카드가 될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쯤일까.

박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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