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서울 시민들. 광복 직후 연합군이 진주한다는 소문만으로 서울역 앞은 이처럼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다. ⓒphoto 조선일보
광복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서울 시민들. 광복 직후 연합군이 진주한다는 소문만으로 서울역 앞은 이처럼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다. ⓒphoto 조선일보

1946년 3월 1일은 광복 이후 처음 맞는 3·1절이었다. 당시 국내 정세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 결정으로 좌익들은 찬탁 대열에, 우익 진영은 반탁 진영으로 세가 갈려 분위기가 살벌했다. 이날 우익단체는 종로 보신각 앞 광장에서, 좌익단체들은 남산공원 광장과 파고다공원에서 별도의 기념식을 개최할 정도로 좌우 대립이 심각했다.

그로부터 71년이 흐른 2017년 3월 1일,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찬탄(탄핵 찬성)-반탄(탄핵 반대)으로 갈린 시위대가 차벽을 사이에 두고 대립했다. 3·1절 행사를 ‘태극기 세력’과 ‘촛불 세력’이 제각각 별도로 진행하는 모습은 해방정국의 좌우 대결 시대와 완벽하게 닮은꼴을 연출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나라는 하나지만 이념 전선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국민들은 탄핵 찬성과 탄핵 반대로 갈려 한쪽에선 ‘촛불 혁명’을, 다른 쪽에선 ‘아스팔트를 피로 물들이겠다’고 외친다.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조만간 시가전(市街戰)이라도 치를 기세다. 이 두 세력에 속한 사람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면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의견의 합치를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큰 간격이 생겨버렸다.

촛불집회를 이끌고 있는 주동세력은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이다. 이 단체는 전신이 민중총궐기투쟁본부였다. 민주노총, 전교조, 전국농민총연맹, 한국진보연대, 과거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범민련 등 53개 단체들이 총집결해 있다. 해방정국에서 찬탁을 주장했고,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상관없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세력들과 이념적 노선이 비슷하다.

지난해 12월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한쪽에서 한 단체가 이석기 전 의원 구명을 위한 서명을 요구하고 있다.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지난해 12월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한쪽에서 한 단체가 이석기 전 의원 구명을 위한 서명을 요구하고 있다.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체제변혁을 주장하는 사람들

이들 중 다수 세력들은 북한의 핵실험, 미사일 도발에는 침묵하면서 사드 배치를 극렬 반대한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북한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개성공단 재가동을 요구한다. 북한식 사관으로 도배질된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를 계속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쳐보고자 추진된 국정교과서 폐기 및 반대운동을 벌인다. 심지어 태극기를 아무데서나 사용하지 못하도록 ‘대한민국 국기법’ 개정을 추진하려 든다.

그들은 태극기 대신 촛불을 들고,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국가정보원 해체 혹은 약화, 선의의 경쟁을 통한 자유시장경제보다는 공짜 급식, 공짜 의료보험, 반값 등록금, 사회적 시장경제, 그리고 대한민국 주도의 자유민주 통일을 거부하고 남북연방제 통일을 추구한다. 해방공간에서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외쳤던 사람들의 주장과 거의 닮은꼴이다. 이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사회주의 내지는 사회민주주의, 혹은 공산 전체주의로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입장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 맞서는 탄핵 반대 세력의 중심은 탄기국(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이다. 이들은 해방정국에서 반탁을 주장하고, “냉전이라는 국제정세의 흐름으로 볼 때 현 상태에서 남북 통일정부 수립은 어려우니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자유민주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고 나라를 건국해야 한다”고 외친 세력과 이념노선이 비슷하다.

이들은 대한민국 수호, 한·미동맹 강화, 특검 타도, 국회 해산 등을 외친다. 정치권에서 탄핵 반대를 앞장서서 외치는 세력은 보이지 않는다. 주력은 예비역 군인, 양식 있는 직장인·교사·학자들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뤄낸 은퇴 세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한민국 수호 세력’으로 정의하고 태극기를 앞세워 시위를 한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인민재판식 사기극이며, 한·미동맹 강화, 한·일 관계 정상 복원, 헌정질서에 의한 정상적인 대통령 선거, 사드 즉각 배치를 외친다.

그들은 북한을 찬양하고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시궁창으로 만든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를 즉각 폐기하고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긍정적으로 서술한 국정교과서 즉각 채택을 주장한다. 태극기와 애국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국가보안법을 강화하고 국가정보원 정상화 및 기능 강화, 선의의 경쟁을 통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 즉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정의의 원칙을 존중한다.

그들은 공짜 급식, 공짜 의료보험, 반값 등록금, 사회적 시장경제는 결코 공짜가 아니라 노력하는 사람에게 기생하는 사회적 낙오자만을 양산하여 결과적으로 성장동력을 상실케 하는 망국병이라고 믿는다. 대한민국 주도의 자유민주 통일만이 한민족의 살길이라고 믿는다. 해방공간에서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계승하고 있다.

태극기 세력은 통일된 한반도의 국호는 ‘고려연방공화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어야 하며 통일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 국가(國歌)는 애국가여야 한다고 믿는다. 통일 대한민국은 국민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고, 지도자는 임기 동안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민주국가여야 한다. 왕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고 노동자·농민의 독재가 행해지는 대중 독재국가도 아니어야 한다.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개인의 노력 여부에 따라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자본주의 국가여야 한다. 이것이 태극기 세력이 간절히 바라는 통일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태극기 세력은 대통령 탄핵은 대한민국에 대한 탄핵, 즉 대한민국의 소멸(消滅)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따라서 검찰·경찰 등 관군(官軍)이 패퇴한 위급 상황에서 의병들이 궐기하듯 손에 태극기를 들고, 몸에는 태극기를 두르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고 주장한다.

해방정국에서 남한 좌익 진영을 대표했던 두 사람. 1946년 2월 중순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될 때 밀담을 나누는 여운형(오른쪽)과 박헌영. ⓒphoto 조선일보
해방정국에서 남한 좌익 진영을 대표했던 두 사람. 1946년 2월 중순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될 때 밀담을 나누는 여운형(오른쪽)과 박헌영. ⓒphoto 조선일보

1940년대 78%가 사회주의·공산주의 선호

지난 2월 15일 MBN이 보도한 ‘긴급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2.5%는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인용해야 한다고(즉 대통령을 파면시켜 쫓아내야 한다고) 답했다. 2월 10일 여론조사업체 한국갤럽이 발표한 조사 결과에서는 탄핵을 찬성한다고 대답한 응답자가 79%였다.

1946년 7월 미 군정은 대규모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 여론조사 내용 중 흥미를 끄는 것은 ‘어떤 체제를 선호하는가’였다. 이 질문에 남한 주민들은 사회주의 71%,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 모르겠다 8%로 답했다.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78%. 이는 탄핵 찬성 응답자 79%와 거의 일치한다.

탄핵 찬성 세력들 중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실정(失政)에 분노하여 즉각 하야 및 구속, 조기 대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광화문 촛불시위 현장에는 ‘박근혜 정치탄압 희생양 양심수 이석기를 석방하라’ ‘통진당을 복원하라’ ‘사회주의가 답이다’ ‘사드(THAAD) 배치를 철회하라’는 구호와 피켓이 행사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체제가 폭력, 자본주의 OUT’ ‘꼬리 자르지 마라. 문제는 자본주의다’ ‘정권교체가 아닌 체제 교체’ ‘중고생이 앞장서서 혁명정권 세워내자’ ‘재벌총수 구속 사내유보금 몰수’ ‘재벌해체’ 등등 체제 변혁을 요구하는 구호·피켓·유인물이 난무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이런 사실들을 이 나라의 언론들이 보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불가사의할 뿐이다. 거의 모든 언론들이 이번 탄핵 정국에서 ‘대통령 탄핵’ 쪽에 줄을 섰다는 증거다.

한국 사회의 좌회전 현상은 이제 일상이 되다시피 했다. 너도나도 무상복지·무한돌봄·공짜·면제 등등의 용어에 익숙해졌다. 빚을 내서 군인·공무원 연금 보전하고, 무상보육에 무상급식, 반값 등록금이 등장하더니 일부 지자체에서는 젊은이들에게 현금을 나눠주는 정책들을 내놓고 자랑하며 시행하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재명 성남시장은 “국가 예산 400조원의 7%인 28조원으로 29세 이하와 65세 이상 국민, 농어민과 장애인 2800만명에게 1인당 기본소득 100만원, 국토보유세로 조성한 15조원으로 전 국민에게 ‘토지배당’ 30만원을 모두 지역 상품권으로 지급할 예정”이라고 선언했다.

1987년 민주화 성공과 함께 좌파·좌경·좌익·종북 전성시대가 개막됐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좌파 정부 15년, 이념적 무뇌아나 다름없는 이명박 정부 5년을 합쳐 20년 동안 좌파 세력은 정권적 차원에서 지원을 받아가며 정치계·문화계·언론계·종교계·학계·예술계 등 사회 각 분야의 진지(陣地)들을 하나씩 점령했다. 그 결과 오늘과 같은 좌익 대세의 세상이 만들어졌다. 우파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적화는 이미 끝났고, 이제 통일만 남았을 뿐”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지난 3월 1일 오후 서울 광화문 태평로에서 열린 태극기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탄핵 각하를 외치고 있다.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지난 3월 1일 오후 서울 광화문 태평로에서 열린 태극기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탄핵 각하를 외치고 있다.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남한사회가 붉게 물든 이유

광복 직후의 남한 사회도 현재와 비슷하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광복 직후 남한 사회가 좌회전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좌익인 여운형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여운형은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정무총감과의 회담에서 수감 중인 사상범의 즉시 석방을 요구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 16일 오전 9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감옥에서 사상범 석방이 이루어졌다. 이때 풀려난 사상범의 숫자가 무려 1만여명이다. 이들은 일제 시절 공산주의 혁명운동에 앞장섰던 ‘골수 빨갱이’들이었다. 이런 세력들이 대거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에 흡수되었고, 이들은 해방정국에서 행동대가 되었다. 그 결과 남한 사회는 순식간에 좌익으로 넘어갔다.

여운형은 또 총독부로부터 언론사를 장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 결과 매일신보를 접수했으며, 경성방송국을 통해 자신이 속한 건국준비위원회를 전국에 알리기 시작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점령군은 새 지폐를 발행하면서 북한에서 통용되던 화폐를 회수한 것과, 개성을 점령했을 때 그곳 은행에서 강탈한 막대한 현금을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내려보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 돈으로 신문사와 영화관을 집중적으로 사들였고, 수많은 포스터와 전단을 거리에 살포했다.

이번 탄핵정국에서도 대한민국 언론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언론노조가 핵심을 장악하고는 거의 모든 언론이 한목소리로 대통령에게 불리한 정보는 극대화하고, 촛불시위대에 불리한 정보는 고의로 은폐·축소했다. 촛불시위 주제가로 불린 ‘이게 나라냐’가 김일성 찬양가를 만든 사람의 작품이란 사실 따위는 절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양식 있는 원로 언론인들은 “보수언론으로 알려진 매체마저 좌파와 손잡고 마녀사냥식, 인민재판식 보도, 오보와 왜곡을 넘어 창작행위나 다름없는 날조 보도를 일삼았다”고 질타했다. 어느 누군가에 의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지 않는 한 이처럼 일사불란한 보도행위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또 한 가지 의미 있게 봐야 할 점은 해방공간에서나 탄핵 정국의 전개 과정에서 자행된 선전 선동의 마력이다. “잉크는 독가스요, 펜은 기관총”이라고 외친 레닌은 선동에 대해 “대중을 흥분시키는 특정한 문제의 설명과 이용”이라고 정의했다.

선전 선동에 능한 좌익·공산주의자들은 하나의 문제에 대하여 전혀 상반된 두 가지 주장을 내놓는다. 하나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과는 전혀 관계없이 내거는 선전용 주장으로 이중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번 탄핵 정국에서도 이런 선전 선동 수법이 유감없이 자행됐다. 겉으로는 “박근혜 탄핵·하야”를 외치면서 진짜 속내는 “자본주의 아웃, 사회주의가 정답이다”라는 체제 변혁의 드라이브를 건 것이 그 증거다.

해방정국에서 좌익들은 끝없이 ‘통일국가 수립’을 외쳤다. 그런데 그 통일국가의 실체는 사실은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렇다면 몇 달에 걸쳐 이 나라를 난리굿판으로 어지럽혔던 ‘박근혜 탄핵’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저들의 실제 목표는 ‘탄핵·하야’가 아니라 ‘체제교체’가 아니었을까. 이제 냉정하고 이성적인 시각으로 탄핵의 전말을 복기해 볼 때가 왔다.

김용삼 ‘대구 10월 폭동, 제주 4·3사건, 여·순 반란사건’의 저자·전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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