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
[2448호] 201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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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차이나 워치] 중국인들의 집단행동은 어떻게 끝났나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 2008년 중국의 한 프랑스계 카르푸 매장 앞 항의 시위.
1800년대 초반 청(淸)은 세계 최고 부자나라였다. 미국 경제학자들의 추산으로 당시 청은 전 세계 GDP의 30%가 넘는 부(富)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청이 1840년 홍콩 앞바다에서 영국 군함과 청 지상군 사이의 포격전으로 시작된 아편전쟁에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패배했다. 화약이란 원래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하나였지만 영국의 대포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청군이 해안에서 쏴대는 대포는 영국 군함 근처에도 가닿지 못했다. 결국 1842년에 청은 영국과 ‘난징(南京)조약’을 맺어 홍콩섬을 떼어주고, 2100만위안(元)을 배상해줬다. 거기에다가 상하이(上海)와 광저우(廣州)를 비롯한 5대 항구를 무역항으로 개방하는 굴욕을 경험해야 했다.
   
   1894년 7월 25일 인천 앞바다 풍도에서 시작된 청일(淸日)전쟁도 웨이하이(威海)에 있는 해군기지를 기습당한 청 해군의 궤멸로 일본이 승리하는 깜짝 놀랄 결과가 빚어졌다. 전쟁은 1년도 채 안 된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청을 대표한 이홍장(李鴻章)과 일본을 대표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끝을 맺었다.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는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그동안 조선이 해오던 조공은 시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제2조는 ‘요동(遼東)반도 일부와 대만(臺灣), 그리고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는 것이었다. 요즘 한창 중국과 일본 사이에 해양영토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는 이때 일본의 소유로 넘어갔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北京) 시내 대학생들에게 ‘그동안 독일이 점유하고 있던 산둥(山東)성 일원에 대한 이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파리강화회의 소식이 전해졌다. 대학생 3000여명은 천안문으로 달려갔고, 외세에 항거하는 이 집단시위는 ‘5·4운동’으로 이름 붙여졌다. 지금도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해마다 5월 초에 5·4운동 기념 토론대회를 열고 있다. 이보다 앞서 1899년 산둥지방에서 처음 조직된 의화단(義和團)운동은 중국의 권법(拳法)으로 외세를 물리치자는 운동이었는데, 영국·프랑스·일본·미국·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서양 8개국 연합군에 간단히 진압됐다. 오히려 수도 베이징이 8개 지역으로 쪼개져 서양 8개국 연합군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 과정에서 베이징 북서쪽에 있던 고급관리들 집단 거주지였던 원명원(圓明園)은 불에 타고 깨어져야 했다. 지금 중국공산당은 그렇게 파괴된 원명원을 “역사를 잊지 않겠다”며 파괴된 채 잘 보존하고 있다.
   
   서양 제국주의에 의해 반(半)식민지가 된 중국은 1911년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수립했으나, 곧바로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공산당과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간의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내전은 1949년 장제스가 대만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종결됐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100년이 넘는 외세의 중국 점령이 공식적으로 종결된 시점이 이때였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양제국주의의 식민지 상태를 끝내기까지 중국 지도층은 이렇다 할 저항을 보여주지 못했다. 중국 민중들이 외세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이 그나마 저항수단이었다.
   
   1989년 4월, 베이징 시내 천안문광장에는 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사망한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를 추모한다는 것이 구실이었다. 실제로는 민주화와 반(反)부패가 구호로 외쳐졌다. 광장에는 6월 3일 밤까지 연일 100만이 넘는 대학생과 시민들이 꽉 들어차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반부패와 민주화를 외치던 시위 군중들은 6월 3일 밤부터 시작된 중국 인민해방군의 ‘광장 청소작업’ 결과 해산됐다. 6월 4일 새벽 광장에는 인민해방군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1999년 5월 8일 옛 유고연방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에 미군 전투기가 미사일을 발사해서 중국 기자 3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미군은 ‘오폭(誤爆)’이라고 주장했으나, 중국 정부는 ‘의도적 공격’이라고 규정했다. 이때도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 주변을 수많은 시민, 대학생들이 에워싸고 시위를 벌였다.
   
   2001년 4월 1일에는 중국 남부 하이난다오(海南島) 상공에 미군 정찰기 한 대가 tt나타났다. 중국의 공군 전투기 2대가 사상 처음으로 중국 영공 부근으로 날아온 미 정찰기를 근접 견제하다가 한 대는 추락해서 조종사가 사망하고 미 정찰기는 기체 손상을 입어 하이난다오에 불시착할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에 있는 미 대사관 주변에는 수많은 시민, 대학생들이 몰려들어 반미(反美) 구호를 외쳤다. 이 시위는 그러나 당시 장쩌민(江澤民) 총서기가 “아직은 미국과 싸울 때가 아니다.… 실력을 기르자”는 간곡한 설득으로 중단됐다. 여기에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이 중국을 향해 공개사과를 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2008년 8월은 베이징올림픽이 예정돼 있었다. 그해 3월에 티베트에서 소수민족 차별에 항의하는 대규모 폭력시위가 발생하자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티베트 분리독립을 지원하는 사르코지의 그런 행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분노는 엉뚱하게도 중국에 진출한 프랑스 유통업체인 카르푸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나타났다. 카르푸는 “우리 직원 대부분이 중국인”이라는 점과 “불매운동을 계속하면 중국인 종업원들이 직장을 잃는다”는 논리로 맞섰다. 프랑스 정부는 중국통인 장피에르 라파랭 전 총리를 특사로 보내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주석에게 ‘화해’를 요청함으로써 카르푸 사태는 겨우 진정됐다.
   
   사드의 한국 배치를 빌미로 한 중국인들의 롯데마트에 대한 불매운동과 규정 트집 잡기는 2012년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해양 영토분쟁 때 중국인들이 ‘자동차 등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벌인 이후 최대 집단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롯데가 할 수 있는 일은 중국 내 ‘롯데마트 유한공사’가 얼마나 많은 중국인을 고용하고 있는지, 어떤 중국 제품을 매장에 올려놓고 있는지를 홍보하면서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카르푸에 대한 중국인들의 공격은 결국 중국 관영TV가 “카르푸가 달라이 라마를 지원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한 이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어차피 배치된 사드에 대한 더 이상의 항의는 실익이 없다는 사실을 중국 지도부가 깨달을 날이 머지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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