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8일 대구 서문시장에 홍준표 경남지사의 대선 출마선언을 보려는 시민들이 몰려 있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3월 18일 대구 서문시장에 홍준표 경남지사의 대선 출마선언을 보려는 시민들이 몰려 있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이제 찍을 사람은 홍준표밖에 없지.”

‘보수의 성지’로 불리는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시장은 총 8개 지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2지구 상가 3·4층에는 원단을 파는 점포들이 밀집해 있다. 이 점포 주인들은 서문시장의 ‘터줏대감’들로 수십 년간 원단을 팔아온 상인들이다. 지난 3월 18일 낮 12시쯤 찾은 이곳에서는 짧게는 20년에서 길게는 50년 이상 원단장사를 해온 여성 상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홍준표가 대세지.” “문재인 되면 나라 북한에 넘어간다.” “우리야 곧 죽어도 상관없지만. 후손들 살아야 하니까.”

이야기를 나누는 상인 두 명에게 다가가 이날 서문시장에서 공식 출마선언을 한 홍준표 경남지사에 대한 의견을 묻자 저마다 한마디씩을 던졌다.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상가는 한산했다.

홍 지사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시장 곳곳에서 들렸다. 서문시장 주차빌딩 1층에 마련된 의자에 삼삼오오 모인 노인들의 화제는 온통 대선후보 얘기였다. 시장 1지구의 한 상가에서 만난 점포 주인은 자리에 정좌한 채 지방지를 읽고 있었다. 금테안경을 쓴 그의 이마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서문시장에서만 50년간 명주, 삼베, 안동포 등을 팔아왔다는 그 역시 홍 지사에 대해 호감을 표했다. “괜찮게 생각합니다. 사람 결단력도 있고 실천도 하는 거 같고. 여기선 홍을 지지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역대 대선에서 대구는 보수 주자에게 70% 안팎의 지지를 보냈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15·16대 대선에서 모두 70%가 넘는 지지를 받았고,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17대 대선에서 69.4%의 지지를 받았다. 인구 250만의 대구는 투표율도 높은 도시다. 18대 대선에서 대구의 투표율은 80%에 육박했다. 80.4%를 기록한 광주광역시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당시 투표한 대구시민 중 80%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찍었다.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80-80 기록’이다.

이날 자유한국당 소속인 홍 지사가 서문시장을 출마선언 장소로 택한 데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일단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의 영남중·고교를 나왔다. 누가 보더라도 서문시장에서 출마선언을 하는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로 구심점을 잃은 대구·경북 보수층의 표심을 잡겠다는 전략으로 읽힌다. 특히 영남권 최대 전통시장인 서문시장은 대구 서민층을 대표한다. 홍 지사는 2월 21일 주간조선 인터뷰에서 대권 출마 의사를 밝히며 “우파의 희망이 되고 싶다” “서민 대통령이 꿈”이라고 말했었다. 서민대통령을 표방하고 나선 홍 지사로선 서민들의 대표적 생계 터전인 서문시장의 표심을 잡는 것이 급선무일 수밖에 없다. 서문시장을 잡아야 대구·경북의 표심을, 나아가 보수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을 수 있다는 의미다.

보수의 성지

서문시장의 옛 이름은 대구장이다. 조선시대부터 전국 3대 장터 중 한 곳으로 꼽혔다.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 공설시장으로 허가를 받으면서다. 대구읍성 서문의 장터라고 해서 ‘서문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서문시장에는 현재 약 5000개의 점포가 있다. 2만명이 넘는 상인들이 이 시장에서 생계를 꾸린다.

서문시장은 ‘보수의 성지’라는 별명답게 역대 유력 보수 대선주자 모두 이곳에서의 유세를 중시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2007년 서문시장 ‘칼제비 골목’을 찾아 칼제비와 오이고추를 먹었고,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도 다시 서문시장을 찾아 또 칼제비를 먹었다. 칼제비는 칼국수와 수제비를 합한 이곳의 명물 음식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하고 나서도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정치적 고향인 이곳을 찾았다. 두 보수 대선후보가 친서민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서문시장이 큰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서문시장은 이번 2017 대선전에서도 보수 주자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지난 3월 16일에는 대표적인 친박 인사로 자유한국당 경선에 나선 김진태 의원이 홍 지사를 향해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에서 출정식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날을 세웠다. 이에 홍 지사는 “서문시장이 박근혜 시장이냐”며 “내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서문시장에서 놀았다”고 반박했다. 자유한국당 후보 경선에 나선 김관용 경북지사는 두 후보의 각축을 두고 “서민과 상인의 아픔이 담겨 있는 서문시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중단하라”면서도 “어머니는 서문시장에서 팥죽을 끓여 팔고 나는 시장통 알바(아르바이트)로 먹고 자랐다”고 말했다. 서로 자기가 더 서문시장과 가깝다며 다투는 형국이다.

이날 홍준표 지사의 대선 출마선언은 오후 3시쯤 시작됐다. 홍 지사는 30분에 걸쳐 지지자들에게 자신과 대구 서문시장의 인연을 자세히 설명했다. 초등학교 때 전학을 다섯 번이나 다녔고, 이후 대구 영남중·고교를 다닐 때도 서문시장이 주 놀이터였다고 강조했다. 그가 “비산동 월셋방에 살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며 학창 시절을 회고하자 “맞다, 비산동이 방값이 싸다”며 공감을 표하는 지지자들도 여럿 보였다.

이날 홍 지사의 출마선언을 보기 위해 몰린 사람들은 족히 수천 명은 되어 보였다. 시장 안에 자리 잡은 119안전센터를 중심으로 칼제비 골목의 양방향 2차선 차로와 양쪽 인도가 군중으로 꽉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마이크를 든 사회자는 “여기 2만명의 대구·경북 시민들이 모여 있다”고 말했다. 상가 2층과 지상을 잇는 계단에도 구경꾼들이 꽉 들어찼다. 곳곳에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태극기를 든 사람들도 곳곳에 보였다.

동산상가 3층 창문에서 흰색 종이봉투에 든 국화빵을 먹으며 지지자들을 바라보던 한 60대 남성은 이렇게 말했다. “(홍 지사가) 원체 빈곤하게 살았잖아. 무죄 나고 나서는 지지 많이 하죠. 도정도 흑자로 만들고 급식 문제도 그렇고. 결단력 있고 실천도 하는 것 같고 해서 지지합니다.” 대구 시민인 그는 이날 부인과 함께 시장을 찾았다고 했다.

홍 지사가 서문시장에서 출마선언을 하기 약 4시간 전, 서문시장 주차빌딩 1층 상가연합회 사무실에서 김영오 서문시장 상가연합회 회장을 만났다. 김 회장은 전국상인연합회 회장도 겸직하고 있다. 홍 지사에 대한 상인들의 여론을 묻자 그는 “(홍 지사는) 기본적으로 경상도가 좋아하는 시원한 성격”이라며 “평이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인들이 이럴 때만 시장에 오지 말고 평소에도 와서 전통시장에 관심 좀 기울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과거 ‘묻지마 몰표’와는 다른 분위기

서문시장 상인들이 새로운 보수 후보로 떠오른 홍 지사에 대해 곳곳에서 기대감을 표했지만 과거와 같은 ‘묻지마 몰표’ 분위기와는 거리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기대감을 표하는 상인들과 달리 “더 지켜보겠다”는 유보적인 반응도 꽤 있었다. 40대로 보이는 한 상인은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홍 지사가) 요새 좀 뜨는 거 같은데, 본선 후보 정해지면 좀 볼까, 지금은 판단 유보입니더.”

서문시장 상인들은 기본적으로 ‘정치보다 먹고사는 게 더 급하다’는 태도였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서 가장 혼잡한 119센터 앞을 가로막고 출마선언 준비를 하는 홍 지사 측에 대해 상인들은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홍준표인가 누구 온다 안 카나. 차 밀린다고 빨리 온나 캤더니(오라고 했더니).” 20년간 칼제비를 팔아온 60대 여성 상인이 늦게 출근한 옆자리 상인을 타박했다. 두 사람은 곧 짜증 섞인 반응을 주고받았다. “누구 온다고?” “홍준표.” “오늘 장사 다했다. 저번에 (경북)도지사 왔을 때도 장사 하나도 안 되더라.” 주위 상인들의 툴툴거림도 이어졌다. “그냥 무대에서 하면 되지 머하러 저런 거 설치하노.” “아는 게 한 개도 없어서 그래.”

특히 30~40대 상인들의 말에는 가시가 더 돋아 있었다. 서문시장은 오래된 시장인 만큼, 대를 이어 점포를 운영하는 상인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30~40대 젊은 상인들은 부모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아 장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기 있으면 우리 상인들도 다 거기(출마선언 장소) 몰려갔지. 그냥 장사하지 않습니까.” 서문시장 1지구에서 한복 매장을 운영하는 한 40대 남성은 홍 지사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짧게 답했다. 이마에 주름이 진 그는 시종일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물려준 점포를 다시 물려받아 3대째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홍 지사 출마선언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말에도 “대부분 외부 사람들”이라고 받아쳤다.

그의 말처럼 이날 출마선언 현장에는 상인들보다 외부인이 더 많아 보였다. 출마선언 3시간 전, 서문시장 동1문 앞의 큰길에는 45인승 대형 관광버스 여러 대가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다. 지지자로 보이는 이들은 태극기를 둘둘 말아 아스팔트 바닥에 놓고 국수와 순대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서문시장 민심이 과거의 ‘묻지마 표심’과 조금 다르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더불어 민주당 주자를 지지한다고 거침없이 밝히는 상인들의 목소리도 들린다는 점이다. 서문시장 2지구 3층에서 대대로 원단을 판매하는 40대 상인은 “서문시장 민심을 알아보러 왔다”는 말에 “대구도 변하고 있다”고 했다. “연세 있는 분들이랑 달라요. 저는 안희정 충남지사를 지지합니다.”

그는 “서문시장 상인들의 정치적 견해가 예전과 다르다”고 말했다. 그 역시 지난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던졌지만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를 지켜보며 보수 주자에게서 마음을 돌렸다고 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해서도 “찬성한다”며 “잘못한 것은 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인들 중 ‘안희정 지지’ 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강조한 가장 중요한 지지 이유는 사드(THAAD) 배치에 대한 안 지사의 태도였다. 안 지사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와 달리 사드 배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피력해왔다. 대구·경북의 표심이 과거와 다르다는 점은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증명된다. 한국갤럽이 지난 2월 24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구·경북의 민주당 3강(문재인·안희정·이재명) 주자 지지율의 합은 60%가 넘는다.

“너는 와라. 우리는 장사한다”

왜 서문시장 상인들은 ‘묻지마 표심’을 거둬들이고 있을까. 대구가 만성적인 경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주요 이유로 보인다. 실제로 지난 1월 동북지방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대구·경북의 주요 경제지표에 따르면, 대구시의 2015년 1인당 지역내총생산은 1992만원으로 전국 시·도 중 꼴찌를 기록했다. 대구는 24년째 지역내총생산 지표에서 전국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두 차례의 대선에서 몰표로 밀어줬는데도 불구하고 정권 출범 후 이렇다 할 실질 혜택이 없었다는 자각이 민심의 저변에 깔리기 시작했다는 말이 대구 지식층 사이에서 나돈다. 지난해 총선에서 민주당 김부겸 후보가 수성갑에서 당선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도 이런 변화된 저변의 민심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게다가 지난해 11월 30일 서문시장에 큰 불이 났다. 이 불로 4지구 679개 점포가 전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상가연합회가 추산한 피해 금액은 약 1000억원에 달한다. 연말 특수를 앞두고 평소보다 2~3배 많은 상품을 확보한 상태라 피해가 컸다.

불이 난 지 네 달이 지났지만 서문시장은 아직 복구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4지구는 이전한 상가들의 연락처를 적어둔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붙은 가림막으로 뒤덮여 있었다. ‘건물 붕괴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현수막도 붙어 있었다. 화재로 피해를 입은 4지구 상가들은 현재 시장 내 다른 지구로 점포를 옮긴 상태다. 자리를 구하지 못한 점포들은 시장 외부에 있는 대체상가로 이전했다. 상가연합회에 따르면 대체상가는 3월 중 개장할 예정이었으나 계약이 늦어지면서 7월로 개장이 미뤄졌다.

서문시장에서 홍준표 지사의 인지도는 아직까지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았다. 사실 홍 지사는 대구와 정치적 연고는 없다. 그는 서울 송파구와 동대문구에서 4선 의원을 지냈다. 대구·경북에서는 출마한 적이 없다. 경남지사 연임에 성공했지만 심지어 ‘홍준표’라는 이름을 잘 모르는 상인도 있었다.

대구를 기반으로 하는 대선주자 중에는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도 있다.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유 의원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대구 동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78%의 유권자가 그에게 표를 던졌다. 하지만 이날 만난 서문시장 상인들은 유 의원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드러냈다. 대부분은 그를 대선후보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유승민은 간신이야. 유승민 뽑느니 안희정 뽑는다. 아니면 안철수 뽑는다.” 한 한복 상점에서 유 의원에 대한 의견을 묻자 옆 상점 주인이 대신 불쑥 끼어들었다. 그들이 가장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데 가장 큰 요인을 제공한 사람이 유 의원이라는 것이 반감의 이유였다. 이날 서문시장을 다니면서 바른정당을 지지한다는 상인은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이날 서문시장에서 바라본 하늘은 하루 종일 흐렸다. ‘보수 성지’ 서문시장의 표심에도 아직 먹구름이 끼어 있어 투명하지가 않았다.

배용진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