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유럽연합(EU) 본부 앞에는 ‘유럽 통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베르 슈망(1886~1963) 전 프랑스 외무장관의 기념비가 있다. 슈망은 1950년 유럽을 결속하자는 취지에서 초국가적 기구를 통해 석탄과 철강 산업을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독일·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네덜란드·룩셈부르크 6개국은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발족했다. 이후 이들 6개국은 1957년 3월 25일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 모여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를 창설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로마조약은 EEC라는 단일공동시장을 1969년 말까지 완성할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노동과 자본 이동의 자유, 농업·운수·통상·금융·사회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공동정책의 수립, 유럽투자은행의 설립 등을 추진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후 EEC는 유럽공동체(EC)가 됐으며, 1991년 12월 마스트리흐트조약에 따라 1993년 11월 현재의 EU가 공식 출범했다.

올해는 유럽 통합의 기틀이 된 로마조약이 체결된 지 60주년이다. EU 회원국 정상들은 3월 25일 로마에서 60주년 기념 특별정상회의를 갖고 앞으로 유럽 통합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EU 회원국 정상들은 로마조약 60주년 선언문을 통해 “회원국은 EU를 더욱 강인하고 탄력 있게 만들고자 결의한다”면서 “회원국들은 더 큰 단합과 연대를 보여줘야만 하며, 단결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강조했다. 이번 로마조약 60주년 기념 특별정상회의에는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초대받지 못했다. 물론 60년 전에도 영국은 그 자리에 없었다. 영국은 지난해 6월 국민투표를 통해 EU 탈퇴(브렉시트·Brexit)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메이 총리는 리스본조약 50조에 따라 EU에 탈퇴 의사를 공식 통보하고 앞으로 2년간 영국과 EU 27개국 간 제반 관계를 정하는 ‘이혼 협상’을 벌인다.

60년 전의 영국과 지금의 영국

영국 정부와 EU 27개 회원국을 대표하는 EU 집행위원회는 영국에 거주하는 300만여명의 EU 시민권자와 EU에 거주하는 120만명의 영국 시민권자의 거주 권리 보장, 새로운 영국·EU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놓고 치열한 밀고 당기기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양측은 또 이른바 ‘이혼 합의금’을 놓고도 줄다리기를 팽팽하게 벌일 것이 분명하다. EU는 2014~2020년 예산계획 확정 당시 영국이 약속한 분담금을 포함해 600억유로(73조원)를 내놓을 것을 영국에 요구할 것이다. 반면 영국은 EU에 엄청난 돈을 내려고 브렉시트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면서 EU의 요구를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양측은 FTA 협상에서 순순히 양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영국은 EU 단일시장에 최대한의 접근권을 보장받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는 영국이 EU의 의무에서 풀려나 혜택만 누리는 ‘과실 따먹기(cherry picking)’는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양국은 영국이 EU 시민의 이동 자유 권리를 보장하지 않기로 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양측은 사사건건 경제적 이득을 따져가면서 협상할 것이 분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영국이 EU를 탈퇴하는 상황은 60년 전과 매우 흡사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는 독일이 다시는 전쟁할 수 없는 방안을 모색했었다. 당시 슈망 외무장관은 독일이 전쟁무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석탄과 철강을 공동 관리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슈망의 계획에 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가 동참했다. 이에 따라 결성된 기구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였다. 이후 이들 6개국은 로마조약을 통해 EEC를 만들었다. 그런데 영국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영국은 국가의 주권을 개별국가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기구가 갖는 것을 마뜩잖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결국 EEC의 합류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EC는 말 그대로 잘나갔다. 자유무역과 무관세, 인력과 서비스 및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EEC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국은 1963년과 1967년 EEC에 가입을 신청했지만 샤를 드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거부권을 두 차례나 행사하는 바람에 1973년에야 겨우 회원국이 될 수 있었다. 드골은 영국의 가입에 반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영국은 섬나라다. 영국의 돈과 시장, 공급 라인은 유럽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더 다양하고 종종 저 멀리 떨어진 나라들과 연결되어 있다. 영국은 매우 뚜렷하며 독창적인 습관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영국은 44년 만에 EU를 탈퇴함으로써 드골의 당시 지적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환갑잔치에 참석한 27개 회원국 정상들은 영국의 빈자리를 바라보면서 드골의 말을 되새길 수밖에 없는 셈이 됐다.

벨기에 브뤼셀 EU 본부 건물에 걸린 로마조약 60주년 기념 현수막. ⓒphoto EU집행위 사이트
벨기에 브뤼셀 EU 본부 건물에 걸린 로마조약 60주년 기념 현수막. ⓒphoto EU집행위 사이트

EU의 운신 폭 좁히는 트럼프

영국은 과거에도 유럽 대륙과 전면적으로 단절했던 역사가 있다. 헨리 8세(재위 기간 1509~1547) 영국 국왕은 부인이었던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교황과 가톨릭의 권위를 부정하고 종교개혁을 통해 성공회를 창설했다. 이 때문에 영국과 유럽 대륙은 종교적으로 완전히 결별해야 했다.

EU는 앞으로 영국의 탈퇴에 따른 후유증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 다른 회원국들이 영국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게다가 난민 위기와 그리스 경제 위기 등이 재발할 가능성 등으로 EU 전체가 자칫하면 벼랑 끝으로 몰릴 수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EU의 통합 대신 분열을 부추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도 EU가 선택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다. 이런 가운데 EU가 통합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보다 먼저 극우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세력의 확산을 저지하는 것이다. 극우 포퓰리즘 세력은 한 손에는 반세계화(anti-globalization)를, 다른 손에는 반이민(anti-immigration)이라는 무기를 들고 유럽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유럽 극우 포퓰리즘 정당 대표들은 지난 1월 21일 독일 서부 도시 코블렌츠에서 ‘유럽 반정상회의(European counter-summit)’를 갖고 유럽과 유럽인들의 자유를 위해 EU와 세계화라는 구속에서 벗어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이 모임에는 차기 프랑스 대선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마린 르펜 국민전선 대표를 비롯해 네덜란드 자유당의 헤이르트 빌더스 대표, ‘독일을 위한 대안(독일대안당)’의 프라우케 페트리 공동 대표, 이탈리아 북부동맹의 마테오 살비니 대표,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헤럴드 빌림스키 대표 등이 참석했다. 르펜 대표는 “우리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민족국가의 귀환을 목도하고 있다”면서 “영국의 EU 탈퇴가 촉발한 변화의 물결이 미국에 이어 올해 전 유럽에 도미노처럼 번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로마조약 60주년을 앞두고 지난 3월 15일 실시된 네덜란드 총선에서 마르크 뤼테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민주당이 제1당이 되면서 2위를 차지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자유당의 돌풍을 저지했다. 당초 각종 여론조사에선 자유당이 제1당을 차지하면서 집권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왔었다. 네덜란드 국민들은 자유당이 내건 EU 탈퇴 국민투표, 무슬림 이민자와 난민 입국 금지, 이슬람 사원·학교 폐쇄, 이슬람 경전인 코란 금지 등의 공약들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해 자유당 지지를 철회했다. 유럽 주요 정치지도자들은 중도우파나 중도좌파에 상관없이 네덜란드 총선 결과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 이유는 EU의 분열을 막을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의 득세를 막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이 완전히 힘을 잃었다고 볼 수는 없다. 뤼테 총리가 네덜란드 총선이 극우 포퓰리즘에 대한 민심 향배를 보여주는 ‘준준결승전’이라면 프랑스 대선은 ‘준결승전’, 독일 총선은 ‘결승전’이라고 지적했듯이 진짜 승부는 프랑스 대선과 독일 총선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선은 4월 23일 제1차 선거가 치러지며,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5월 7일 결선투표가 실시된다. 독일 총선은 9월로 예정돼 있다.

EU 회원국들은 유럽의 반이민 정서에 불을 붙인 난민의 대량 유입을 막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EU가 최근 독일·오스트리아·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등 5개국이 오는 5월 11일까지 3개월간 국경 통제를 연장하는 것을 승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 5개국은 유럽에서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된 솅겐조약에 가입한 국가들이지만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유입되는 난민과 테러리스트들을 차단하기 위해 국경을 통제해왔다. 솅겐조약은 유럽 통합을 상징한다. 때문에 EU는 솅겐조약을 폐지하기보다는 이에 대한 보완책을 강구하고 있다. 하지만 EU 회원국들 간의 이해가 서로 상충하기 때문에 공통의 대책을 도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프랑스·독일 등 6개국 대표가 1957년 3월 25일 로마조약을 체결하는 모습.
프랑스·독일 등 6개국 대표가 1957년 3월 25일 로마조약을 체결하는 모습.

‘유럽군’ 창설 검토하는 EU

EU의 또 다른 과제는 영국의 탈퇴에 따른 안보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유럽의 안보는 그동안 나토가 중심이었다. 영국이 나토에서 탈퇴하지 않았기 때문에 EU가 안보를 나토에 의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국이 더 이상 EU 회원국이 아닌 만큼 나토와 EU 관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독일과 프랑스는 “나토는 미국이 주도하기 때문에 유럽 각국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따라 EU는 ‘유럽군’ 창설을 검토하고 있다.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이 이에 대한 전 단계로 ‘유럽군 지휘부’ 설립을 제안했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이에 동조했다. EU는 일단 해외에서의 군사활동을 총괄하기 위한 유럽군 지휘부(MPCC) 창설 계획을 승인했다. EU의 이런 움직임에 동유럽 국가들과 발트 3국 등은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선 유럽군보다는 나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EU가 유럽군을 창설하려면 이들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갈 길은 멀다고 볼 수 있다.

EU 회원국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유럽 통합의 방향 설정이다.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지난 3월 1일 오는 2019년 이후 EU의 미래를 담은 청사진으로 5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유럽의 미래에 대한 백서’라는 제목의 청사진 내용을 보면 첫째 단일통화를 강화하는 선에서 현상 유지, 둘째 이민·안보·국방 등을 제외하고 유럽 통합을 단일시장체제로만 국한해 강화하는 방안, 셋째 회원국과 분야별 통합의 수준을 다르게 하는 다층체제(multi-speed) 구축 방안, 넷째 EU 통합을 강화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한 선택과 집중 방안, 다섯째 EU를 더욱 크고 강하게 확대하는 방안 등이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다층체제 구축 방안이다. 이 방안은 60년 전 로마조약에 서명했던 6개국이 유럽 통합의 핵심 역할을 하되 이후 EU에 가입한 국가들은 분야별로 협력하는 체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EU 회원국들이 각국의 형편에 따라 유로화나 국방 등의 영역에서 각각 다른 속도로 협력하고 통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방안에 대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모든 회원국이 같은 단계의 통합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밝혔고, 파올로 젠틸로니 이탈리아 총리도 “우리는 유연한 연합이 필요하다”면서 지지 의사를 표시했다. 동유럽 등 후발 가입국과 기존 서유럽 회원국 간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층체제 구축 방안은 분열을 최소화하면서 EU라는 단일 대오를 유지하는 최적의 방편이 될 수 있다. 반면 영국의 탈퇴 이후 줄어든 EU 예산 속에서 다층체제 구축 방안이 실행될 경우 회원국들이 어느 분야에 어느 정도의 예산을 투입할지를 놓고 대립할 가능성도 있다. 동유럽 회원국들은 서유럽 회원국들이 각종 경제적 지원을 줄일 것이라고 벌써부터 우려하고 있다.

EU 회원국들은 어젠다 수를 줄이는 대신 통합의 강도를 높이는 선택과 집중 방안에도 상당히 지지를 보이고 있다. 선택과 집중 방안은 기술 혁신, 무역, 안보 등은 몇몇 영역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EU에 더 많은 권한을 주되 지역발전, 건강, 고용, 사회정책 등은 회원국들의 자율에 맡기자는 것이다. 융커 위원장은 “EU가 주문을 외워 천지를 창조할 수 있다고 EU 시민들을 설득할 수는 없다”면서 “EU 미래에 대한 논의는 유럽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U 회원국들은 로마조약 60주년 기념 특별정상회의에서 5가지 방안을 논의한 데 이어 유럽의회 선거가 열리는 2019년 6월까지 가장 좋은 방안을 결정할 예정이다. EU 회원국들은 5가지 시나리오 중 몇 가지 방안을 합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아무튼 로마조약 60주년을 맞은 EU가 이제는 통합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릴 수는 없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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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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