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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의 독살에 누구보다 놀랐을 사람이었다. 고미 요지(五味洋治·59) 도쿄신문 편집위원. 김정남과 오랜 기간 연락을 주고받은 세계 유일한 언론인이다. 두 차례 대면 인터뷰에, 150통 이상의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편지 내용을 정리해 2012년 ‘아버지 김정일과 나’를 출간했다.(한국어판 제목은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그와 김정남은 2004년 9월 처음 만났다. 중국 베이징공항에서였다. 북한 외교관을 태운 고려항공 비행기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김정남처럼 보이는 남성이 입국장에 갑자기 나타났다. 고미씨와 함께 대기 중이던 예닐곱 명의 일본 기자들이 설마 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대부분 서울특파원 출신이었던 이들은 모두 한국어에 능했다. “혹시 김정남씨인가요?” 남자는 순순히 맞다고 답했다. 고미씨와 김정남 사이 13년에 걸친 인연의 시작이었다.

취재차 서울을 찾은 고미씨를 지난 3월 24일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정남이 피살되고 40일째를 앞둔 날이었다. 하루종일 김정남 특집을 내보내며 열을 올리던 일본 언론에서 어느 순간 슬그머니 김정남의 이름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고미씨에게 왜 그런지 물었다. 조총련과 일본 언론이 맺은 일종의 ‘계약’ 때문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여러 방송에서 김정남 특집을 제작하고 있었다. 저도 몇 군데와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방영이 전면 취소됐다. 알아 보니 북한 측에서 협상을 제의했다.”

‘계약’의 내용은 이렇다. 북한을 비난하는 방송의 방영을 중단하면 4월 25일에 열릴 북한 창군절에 중계사로 초청하겠다는 것. 방송사에 제안을 전달해 온 건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었다. 창군절(創軍節)은 한국으로 치면 ‘국군의 날’쯤 되는 날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만주에서 항일빨치산 부대를 조직했다며 이날을 인민군이 탄생한 날로 홍보한다. 창군절에는 보통 대대적인 퍼레이드가 열린다.

창군절 중계와 북한 비방방송을 맞바꾸는 계약은 북한과 일본 언론, 양측 모두에 밑질 것이 없는 협상이다. 북한은 북한을 찾은 해외 언론들에 높은 금액의 ‘시설 사용료’를 받아왔다. 고미씨는 “고이즈미 전 총리가 북한을 찾았을 때 동행취재를 했다. 당시 일본 방송사는 송출비용으로만 300만엔을 냈다”고 말했다. 다섯 개 방송사만 쳐도 시설 사용료가 원화로 약 1억5000만원이다. 이번 방북에 일본 언론은 스태프들을 대거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김정남 피살 소식에 충격을 받았나.”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고미씨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큰 충격을 받았다. 제 아내도 김정남씨를 같이 만난 적이 있다. 아내는 뉴스가 나온 후 매일 울었다. 이제 자기 앞에서 김씨 얘기를 꺼내지도 말라면서 말했다. ‘당신이 쓴 책 때문에 죽은 것 아닌가.’ 아내는 책 출간에 반대했다. 아내 외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당신이 쓴 책 때문에 김정남이 죽었다’고 말을 전해왔다.”

- 2012년에 책은 왜 출간했나. “당시는 김정은 정권이 막 들어섰을 때였다. 책을 내 백두혈통의 장자인 김정남의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자고 생각했다. 신생 정권이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게다가 내용의 수위가 높지 않았다. 비밀이랄 게 그다지 없었다. 예전에 이한영이 낸 책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시 김씨는 ‘백 일만 출간을 기다려 달라’고 했다. 백 일 동안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 언제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나. “2012년 1월이 마지막이었다. ‘책을 내면 우리의 관계는 끝이다’라는 게 그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그 말대로 책을 낸 후 연락이 두절됐다. 이메일 계정 자체가 없어졌더라.”

김정남이 2004년 베이징공항에서 김정남과 조우한 일본 기자들 중 유독 고미씨와 연락을 이어간 이유는 뭘까. 고미씨는 “근성을 높게 평가해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정남씨가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2004년 첫 만남 이후 베이징 거리를 헤매며 계속 김정남의 흔적을 좇았다. 거주하는 동네는 물론이고 근처 슈퍼마켓, 미용실, 식당을 탐사 취재했다. 그 과정을 계속 기사로 냈다. 그걸 읽고 연락을 해온 것 같다.”

- 2012년 이후엔 한 번도 못 만났나. “못 만났다. 대신 책을 읽은 독자들이 김정남을 알아보고 행적을 제보하더라. 인도네시아에서 봤다는 사람이 많았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이탈리아 식당에 자주 나타난다는 연락을 받았다. 직접 찾아갔다. 중국 여성과 같이 왔다더라. 싱가포르에서 같이 다닌 여성도 중국인이었다. 키가 크고 영어를 잘하는 여성이라고 했다.”

- 김정남이 두 아들 김한솔과 김금솔 얘기를 자주 했나. “김정남은 김한솔을 예뻐했다. 한솔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자신과 생각이 같다고 좋아했다. 김한솔이 대학을 졸업하고 신변이 안정되면 다시 공개 발언하겠다고 했다. 김금솔은 당시 베이징에 살고 있었다. 캐나다계 국제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김정남은 김금솔 생모와 별로 사이가 안 좋았다.”

김정남의 죽음 후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탈북자들이 그를 망명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사실이 그중 하나다. 영국에서 설립된 탈북자단체 국제탈북민연대의 김주일 사무총장은 김정남에게 망명정부 수립을 세 차례 제안했다고 언론에 말했다. 경호원 서영란이 김정남의 ‘세 번째 여자’라는 추측도 보도됐다. 서영란은 김정남 가족의 2001년 일본 위장입국 당시 동행했던 인물이다. 어디까지 사실일까.

마카오에 거주한 김정남을 오랫동안 알고 지내며 어울린 인물이 있다. 이동섭 마카오 한인회장이다. 지난해 12월에도 김정남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에게 위의 보도가 사실인지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단호한 부인이 돌아왔다.

“김정남 관련 오보가 너무 많이 나왔다. 서영란은 김정남의 애인이 아니다. 집사일 뿐이다. 부인 두 명을 챙기기도 바쁜데 또 다른 애인을 어떻게 두나. 한솔이와 금솔이를 두고도 여러 얘기가 있는데 한솔이 엄마가 정실부인이다. 북한 호적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카오 혼인증명서에는 한솔이 엄마가 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솔이보다 한솔이가 한 해 먼저 태어난 장자다.”

2011년 1월 마카오에서 만난 고미 요지씨(왼쪽)와 김정남.
2011년 1월 마카오에서 만난 고미 요지씨(왼쪽)와 김정남.

망명정부 논란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김정남씨는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실 때도 ‘어떤 드라마가 재밌다’ ‘어디어디에 출장 나간다’ ‘어떤 사업을 하려고 한다’, 이런 얘기만 한 사람이다.”

고미씨의 설명도 일치한다. “김정남씨는 누구에게도 정치적인 발언을 안 했다. ‘요전에 어디어디를 다녀왔다, 뭐가 맛있었다, 어디 갔더니 재밌었다’, 이런 식의 얘기만 했다. 일본 기자들 사이에는 김정남과 아무리 길게 얘기해도 기사가 될 만한 민감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었다.”

TV아사히가 거의 유일한 예다. 피살 사건 후 TV아사히의 기자는 “2010년 11월 김정남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갔더니 김정은을 비판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뜬금없는 정치적 발언은 왜 나왔을까. 당시 김정남은 평양에 다녀온 참이었다. 본인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어떤 식으로든 언론에 토로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고미씨는 추측했다. 일본 언론계에는 당시 일본 언론과 김정남 사이에서 다리를 놔준 조선족 브로커가 부추겨서 정치적 발언이 나왔다는 얘기도 돌았다.

접촉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백두혈통’이어서인지 김정남 주변에는 일종의 ‘브로커’들이 많았다. 김정남은 지난 3월 1일 저녁 6시 이시이 하지메(石井一·83) 전 일본 자치상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장소는 마카오의 스시집이었다. 이시이 전 자치상은 북한과 연이 깊은 인물이다. 1990년 자민·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초당파 방북단의 사무총장을 맡아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의 물꼬를 텄다. 이후 수차례 방북해 김일성도 만났다. 둘 사이를 중개한 인사는 재일동포 사업가. 그의 신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안전상의 이유로 사업가의 존재를 비밀로 해줄 것을 이시이 전 자치상 측이 일본 언론에 당부해서다.

고미씨는 “김정남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려는 인물들이 주변에 많았다”고 말했다. “그들 중에는 재일동포도 있었고 일본인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피살 후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다. 김정남 피살 후 김정남과 가장 친한 인물 중의 하나가 일본에 와 있어서 찾아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하더라. 조총련에서 김정남과 가까웠던 한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왜 김정남을 세상에 드러내려 했을까. 고미씨는 “일본에서 북한 보도는 언제나 큰 화제를 낳는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김정남을 다루면 틀림없이 높은 시청률이 나왔다. 브로커들은 김씨 일가와 친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치력과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는 김한솔에게 이목이 쏠린다. 김한솔을 보호하고 있다고 발표한 단체 ‘천리마 민방위’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평소에도 비서나 수행원 없이 혼자 홀가분하게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는 김정남. 그를 오랜 기간 지켜본 고미씨와 이동섭 회장은 김정남을 ‘인간적으로 꽤 괜찮았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고미씨는 김정남의 지난 5년 중 자신이 놓친 퍼즐을 찾으려 요즘도 김정남의 흔적을 찾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 지역도 한국의 영토로 규정했다. 김정남도 엄연한 한국인이라는 얘기다. 김정남의 죽음이 ‘제2의 이한영 암살’로 흐지부지 잊혀지지 않도록 한국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인터뷰를 마치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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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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