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곳엔 ‘진달래 방앗간’이 있다. 서울 불광동, 자동차 한 대 겨우 지나갈 너비의 길 양쪽으로 수선집, 전파사, 분식집이 자리한 골목이다. ‘참기름’ 간판 밑을 지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주인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쓰인 나무 간판이 보인다. 문에는 재잘재잘 손글씨로 쓰인 글귀들이 붙어 있다. ‘매일매일을 기쁘게 보내는 방법’ ‘꿈을 이루려는 소망’.

지난 3월 28일 정규재TV는 편지 한 편을 소개했다. 바로 이 진달래 방앗간 아주머니의 사연이다. 얼마 전 처음으로 살 집을 마련한 예순세 살 고모의 행복과 파출부 일을 하며 자식들을 다 대학에 보낸 친구의 성공을 자랑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아주머니는 ‘우리나라에선 목표가 있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매일 정규재TV를 시청하며 시장경제 공부를 하고 있다’고도 썼다. 이웃의 행복을 들으며, 탄핵정국이 할퀸 일상을 건너다 진달래 꽃다발과 마주친 기분이 든 건 기자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이날의 영상에 달린 1400여개 댓글 중엔 ‘눈물이 났다’는 댓글이 많다.

정규재TV는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고문이 이끄는 인터넷 방송이다. 2012년 2월 ‘개국’했다. 30여분 길이의 동영상을 매일 서너 개씩 공개한다. 가계부채, 규제개혁, 북핵 등 다양한 주제다. 카메라 앞에 정 고문 혼자 앉아 사투리 발성이 섞였는데 묘하게 귀에 잘 들어오는 어조로 해설한다. 지난 1월 25일에는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단독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영상은 공개 당일에만 12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같은 날 지상파·종편 뉴스를 통틀어 가장 높은 시청률(16.3%)을 올린 KBS 9시뉴스의 시청자 수는 140만명이었다.(닐슨코리아 수도권 집계) 적어도 1월 25일 정규재TV의 영향력은 KBS와 큰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지난 4월 4일 서울 광화문 오피스텔에 있는 정규재TV 사무실을 찾았다. 74㎡(22평) 공간에 방송 스튜디오와 정 고문 개인 집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정규재TV는 한국경제신문 소속이었다. 논설위원실 한편에서 촬영했다. 3월 말 독립해 나왔다. 그가 주필에서 논설고문으로 자리를 물러난 것과 동시였다. 외압 논란이 불거졌다. 사실일까. 다른 신문사 고위 임원 A씨의 분석이다. “논설고문은 어떤 언론사에서나 정리 수순 직전의 자리다. 한경과 정 고문은 이별의 시한까지 합의했을 거다. 한경의 대주주는 현대차와 같은 대기업이다. 정치권의 압력이 있든 없든 한경이 박근혜 대통령 단독 인터뷰를 한 사람을 그대로 두고 야권 정권을 맞을 순 없다. 정권이 바뀐 후엔 이미 늦는다.” 정 고문 본인은 이에 대한 답변을 사양했다.

거실 창유리로 청와대가 내려다보였다. 탄핵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정 고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잔인한 날들이었다. 민중주의적 요소가 정치의 장(場)을 압도하고 있다. 민중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절차적 엄격성을 부정한다. ‘무슨 소리냐, 이게 우리의 뜻인데’라며 사소해 보이는 입법 오류나 법 절차의 흠결은 무시한다.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열기가 식으면 되돌아보게 될 거다.”

- 박 전 대통령 인터뷰는 어떻게 성사됐나. “인터뷰를 신청했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사전 질문지는 보내지 않았다. 상춘재에서 기다리는데 대통령께서 아무 자료 없이 빈손으로 들어오셔서 내심 놀랐다. 카메라 세팅을 기다리며 ‘박근혜 정권의 정책 실패에 대해서도 묻겠다’고 했다. 그동안 경제민주화, 친중(親中)정책, 해양경찰청 폐지 등을 끊임없이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너무 복잡해지지 않을까요’라고 답하더라. 이 상황에 일반 정책까지 논할 필요가 있냐는 말로 들렸다. 뇌물수수 혐의 등 재판에 직접 관련된 문제는 묻지 않기로 사전에 합의했다.”

- 박 전 대통령은 어떤 사람인가.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그의 언어가 오해를 낳는다. 철저한 문어체 아닌가. 사람들은 외워서 읽는다고 생각하는 거다. ‘최순실이 써줬구나.’ 이 정권 초기에 청와대 회의에 감초처럼 불려 들어갔다.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이기도 했다. 회의에서 대통령이 멋진 얘기를 하면 나중에 따로 수석들에게 물었다. ‘누가 써줬습니까?’ 돌아온 답은 ‘모른다’였다. ‘자료는 우리가 챙겨줬는데 누가 썼는지는 모릅니다.’ 당시 우리끼리는 정윤회가 쓴 게 아닐까 추측했다. 정윤회 국정농단설(說)은 청와대에서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이 사태를 겪고 보니 그때 그 말들은 대통령이 직접 쓴 거였다. 국민은 물론 청와대 비서들도 박근혜라는 사람을 몰랐던 거다.”

- 대통령이라면 국민과 소통했어야 했던 것 아닌가. “고집 센 원칙주의자다. 선거의 여왕이라고 하는데 굉장히 비정치적인 사람이다. 참모진들이 기자회견 하자고 건의하니 ‘정치 쇼’는 안 한다고 거절했다. 나도 조언했다. ‘직접 부딪치면 오해가 풀린다. 나와서 설명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까지 제가 해야 하나요’라고 답하더라. 자신의 도덕적 기준상 굴욕이라 생각한 거다. ‘기껏해야 신발밖에 더 던지겠습니까, 맞아도 괜찮습니다’라고 다시 말했더니 싫은 기색을 보이더라.”

- 비정치적인 사람이 정치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건가. “보수의 빈곤함이 박근혜를 정치판으로 끌고 나왔다. 보수 스스로 지도자를 세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젠 박근혜를 극복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박근혜를 버리자’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말이 아니다. 보수층에는 ‘과격한 근본주의’가 있다. 지금 보수층들은 홍준표 후보가 태극기를 존중하지 않는다며 마음을 안 준다. 지금은 누가 더 순수하냐 따지며 칭얼대고 그럴 때가 아니다.”

- 대중들은 대통령이 각료들과 소통을 안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한다. “소통? 내가 알기로 노무현·이명박도 소통을 많이 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정면에서 소통을 부정했다. 실제로 자신과 동지적 관계에 있다가 내각에 들어간 사람들과는 잘 지냈지만, 새롭게 입각한 사람들과는 거의 대화를 안 했다. MB 때도 대통령과 독대 좀 하게 해달라는 장관들의 주문이 많았다. 대통령은 원래 독대를 잘 안 한다. ‘국무회의에서 말해라, 왜 독대를 하려고 하냐.’ 독대를 하면 꼭 사단이 생긴다. 많은 한국 대통령들이 장관들보다 머리가 안 좋았다. 독대를 하면 장관에게 말려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안 만나는 거다. 유독 박근혜만 그랬던 게 아니다.”

- 최순실 사태의 실체는 뭐라 생각하나. “최순실은 옛날로 치면 몸종이었다. 대통령은 최순실에게 옷 문제 같은 걸 의존했다. 그러니 최순실이 대통령 일정을 사전에 봤다. 제2부속실장 역할을 한 거다. 연설은 대통령 자신이 썼다. 써놓고 최순실에게 읽히며 평범한 아줌마도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인가 점검한 거다. 정호성과 안종범은 최순실의 영향력을 오버해서 생각했다. 속은 거지. 최순실은 대통령 부근을 오가며 돈 욕심이 생겼다. SK에 사업계획서를 건넸다. SK는 최순실의 존재를 잘 몰랐다. ‘진짜 청와대 뜻인지 알아보겠다’고 하자 대통령에게 들킬까봐 얼른 사업계획서를 다시 거둬들였다. 삼성은 최순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준 거다. 제가 보기엔 이 모든 걸 대통령은 몰랐다.”

- 유진룡 전 장관은 대통령에게 ‘블랙리스트는 안 된다’고 건의했다고 주장한다. 인터뷰에서 대통령은 블랙리스트를 몰랐다고 했다. “유진룡의 거짓말이다. 당시 그 자리에 배석했던 사람이 유진룡의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블랙리스트라는 게 사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지원받았던 이들의 명단이다. 원래는 화이트리스트였다는 말이다. 명단 인사 중엔 이 정권 들어서 지원받은 이도 많다. 언론은 알면서도 보도 안 했다.”

일각에선 “대통령 변호인단의 잘못된 전략 때문에 구속까지 이른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정 고문은 단칼에 “그렇지 않다”고 잘랐다.

“헌재 판사들은 탄핵을 인용하기로 비교적 초기에 결론 냈다. 탄핵에 무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2~3명의 판사들을 재판하면서 설득했다. 8 대 0의 스코어는 비정상적이다. 의견이 분열될 경우 각자의 의견을 설명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거다. 만장일치라는 방패 뒤로 숨은 이유다. 헌법 재판을 군중재판으로 만들어버린 타락상을 8 대 0이라는 숫자가 보여준다.”

문득 ‘비아그라 파문’이 떠올랐다. 청와대 의약품 목록에서 ‘비아그라’가 발견되자 용도를 두고 별별 추측이 언론과 인터넷에 돌았다. 평소 민주당을 지지하던 지인이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환자들에게 고산병 예방용으로 비아그라를 직접 몇십 번이나 처방했다. 주변인들이 의사인 내 말을 안 믿는다.”

정 고문은 ‘여성 대통령에 대한 인격 모독’ 문제는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섬마을 날건달들이 학교 여교사를 두고 집단 성범죄를 벌인 사건과 같다. 당시 그 마을 아주머니들은 여교사에게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나왔다. ‘세월호 7시간 밀회를 했냐’ ‘숨겨둔 딸이 있냐’, 여성이라서 던진 저질스러운 질문들이다. 한국의 어떤 여성단체도 이 희롱을 부당하다 하지 않았다. 정치에 미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버렸다. 대통령 머리를 공으로 만들어 어린아이들에게 차게 하고, 단두대 모형을 만들어 광장에 전시했다. 이게 마치 문화현상인 것처럼 애써 외면했다. 여성 대통령에 대한 경멸과 비아냥은 앞으로 한국인의 심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거다.”

- 가짜 뉴스와 루머가 일상화되는 것 같다. “교육이 시민사회의 도덕을 가르치지 않는다. 윤리교과서를 보면, 선의가 좋다고만 하지 수단은 가르치지 않는다. 정의를 가르쳐야 한다면서 그 방법이 사법 시스템이라는 건 안 가르친다. 그러니 광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정치학자도 있다. 민도(民度)랄까, 지력(知力)이 낮은 거다. 누군가가 거짓을 유포하면 폭발한다. 세월호와 천안함 때 숱한 거짓이 난무하지 않았나. 음모론이 우리나라처럼 횡행하는 나라가 없다. 음모론적 사고를 갖게 되면 논의가 아예 안 된다.”

사무실 곳곳에 책더미가 보였다. ‘도덕감정론’(애덤 스미스), ‘대중독재’(임지현·김용우), ‘열린 사회와 그 적들’(칼 포퍼),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한스헤르만 호페), ‘회의적 환경주의자’(비외른 롬보르) 등 다양한 제목이 보였다. 물었다. “저 책을 다 읽으셨냐.”

“경제교육연구소장 시절 전투적으로 읽었다. 하루에 1권씩 읽었다. 책 구절에 표시를 해뒀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아르바이트생에게 표시한 부분을 타이핑하게 했다. 나중에 그 구절만 다시 읽을 수 있게. 그런 식으로 6년간 2000권쯤 읽었다. 인생에 한 번은 집중적으로 책을 읽는 시기가 있어야 한다.”

탄핵을 두고 가족들 사이엔 이견이 없는지 궁금했다. “다행히 우리집 아이들은 저를 직접 공격하진 않는다. 큰아이는 되레 절 걱정한다. 대통령 인터뷰한 후 언론들이 일제히 저를 죽이려 하지 않았나.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렇게 공부 안 하면 안 된다는 사명감 때문에 정규재TV를 하는 거다. 저 자신도 지적으로 게을러지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 아끼는 조카 녀석이 이런 문자를 보내오긴 했다. ‘삼촌이 부끄러워요.’”

- 뭐라 답하셨나. “‘너도 귀가 얇구나. 공부 좀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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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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