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6자회담 중국 측 수석대표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가 지난 4월 10일 서울 외교부에서 접견을 갖고 인사를 나누고 있다. ⓒphoto 뉴시스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6자회담 중국 측 수석대표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가 지난 4월 10일 서울 외교부에서 접견을 갖고 인사를 나누고 있다. ⓒphoto 뉴시스

“박근혜 정부는 저물어도 ‘오병세(五炳世)’는 끝나지 않았다. 불의의 일격을 받아 ‘사점오병세(四點五炳世)’가 됐을 뿐이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두고 농반진반으로 나오는 말이다. 개각 때마다 유임을 거듭했던 윤 장관은 한때 박근혜 전 대통령과 임기 5년을 함께할 것이란 기대를 받았고, 그 덕분에 ‘오병세’란 별명도 얻었다. 이제 그런 기대는 사라졌지만, 윤 장관은 현직을 지키고 있다. 업무 의욕도 왕성하다.

지난 4월 3일, 외교부 주요 간부인 A 국장은 낮 12시45분이 돼서야 외국 공관원과의 점심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미리 양해를 구하고 낮 12시30분에 약속을 했는데도 15분 지각을 면치 못했다. 윤 장관이 오전 10시부터 열린 공식 ‘실·국장회의’에 이어 핵심간부만 모이는 이른바 ‘소인수 회의’를 다시 소집했기 때문이었다. 윤 장관은 2시간 넘는 회의를 통해 현안을 모두 훑은 뒤에야 회의를 마무리했다.

윤 장관의 스타일에 대해 외교부 간부들은 “취임 만 4년이 넘었어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임기 초 외교부 내에서 엄청난 원성을 샀던 ‘심야 마라톤 회의’는 자제하고 있지만, 월요일 실·국장회의는 여전히 2시간을 넘기기 일쑤다. 그래서 실·국장들은 월요일에 아예 오찬 약속을 하지 않거나, 낮 12시30분 또는 오후 1시쯤으로 약속을 한다. 그러나 다른 요일에 장관이 갑작스레 소집하는 회의에 들어가느라 약속을 취소하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본인 살 궁리만…” 냉소적 평가

소문난 업무 의욕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업무 의욕 때문에, 윤 장관에 대한 내부 평가는 박하다. 임기 초반 외교부 직원들의 주된 불만은 윤 장관이 자구(字句) 수정에 매달리느라 직원들을 혹사시킨다는 것이었다. 외교부 B 심의관은 “본인이 읽을 연설문은 이해한다고 해도 언론 대응을 위한 ‘PG(Press Guidance)’를 만드느라 종일 다른 업무를 볼 수 없게 만드는 데는 질렸다”고 말한다. 이 ‘PG’란 외교부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다. 다른 부처(部處)의 ‘해명자료’나 ‘설명’ 정도에 해당하는데, 어떤 현안에 대해 기자들에게 문자·전화·이메일 등으로 배포하는 외교부의 입장·관점을 뜻한다.

이런 불만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한 지난해 10월 말 이후, 외교부 직원들이 윤 장관에 대해 “자기 살 궁리만 하는 사람”이란 아주 냉소적인 평가를 입 밖에 내기 시작했다. 특검 수사에서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외교부 ‘군기잡기’를 위해 외교부 공무원들의 좌천성 인사를 요구했고, 윤 장관이 이를 수용한 일이 밝혀졌다. 2015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인 관광객의 단체비자 수수료 면제 시한을 1년 연장하라고 지시했는데, 외교부 재외동포영사국 영사서비스과가 이의를 제기한 것이 문제였다. 당시 외교부는 “단체비자 수수료를 면제하면 한시적 행정원의 급여를 지급할 예산 확보가 어려워 고용 중단 등 문제가 생긴다”는 공문을 법무부로 보냈는데,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이를 ‘항명’으로 받아들였다. 민정수석실 특감반은 지난해 2월 이명렬 재외동포영사국장 등에 대한 좌천성 인사를 외교부에 요구했고, 윤 장관은 결국 재외공관장 보임이 예상됐던 이 국장을 산하기관인 국립외교원에 경력교수로 보냈다.

이명렬 전 국장은 지난 4월 7일 주(駐)요코하마 총영사로 임명되면서 ‘고난의 행군’을 마쳤다. 지난해 5월 최순실씨의 낙점을 받아 외교부 간부 출신 내정자를 밀어내고 특임공관장에 임명됐던 유재경 주미얀마 대사의 사임 사실도 마침 같은 날 알려졌다. “사필귀정”이란 얘기가 나왔지만, 윤 장관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날카로워졌다. “장관으로서 본인만 직(職)을 오래 보전했을 뿐, 청와대에 맞서 조직을 지키려고 한 적은 없는 셈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윤 장관을 두둔하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다. 간부급 인사들은 “장관도 공무원인데 청와대를 거스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고들 한다. 윤 장관 밑에서 간부를 지낸 공관장 C씨는 “외교부 인사에는 대개 ‘연줄’과 ‘라인’이 많이 작용하는데 윤 장관은 아무 인연이 없었던 나를 경력만 보고 발탁해줬다”며 “객관적 시각이 있는 장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안티 윤병세’에 속하는 외교부 간부들은 또 다른 사례를 든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처한 지난해 11월 말 외교부에서는 갑자기 “윤 장관은 사실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대했었다”는 말이 퍼지고 ‘정부 당국자’를 인용한 보도까지 나왔다.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위안부 합의를 주도해서 어쩔 수 없이 외교부가 따르게 됐을 뿐, 윤 장관은 당초 합의에 반대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12월 말 윤 장관은 기자단 송년오찬에서 직접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가장 강한 입장을 취해온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을 했다. 윤 장관에 대해 비판적인 외교부 중간 간부급 D씨는 “박근혜 정부에서 제일 잘나갔으면서 다음 정부에서 위안부 합의를 추궁당할 것 같자 제일 먼저 발을 뺀다”며 “박 전 대통령과 아무 인연 없이 청와대로 불려간 간부들은 오히려 묵묵히 ‘의리’를 보여주는데 정말 비교된다”고 말했다. 이런 해석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직원들이 꽤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러 측면에서 윤 장관은 박근혜 정부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주미공사,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조정실장, 외교부 차관보, 대통령비서실 통일외교안보정책수석 등을 지낸 윤 장관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공직을 떠나야 했다. 잘나가는 관료였지만 대사(大使) 한 번 지내보지 못했던 외교관 윤병세의 ‘화려한 부활’은 2010년 12월 박 전 대통령의 대선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발족에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윤 장관은 밤잠도 마다하는 업무 스타일과 윗사람 심기를 잘 읽는 언변 등으로 곧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새누리당 행복추진위 외교통일추진단장으로 대선 레이스를 뒷받침했고, 박 전 대통령이 18대 대선에서 승리한 후 대통령직 인수위 외교국방통일분과 위원을 거쳐 외교부 장관 지명을 받았다.

윤 장관이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것은 2013년 3월 11일, 박근혜 정부의 첫 국무회의가 열리던 날이었다. 그날 장관 임명장을 받은 13명 중 여전히 내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법무부 장관이었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뿐이다. 박 전 대통령의 5년 임기를 함께 채웠더라면, 윤 장관은 ‘역대 최장수’ 외교장관이 될 뻔했다. 윤 장관은 이미 정부 수립 후 세 번째로 장수한 외교장관이다. 상식에 비춰 윤 장관이 다음 정부 출범과 동시에 물러난다고 가정하면, 19대 대통령 선거 당일인 5월 9일이 그의 임기 마지막날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날 퇴임할 경우 윤 장관의 임기는 1520일이다. 1975년 12월부터 1980년 9월까지 재임한 고(故) 박동진 전 외무장관의 임기(1718일)나, 1951년 4월부터 1955년 7월까지 외무장관을 지낸 고(故) 변영태 전 국무총리의 임기(1564일)를 넘어서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1987년 5년제 단임 개헌 이후만 본다면, 윤 장관을 최장수 외교부 장관이라고 볼 수 있다. 1987년 개헌 이후 두 번째로 장수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외교부 장관 임기는 2004년 1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1028일로 윤 장관보다 500일 가까이 짧다.

‘1987년 후 최장수’ 대기록

‘자화자찬’은 윤 장관의 임기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다. 4월 초 윤 장관은 박근혜 정부의 정책 백서와 별도로 자신의 재임 기간 중 외교부의 정책성과집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범정부 차원의 백서는 내용이 다소 기계적으로 수집된다”며 “외교부가 어떤 고민을 하며 정책을 입안·시행했는지 내부 기록(institutional memory)을 남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외교부 안에서조차 “사실상 윤 장관의 ‘업적집’을 만들라는 소리 아니냐. 해도 너무하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임기 내내 윤 장관은 “자화자찬이 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해 3월 재외공관장 회의에서 윤 장관은 “동북아의 거센 파고 속에서도 방향성을 갖고 부단히 순항했다”고 자평했다. 박 전 대통령이 2015년 9월 중국 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석하고도, 지난해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당시 시진핑 주석과 즉각 통화가 이뤄지지 않아 ‘외교 실패’ 논란이 있었던 시점이었다. 사드(THAAD)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문제로 미·중 간 신경전이 대단했던 2015년 3월 공관장 회의에서도 윤 장관은 “한·미, 한·중 관계가 최상”이라며 “미·중 양측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상황은 축복”이라고 했다. 북한의 5차 핵실험 후인 지난해 10월 윤 장관은 “훨씬 더 강력한 독자 제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개성공단 폐쇄까지 끝난 터라,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독자 제재는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관계자 B씨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학창 시절부터 장관님 별명이 ‘윤뻥세’ 아닙니까. 감안해서 들으세요.”

윤 장관은 ‘1987년 후 최장수’란 대기록을 세웠지만, 이미 대부분의 외교부 직원들은 ‘포스트 윤병세’를 대비하고 있다. E 국장은 “새 정부가 출범하면 기존 정책을 다 뒤집으려 할 텐데 그 압박이 엄청날 것”이며 “과거 사용했던 인수·인계 양식을 얻어서 정리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많은 당국자들은 “12·28 위안부 합의가 가장 걱정된다”며 “‘왜교부(倭交部)’라고 불릴 만큼 여론이 나쁜데 다음 정부가 들어서면 청문회라도 하지 않겠냐”고 하고 있다. 윤 장관의 임기 마지막 날들은 이렇게 폭풍 전야(前夜) 속에 흘러가고 있다.

김진명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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