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3주 전 지지율이 최종 당락을 가른다’는 속설이 있다. 통계에서 추론한 말이다. 19대 대선을 2주 앞둔 4월 25일 현재 대선주자들의 지지율은 문재인 후보 41%, 안철수 후보 30%, 홍준표 후보 9%, 심상정 후보 3%, 유승민 후보 3%다.(4월 18~20일,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4명 대상 조사, 한국갤럽 자체조사, 그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기존 통계치만으로 보자면 후보 단일화 등 큰 이변이 없는 한, 이 지지율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하지만 예단하기는 이르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번 대선은 역대 대선과는 판이하게 다른 ‘낯선’ 대선인 만큼 기존의 통계나 예측치로 판단하긴 어렵다는 전망 역시 높다. 국내 최초로 선거 여론조사가 실시된 것은 1987년 제13대 대선부터다. 우리나라 대통령선거는 1952년(제2대)부터 1971년(제7대)까지는 직접선출제였고, 1972년(제8대)부터 1981년(제12대)까지는 간접선출제를 실시했다. 한국의 대표적 여론조사기관으로 꼽히는 한국갤럽조사연구소는 다시 직선제를 실시하기 시작한 13대 대선부터 꾸준히 선거 여론조사를 실시해 당선자를 예측해왔고, 결과 역시 적중했다. 13대 대선부터 18대 대선까지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지지율 추이와 지지율의 변곡점을 만든 사건을 짚어본다.

13대

1987년 12월 16일

투표율 89.2%

여당의 노태우 후보 대 야당의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후보의 선거로 치러졌다.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는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동지 관계라 후보 단일화만 하면 야당이 질 수 없는 선거라는 인식이 파다했다.

그러나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신경전이 깊어지면서 단일화는 물 건너가고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원래 김대중 후보가 김영삼 후보보다 지지율이 높았으나 김영삼 후보가 정승화 전 육군 참모총장을 영입하면서 김영삼 후보에게 표가 몰려 최종 득표율 2위를 차지했다. 선거 2주 전 KAL기 폭탄테러 사건이 터져 안보를 강조한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됐다.

14대

1992년 12월 18일

투표율 81.9%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 김영삼 후보와 통합야당인 김대중 후보와의 경쟁구도 성격이 강했다. 정주영 후보는 현대그룹의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등장,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역대 대선 중 사전 지지율과 실제 선거 결과의 차이가 가장 크다. 선거 보름 전 지지율이 25%였던 김영삼 민자당 후보는 실제 선거에서 42%의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지지율보다 무려 17%를 더 얻었다. 영남과 호남의 지역구도로 치러진 대표적 선거로 거론된다. 특히 선거 막판 지역감정을 대놓고 모의한 부산의 ‘초원복집’ 사건이 터져 떠들썩했다. 실제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서울과 호남에서만 우위를 점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모두 김영삼 후보의 득표율이 높았다.

15대

1997년 12월 18일

투표율 80.7%

‘대쪽’ 법조인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이회창 후보는 ‘떼어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지율이 높았다. 그러나 두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이 제기되면서 지지율이 폭락했다. 38%의 지지율은 순식간에 반토막 이하인 16%까지 떨어졌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후보를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경선에서 2위를 차지한 이인제 후보에게 지지자가 몰리면서 이인제는 탈당 후 신당을 만들어 대선에 출마했다. 한때 이회창보다 두 배 높은 지지율을 받았으나 “이인제를 뽑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공세에 밀려 지지율이 뒤집히기 시작, 이회창 후보에게 다시 표가 몰렸고 김대중 후보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역대 대선 중 가장 적은 격차인 1.6%포인트 차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16대

2002년 12월 19일

투표율 70.8%

지지율 면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대선으로 꼽힌다. 이회창 후보는 2002년 5월 여론조사 이래 지지율에서 늘 압도적 1위를 달리다가 노무현 후보에게 져 ‘패배할 수 없는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표현이 붙는다. 두 가지 결정적 사건이 대선 정국을 뒤바꿔놓았다. “노무현으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없다”는 인식으로 정몽준·노무현 후보가 단일화했고,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사건이 발생하면서 반미감정이 고조되어 보수정권이 불리해졌다. 지지율에서 엎치락뒤치락했던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는 여론조사를 통해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정몽준 후보가 사퇴하면서 25%였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44%로 껑충 뛰면서 1위로 급부상했다. 이후 노무현 후보는 지지율 1위를 지켰다.

17대

2007년 12월 19일

투표율 63.0%

줄곧 한나라당 후보가 지지율 1위를 지킨 다소 싱거운 선거였다.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치열한 경선 끝에 이명박 후보가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확정됐고, 이후 이명박 후보는 지지율이 61%까지 치솟았다. 무소속이었던 이회창 후보가 대선 한 달 전 갑자기 대선에 출사표를 던지면서 이명박·정동영·이회창 후보의 1강2중 선거가 됐다. 노무현 정부 말기, 부동산정책 실패를 비롯한 총체적 난국으로 여권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 상황이라 이명박 후보(48.7%)가 정동영 후보(26.1%)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지지율로 당선됐다.

18대

2012년 12월 19일

투표율 75.8%

양강구도가 가장 두드러진 선거였다. 박근혜 후보 51.6%, 문재인 후보 48%의 득표율로 두 후보의 득표율이 99.5%를 차지한다. 박근혜 후보는 줄곧 지지율 1위를 달렸고,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엇비슷한 지지율을 보이던 중, 안 후보가 문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후보 단일화하면서 국면이 전환됐다. 24%에 불과하던 문 후보의 지지율은 안 후보의 지지율을 흡수해 42%로 치솟았다. 이후 3주 전부터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오차범위 내 접전 양상을 보였다.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이 높다는 여론조사가 대부분이었으나 문재인 후보가 앞선다는 조사도 꽤 있었다. 박근혜 후보는 대선 사상 최초로 과반 이상 득표로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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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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