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
[2458호] 2017.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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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암투병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의 눈물

▲ 지난해 9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한인권법 실천을 위한 단체 연합회’ 발대식에서 김성민 대표가 출범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제가 살아본 대한민국은 노동자, 농민의 아들, 아파트 관리원의 아들이 대통령의 꿈을 꿀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북한은 그 반대죠. 꿈을 꾸어도 노동자, 농민의 꿈을 꾸어야 하고 대통령의 아들은 당연히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나라입니다.”
   
   탈북민들이 운영하는 대북 라디오 방송매체 자유북한방송(FNK)의 김성민(55) 대표가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 아버지의 추억을 떠올린다”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그는 북한에서 34년을 산 뒤 1996년 탈북해 1999년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 정착한 지 올해로 18년이 된다.
   
   김씨는 현재 폐암 4기 투병 중이다. 지난 3월 두통으로 병원을 찾아 뇌종양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두통의 원인인 뇌종양이 폐에서부터 전이된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현재 5~6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다. 집에서 통원치료를 하면서 환경이 좋은 근교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최정훈 자유북한방송 국장에 따르면 김씨는 최근까지도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에 종종 들러 일을 봤지만, 현재는 건강이 악화돼 출근을 못 하고 있다. 지금은 건강 문제로 통화조차 어려운 상태다. 병원비는 탈북단체 대표들이 십시일반 모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가 최근 관심을 기울여온 문제는 북한인권법 문제다. 김씨는 지난해 9월 ‘북한인권법 실천을 위한 단체연합’을 결성해 상임대표를 맡아왔다. 이 단체는 북한인권법 제정에 따른 여러 사업에 탈북민들의 참여를 보장하자는 목적에서 결성됐다. 북한인권법은 11년간 국회에 묶여 있다가 지난해 3월 제정됐다. 북한인권재단은 북한 인권 실태 조사, 인권 개선 관련 연구·정책 개발,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 등을 수행하는 기구다.
   
   하지만 김씨가 중병에 걸리면서 현재는 본업인 자유북한방송 자체의 유지가 어려워진 상태다. 김씨와 함께 일해온 최정훈 국장은 “자유북한방송 사이트에 기사를 게재하거나 방송을 송출하는 활동은 계속하고 있지만 금전적인 부분이 많이 어려워진 상태”라면서도 “대북방송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니 계속한다”고 말했다. 투병 중인 그와의 대면 인터뷰 대신 본인의 동의하에 그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들을 바탕으로 그의 삶의 궤적을 정리했다.
   
   
▲ 투병 중인 김성민씨가 5월 7일 자신의 SNS에 올린 사진. 현재는 퇴원한 뒤 통원치료 중이다. photo 김성민 페이스북

   북한 최고 시인의 아들
   
   김성민씨는 1962년 북한 자강도(평안북도) 희천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이 김진인 그는 시인의 핏줄을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의 유명 시인 김순석(1921~1974)씨다. 김순석씨는 광복 후 문학잡지인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그는 종군기자로 6·25전쟁을 겪은 뒤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창작지도교수로 일하면서 북한의 대표적 시인인 차승수, 조빈, 서진명 등을 가르쳤다. 2007년 ‘문학과 지성사’가 출판한 ‘북한 문학’의 편집진은 김순석씨를 “북측 최고의 시인으로 꼽아도 무리가 없다”고 평가한다. 1958년 낸 ‘황금의 땅’이 그의 대표 시집이다.
   
   시인의 아들인 김성민씨가 평양이 아닌 자강도 산골에서 태어난 이유는 아버지 김순석씨가 1961년 ‘혁명화 대상자’로 낙인찍혀 평양에서 추방됐기 때문이다. 흔히 공산주의 사상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쓰는 다른 시인들과 달리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주로 쓴 것이 추방 이유다. 김순석씨는 이 때문에 “배부른 부르주아적 사고에 물든 시인”이라는 비판을 북한에서 받아왔다.
   
   북한에선 일반적으로 한번 혁명화 대상자가 되면 복귀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일반 범죄를 짓고 감옥에 가는 것보다 정치적 낙오자가 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이 김성민씨의 설명이다. 하지만 김순석씨는 희천공작기계공장에서 2년간 일하면서 ‘항상 그이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북한 최초의 노동자 시집을 만들어 출판했다. “수령이 항상 노동자들과 함께 계신다”는 내용의 김일성 찬양 시집이었다. 찬양 시집의 내용에 감명받은 김일성이 “김순석을 원상 복귀시키라”고 지시하면서 1963년 김순석씨는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평양에 돌아왔다.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성민씨는 17세 때 군에 입대했다. 10년6개월 동안 사병으로 생활하며 군인잡지에 시를 투고했다. 사병 생활을 끝낸 뒤 북한 최고의 교원양성기관인 평양 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의 군위탁생으로 들어갔다. 투고한 시 덕분이었다. 대학에서 시를 전공한 김씨는 3년간의 교육을 마친 뒤 장교로 임관해 예술선전대작가로 활동했다. 사령관이나 정치위원의 보고서를 써주고 예술단 공연의 코미디 작품을 쓰는 것이 주 업무였다고 한다.
   
   
▲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고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양아들로 불렸다. photo 뉴시스

   총살 피하려 기차에서 뛰어내려
   
   김씨는 북한군 장교로 활동하면서 틈나는 대로 시인의 꿈을 키워 나갔다. 다른 부대의 군인들도 김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알 만큼 여러 편의 시와 수필 등을 잡지에 냈고 축제 때 발표한 작품이 김정일의 칭찬도 받을 만큼 작가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군에서 승승장구하던 김씨가 탈북을 결심한 것은 대위 시절이던 1996년이다. 당시 한국에는 김씨의 작은 아버지 두 명이 있었다. 김씨는 중국 보따리상을 통해 남쪽의 숙부들과 편지를 주고받다가 북한 보위부에 적발됐다. 평소에 김씨를 잘 아는 장교가 적발 사실을 미리 알려줘 체포 직전 탈출했다. 탈북을 결심한 지 3일 만이었다.
   
   두만강을 건넌 뒤 쫄쫄 굶으며 자동차 바퀴에 깔린 바나나를 주워 먹던 김씨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교회였다. 북한에서는 ‘교회에 가면 사람을 죽인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김씨는 “북한에서 읽은 소설 ‘레미라제블’을 통해 교회에 가면 적어도 밥은 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교회 전도사의 안내로 버스를 타고 12시간 동안 달려 도착한 옌지의 조선족교회에서 머물렀다.
   
   김씨는 중국 다롄에서 한국으로 가는 배에 타려다 중국 공안에 적발됐다. 족쇄를 찬 채 42일 동안 중국 감옥에서 조사받은 뒤 국경의 탈북자수용소에서 북한 군보위부원에게 넘겨졌다. 호송당해 북한으로 돌아가면 꼼짝없이 공개처형을 당할 판이었다. 김씨는 감시가 느슨한 사이 양손에 족쇄를 찬 채 열차의 유리를 깨고 뛰어내렸다. 8일 만에 다시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숨었다. 부인 문명옥씨와도 이때 중국에서 만났다. 김씨는 약 3년 뒤인 1999년 2월 한국에 입국했다. 현재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 1명을 두고 있다.
   
   탈북민들은 기억에 남는 북에서의 경험으로 흔히 고된 탈북노정을 꼽는다. 목숨을 걸고 넘던 두만강과 압록강에서의 고투, 4000~5000㎞ 거리를 에돌아야 했던 몽골과 베트남에서의 노정 얘기다. 하지만 김씨는 탈북을 결심했을 때 이제 떠나면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진저리를 쳤던 때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외아들인 내가 이 땅을 떠나면 아버지 어머니 산소는 누가 돌보고, 누이들은 또 이 못난 동생을 얼마나 원망할까.”
   
   김씨는 고(故)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요청으로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을 맡은 뒤 북한 민주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010년 황장엽 전 비서가 사망했을 때 장의위원회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이후 한국 탈북자 사회의 한 축으로 활동해왔다.
   
   김씨는 2004년 10명가량의 탈북민과 함께 민간 대북방송 자유북한방송을 설립했다. 탈북민들의 수기를 소개하고 북한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방송의 주된 내용이다. 미국에 있는 영국 중계업체를 통해 전 세계에 송출하는 방식으로 북한에 전달해왔다. 2008년에는 국제 언론인 인권보호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로부터 ‘올해의 매체상’을 받기도 했다. 방송 내용은 2015년 국방부가 재개한 ‘대북 확성기 방송’을 통해 직접 북쪽에 송출되기도 했다.
   
   북한이 체제 비판에 특히 민감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문에 김씨는 북한으로부터 끊임없는 암살 위협을 받아왔다. 2012년부터는 북한으로부터 공개적인 위협을 받아왔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홍순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등 주요 탈북 인사들과 함께 북한으로부터 ‘처단 대상’이라는 위협을 받아왔다. 식칼을 꽂은 인형, 피를 묻힌 도끼, 가족을 해치겠다고 위협하는 편지 등이 사무실로 배달되기도 여러 번이었다. 지난해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가 탈북한 이후 북한의 위협은 더욱 강화됐다. 하지만 김씨는 북한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대북 심리전 활동을 오히려 강화했다. 같은 해 출범한 탈북자단체 연합체인 ‘북한민주화추진 연합회’를 구성해 강화도 인근에서 대북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
   
   
   김씨는 한국에 와서도 시인으로서의 꿈을 잃지 않았다. 연세대 국문과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한 뒤 중앙대 예술대학원(문예창작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 여름호에 총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탈북민 1호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 2010년 5월 서울 가양동 자유북한방송 스튜디오에서 김성민 대표가 방송 6주년을 맞는 소감을 말하고 있다.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고향 옥류교
   
   ‘다리 위를 걷는다. 강물이 비껴간다. 잿빛 연기 속에 질주하는 승용차들, 어디선가 굴러온 휴지 한 조각이 광란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소리로부터 차창 속 번들거리는 눈빛들로부터 피할 길 없는 삶이 야속한 만큼 보고파지는, 그리워지는 옥류교 난간에 몸을 기댄다.’ - ‘동작대교 위에서’ 중(2006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작품으로 낸 시집 갈피에 끼워두었던 시)
   
   생의 고비를 맞은 김씨가 가장 그리워하는 곳은 고향인 평양 대동강의 옥류교다. 김씨는 5월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옥류교에 얽힌 추억을 회상했다.
   
   ‘모란봉 기슭, 내 고향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배고픈 사람들의 눈뿌리를 슬그머니 부여잡는, 그 식당 난간에 서면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동평양과 서평양을 잇는 옥류교가 놓여 있답니다. 열두 개 교각 밑에 구슬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매일처럼 지나던 그 다리는 길이가 팔백 미터, 너비는 이십이 미터, 흔치 않은 승용차가 쌩쌩 달리곤 했죠. 그래서인지 학교 갈 땐 어머니가, 집에 갈 땐 담임 선생님이, 늘 서 있던 그 다리, 커서 군대 갈 땐 옆집 옥이가 내 손 꼭 잡고 서 있던 다리랍니다. 그 다리 머릿돌 한구석에 이름 석 자 적어놓았다가 관리원 영감한테 뒤통수 얻어맞던 기억도 있고, 친구들과 옹노를 놓아 강비둘기 잡아먹던 기억도 있는, 멀리멀리 떠날 때는,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던 그 밤엔 무슨 놈의 다리가 그리도 길던지… 예까지 닿아 있다면 믿으시겠나요.’
   
   김씨가 쓴 시 중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작품이 유독 많다. 김씨는 14살에 양친을 모두 여의었다. 집 없이 부모 없이 산 그에게도 고향 집은 남다른 의미였다. 그는 사병생활을 마치고 고향 집을 찾았을 때의 소회를 ‘병사의 자서전’이라는 시를 통해 밝혔다.
   
   ‘산에 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인민군 전사가 있었습니다. 누구를 찾느냐는 경비실 노인네 앞에서 머뭇거리는 스물일곱 살의 제대군인입니다. 4층7호를 찾아왔는데요. 세대주 이름이…. 귀뿌리가 빨개진 전사는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섭니다. 고향집은 그가 바친 석삼년의 군복무 기간에 모래성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돌아가셨고 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고, 스물세평 작은 집은 얼굴도 모르는 심 아무개의 차지가 되어버렸나 봅니다.’ - ‘병사의 자서전’ 중
   
   사병생활을 마치고 찾아온 고향 집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개인 소유를 일절 허락하지 않는 북한에선 사람이 살다 죽으면 집도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된다. 김씨는 당시의 소회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살던 집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계단을 올랐던 심정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20년 가까이 탈북민으로 살아온 김씨는 스스로를 ‘분단체제의 사생아’라고 표현했다. 고향을 떠난 순간부터 고향 사람들에게는 배신자로 기억되겠지만, 끝내 고향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명절 때마다 고향으로 달려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고향을 떠올리기조차 싫어질 때가 여러 번”이라면서도 “잊으려 하면 할수록, 기억에서 지우려 하면 할수록 고향은 언제나 내 곁에 머무르며 멀어지려는 내 마음을 꽉 부둥키고 있다”고 말했다.
   
   ‘떠나던 나를 위해 아무도 울어준 이 없는 곳이 고향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내 나서 첫걸음 익힌 곳, 못 다한 나의 사랑일지 모릅니다.’ - ‘고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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