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봉투 만찬’으로 감찰 대상에 오른 이영렬 전 중앙지검장(왼쪽)과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 ⓒphoto 연합
‘돈봉투 만찬’으로 감찰 대상에 오른 이영렬 전 중앙지검장(왼쪽)과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 ⓒphoto 연합

국민 세금으로 편성되지만 사용 내역은커녕 편성된 금액 규모조차 공개되지 않는 돈이 있다. ‘특수활동비’ 이야기다. 특수활동비는 공무원이 수령증 하나만 붙이면 쓸 수 있는 돈이다. 영수증 등 사용 내역을 제출할 필요 없이 특수활동비를 받았다는 서명만 하면 현금으로 지급받아 쓸 수 있다.

매년 예산안은 정부와 국회의 합의를 거쳐 편성된다. 2017년 정부 예산규모는 약 400조7000억원이다. 국방·외교, 공공질서 등 분야별로 배분되는 이 예산에 특수활동비는 엄연히 포함돼 있다. 하지만 명목상으로 특수활동비라고 분류된 항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수활동비는 기관들이 각자 추진하는 사업 부문에 나눠져 편성되기 때문이다. 총액이 공개되지 않는 만큼 구체적인 내역별 규모도 물론 공개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정부 예산에 ‘숨은’ 돈이다.

올해 기관별 편성 특수활동비 합산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특수활동비 관련 예산을 편성·배분하는 기획재정부 예산기준과에 관련 문의를 했다. 하지만 예산기준과 담당자는 “특수활동비는 금액 자체에 대외비 성격이 있어 언론에 밝히지 않고 있다”며 공개를 거부했다. 이 담당자는 “사건 수사나 기밀 유지가 필요한 분야에 한정돼 불가피한 경우 편성하는 금액”이라며 “기밀 유지 때문에 세부 내역에 관해서는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5월 19일 기획재정부가 국회 정무위 김해영 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2017 특수활동비 편성내역’ 자료에 따르면, 올해 19개 기관에 편성된 특수활동비 금액은 도합 약 8938억원이다. 지난해 대비 약 68억원이 늘었다. 이 19개 기관에는 정부 부처 외에도 국회와 대법원이 포함된다. 지난해까지는 18개 기관에 특수활동비가 편성됐다. 올해부터 새로 특수활동비를 배정받은 기관은 방위사업청이다. 확정된 올해 특수활동비 편성 내역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의원은 앞서 지난해 9월 ‘2017년 기관별 특수활동비 편성(안)’을 기획재정부로부터 제출받아 공개했다. 이 (정부) 편성안에 따르면 올해 부처별 특수활동비로 책정된 금액은 8990억원이었다. 국회의 예산 심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약 52억원이 줄어들었다. 의원실 관계자는 “특수활동비는 예산심사 등에서 감시를 받는 대상이 아니다 보니 집행 내역 등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자료에 따르면 가장 많은 특수활동비를 편성받은 기관은 국가정보원이다. 지난해 대비 약 70억원이 늘어 약 4900억원의 특수활동비가 편성됐다. 다만 국정원의 경우, 인건비, 시설유지비 등이 보안을 위해 모두 특수활동비로 잡힌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국방부는 지난해보다 31억원이 늘어난 약 1800억원의 특수활동비를 배정받았다.

특히 올해는 방위사업청도 3300만원의 특수활동비를 새로 배정받은 점이 눈에 띈다. 2006년 출범한 방사청이 특수활동비를 배정받은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방사청 관계자는 “방사청 감독관실에 파견된 검사들을 위해 배정된 금액”이라며 “파견된 검사들은 수사·기소권은 없지만 관리·감독 역할을 한다”고 했다. 지난해 4월 새로 설치된 방사청 감독관실에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을 지낸 조상준 감독관을 포함해 3명의 검사가 있다.

10년간 8조5000억

특수활동비는 지난 4월 21일 이영렬 전 서울중앙지검장·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이 저녁식사 자리에서 격려금을 주고받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또다시 문제가 됐다. 이른바 ‘돈봉투 만찬’으로 불리는 이날 자리에서 검사들에게 지급된 돈이 특수활동비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법무부가 배정받은 특수활동비는 약 286억원이다. 교정본부·출입국관리본부에 배정되는 활동비를 제외한 나머지가 검찰국에 들어간다.

한국납세자연맹은 국민 세금으로 집행되는 특수활동비가 어떻게 쓰이는지를 감시해온 시민단체다. 매년 기획재정부를 대상으로 ‘특수활동비의 규모와 용처를 공개하라’는 내용의 정보공개청구를 해왔다. 기획재정부는 지금까지 한 번도 특수활동비 합산 규모를 한국납세자연맹에 밝힌 적이 없다. 올해도 문의했지만 아직 답변을 받지 못한 상태다. 작년에는 “각 부처에 문의하라”는 답변이 왔다고 한다. 기획재정부의 설명대로 각 부처에 문의한다면 19개 부처에 각각 정보공개를 청구해 받아낸 자료의 금액을 합산해야 한다. 정보공개청구 하나당 일반적으로 열흘 정도가 걸린다. 중간에 정보공개를 거부하는 기관이 있다면 시간은 더 걸린다. 김선택 한국납세자연맹 회장은 전화통화에서 “이번에 공개한 자료도 지난해 국정감사 때 기재부가 윤호중 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입수해 공개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납세자연맹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6년까지 10년간 정부와 국회가 쓴 특수활동비는 8조5631억원이다. 매년 9000억원 가까운 금액을 썼다. 이 중 절반가량인 4조8000억원가량을 국정원이 썼고, 국방부는 1조7000억원, 경찰청은 1조3000억원가량을 사용했다. 법무부는 2662억원, 청와대(대통령비서실·경호실·국가안보실)는 2514억원을 썼다.

특수활동비는 박근혜 정부 들어 꾸준히 늘었다. 2012년 8441억7300만원이었던 부처 통합 특수활동비 금액은 올해 8810억6100만원까지 늘어났다. 특히 지난해 약 161억원, 올해 139억원이 증가했다. 최근 4년 새 특수활동비가 가장 많이 증가한 곳은 국세청이다. 국세청 특수활동비는 2011년 9억5400만원에서 2015년 54억4900만원으로 6배 가까이 늘었다.

문제는 기밀 유지를 핵심으로 하는 국가정보원 외에도 수많은 정부 부처들이 특수활동비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간 특수활동비를 배정받지 않았던 미래창조과학부, 국무조정실 및 국무총리비서실, 공정거래위원회에도 특수활동비가 2013년 새로 편성됐고, 2015년에는 국민안전처에도 특수활동비 예산이 신설됐다. 지난해부터는 대법원에도 3억원의 특수활동비가 새로 편성됐다.

문제는 국회

특수활동비 집행 내역이 불투명하다는 문제는 그간 여러 번 지적돼왔다. 국회의원이 특수활동비를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만 해도 여러 번이다. 지난 5·9대선에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로 나온 홍준표 전 경남지사는 2015년 5월 11일 기자회견에서 2011년 한나라당 대표 경선 자금의 출처를 설명하며 “2008년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 매달 국회 활동비로 받은 4000만~5000만원 중 남은 돈을 집사람에게 맡겨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는 홍 전 지사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을 때였다. 비슷한 시기 입법 로비 의혹으로 재판을 받은 신계륜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시절 받은 특수활동비를 자녀 유학비로 썼다고 밝혔다.

특수활동비 문제가 여러 번 지적돼왔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는 것은 국회 때문이다. 예산 심의 권한을 가진 국회 역시 약 80억원의 특수활동비를 매년 급여 외로 지급받는다. 사실상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다. 국회에서 특수활동비를 지급받는 자리는 국회의장단, 국회 상임위원장, 여야 원내대표 등이다. 국회사무처는 매달 국회 운영위원장에게 의정활동 지원비와 위원회 운영지원비 명목으로 특수활동비를 지급한다. 국회 운영위원장은 이 돈을 의정활동을 포함해 각종 경조사비와 격려금 등으로 쓰며, 상임위 간사와 원내 부대표단 등에도 배분한다.

국회는 특수활동비 유용을 근절할 대책으로 19대 국회 때 ‘국회의원윤리실천특별법안’과 ‘예산회계에관한특례법 폐지법안’(국정원 특례폐지법) 등을 발의했지만, 법안들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채 19대 국회 회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국회는 특수활동비 수령 내역과 금액을 공개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도 있었다. 대법원은 2004년 10월 “국회 특수활동비의 수령자, 수령일자, 금액을 공개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당시 판사들은 국회 특수활동비의 사용처를 비공개로 열람한 뒤 “기밀로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봤다. 하지만 당시 회기가 끝난 후 새로 구성된 18대 국회는 다시 정보공개청구를 거부해왔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을 지낸 하승수 변호사는 지난 1월 4일 국회사무처를 상대로 국회 업무추진비, 예비금, 특수활동비의 사용처와 규모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했지만 거절당했다. “특수활동비 관련 정보가 공개되면 정쟁의 소지가 있고, 국회 업무 수행에 지장이 초래된다”는 것이 답변 내용이었다. 하 변호사는 지난 4월 30일 국회 사무처를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전화통화에서 “특수활동비 문제를 개선하려면 국회가 예산을 심의할 때 제대로 감시하는 게 중요하다”며 “국회를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와 국회의 ‘짬짜미’ 앞에서 국민 세금이 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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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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