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트럼프 대통령이 전격 경질한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 (우) 러시아 내통설의 핵심인물인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photo 뉴시스
(좌) 트럼프 대통령이 전격 경질한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 (우) 러시아 내통설의 핵심인물인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photo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첫 해외순방을 가고 나니 워싱턴이 좀 조용해졌다. 트럼프 출국은 워싱턴의 핵심 뉴스 생산라인이 해외로 임시 이전한 것과 같아서 뉴스공장 굴뚝에 솟아오르던 연기가 멈췄다. 매일 트럼프에 의한, 트럼프를 위한, 트럼프의 정치에 휘둘려 마음 편한 날이 없었던 워싱턴은 ‘트럼프로부터의 휴가’를 맞았다. 특히 5월 중순의 워싱턴은 트럼프 탄핵론(論)까지 등장하며 최고조로 들끓었던 터라 트럼프의 공백은 모두에게 한숨 돌리는 기회가 됐다.

지난 1월 20일 트럼프가 취임한 이후 워싱턴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새 정부 출범 초 기조가 ‘충격과 공포’인 데다 대통령이 매일 트위터를 날리고 수시로 인터뷰를 해 폭탄 같은 말들을 쏟아내니 대변인은 해명하고 기자들은 기사를 쓰면서 해가 뜨고 졌다. 급(級)이 다른 사건이 터진 건 5월 초였다. 취임 100일을 지나면서 백악관이 좀 안정되는가 싶더니, 트럼프 대통령이 느닷없이 제임스 코미 FBI(연방수사국) 국장을 해임해버렸다.

물론 미국 대통령에겐 FBI 국장을 해임할 권한이 있다. 하지만 임기 10년인 FBI 국장을 3년 만에 자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코미는 트럼프 대선 승리의 일등공신이 아니던가. 지난해 대선일 직전 클린턴의 이메일 수사 재개를 결정함으로써 클린턴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 그런 코미를 자르면서 백악관은 리더십과 능력 부족이라는 애매한 이유를 댔다. ‘뭔가 석연치 않다’는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곧 코미 국장이 대선 때 트럼프 캠프 인사였던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러시아 내통설(說)을 조사하다가 해임됐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때부터 워싱턴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발칵 뒤집혔다.

백악관 일일 언론 브리핑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됐다. 대변인들은 죽을 힘을 다해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막아냈지만 대통령이 수시로 말을 바꾸는 통에 다음 날이 되면 할 말이 없어 쩔쩔맸다. 해명이 앞뒤가 안 맞으니 의혹은 더 커졌다. 상황이 수습이 안 되자 백악관 참모들에 대한 트럼프의 불만도 커졌다. 스파이서 대변인도 곧 잘릴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트럼프는 2주에 한 번씩 직접 언론 브리핑을 하겠다고까지 했다.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은 미국 입장에서 극도로 민감하고 자존심 상하는 문제다. 만일 한국 대선에 중국이나 일본이 특정 후보의 승리 또는 패배를 위해 몰래 움직인 의혹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승리한 쪽에선 이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가 없다. 지난해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을 기정사실화했다. 외교관을 추방하고 고강도 제재를 동원해 보복조치를 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에 대해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트럼프와 러시아 사이에 무엇이 있었길래?’라는 의문이 늘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떠돌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터진 트럼프의 코미 해임은 워싱턴 한복판에 정치적 핵폭탄을 던진 것처럼 파급력이 컸다. 최근 워싱턴포스트가 트럼프가 코미를 자른 다음날 러시아 외무장관과 대사를 만나 민감한 테러 관련 정보를 공유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의혹은 한층 더 커졌다. 이어 뉴욕타임스가 트럼프가 지난 2월 코미 국장을 만나 플린의 러시아 내통설에 대한 조사를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었다고 보도하자 즉각 탄핵 이야기가 나왔다. FBI 수사 중단 압력은 ‘사법방해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혼란은 트럼프와 클린턴 중 ‘덜 나쁜 후보’를 뽑아야 했던 지난해 대선에 뿌리가 있다. 대선을 치르기도 전에 트럼프와 클린턴 중 누가 대통령이 돼도 임기는 못 채울 거라고 했다. 탄핵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민주당 쪽에선 트럼프가 당선돼 유세 중 했던 무리한 공약을 실현하려 한다면 탄핵밖에 답이 없다고 했다. 공화당은 클린턴이 당선되면 탄핵을 밀어붙일 기세였다. 국무장관 시절 개인 이메일을 사용한 것이나 남편이 만든 클린턴 재단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다 탄핵감이라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취임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아 탄핵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워싱턴 기득권과 트럼프의 싸움

한국에서 날아오는 질문은 “그래서 트럼프가 탄핵될 것 같으냐”이다. 탄핵 이야기는 많이 나온다. ‘사법방해’나 ‘은폐기도’ 등은 닉슨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연상시키는 것도 맞다. 일부 의원들이 정식으로 탄핵을 거론했고 뉴스 채널을 보면 패널들이 나와서 탄핵을 이야기한다. 백악관에서도 대비에 들어갔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이제 막 특검이 결정됐을 뿐이다. 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탄핵부터 말하기는 이르다. 미국 역사의 탄핵 사례를 보면 실제로 탄핵이 결정되기 직전 단계까지 가는 데 2~4년이 걸렸다. 일부 전문가들은 정보 확산과 유통의 속도와 양 등을 생각할 때 이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리 이루어질 수 있다고 전망하기도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지 이제 넉 달이 막 지났을 뿐이다. 지금 워싱턴에 터질 듯 차오른 이 긴장감은 워싱턴 기득권 세력과 트럼프의 싸움처럼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혁신적인 정치인이다. 지난 여름부터 관찰해온 트럼프는 ‘게임의 룰’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바꾸는 사람이다. 기존 대선의 법칙을 그대로 따랐다면 그는 진작에 낙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직진’과 ‘정면돌파’로 승부를 걸어 백악관까지 왔다.

성공의 법칙은 반드시 배반한다고 했던가. 선거는 선거, 통치는 통치다. 통치가 필요한 시기에 트럼프는 여전히 유세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이미 이겼는데 또 이기려고 한다. 지난 4월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에서 있었던 취임 100일 기념 행사에서 본 트럼프는 여전히 선거유세 모드였다. 지지자들의 환호에 기를 받으며 행복해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워싱턴을 움직일 순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코미를 만났을 때 대화를 담은 ‘녹음 테이프’가 있는 것처럼 위협했다가 오히려 당시 면담을 기록한 코미의 메모 반격에 타격을 입었다. 워싱턴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인과 관료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의 정치적·법적 의미를 계산하고 대중의 눈으로 재해석할 줄 안다. 치밀하고 정교하다. 코미 전 국장이 그렇고, 특검에 임명된 로버트 뮬러 전 FBI 국장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백악관과 정부 안에는 트럼프가 대통령답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언제든 언론에 이를 흘려줄 ‘내부자’들이 있다. 의원들은 내년 중간선거에 대비해 트럼프와의 관계를 설정하려 할 것이다.

트럼프의 가장 큰 적은 트럼프다. 트럼프가 해외순방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복귀하면 코미 FBI 국장 해임으로 시작된 이 싸움이 다시 불붙을 것이다. 올해 워싱턴의 여름은 더 더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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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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