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오른쪽) ⓒphoto 바이두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오른쪽) ⓒphoto 바이두

중국 관영매체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23일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사실을 전하면서 “문재인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사이의 교우(交友)관계는 ‘금란지교(金蘭之交)’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호평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드(THAAD)의 한국 배치 결정을 발표하기 전 박 대통령을 “펑유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를 읽고 아버지 잃은 슬픔을 극복한 지도자”라고 극찬하다가 사드 배치 발표 이후에는 태도를 180도 바꾸어 “미국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는 자세를 취했었다. 이해찬 중국특사가 전하는 내용을 보면 일단 문재인 대통령이 사드 배치를 철회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중국 관영매체들이 문 대통령을 호평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문 대통령이 사드 배치를 추인할 경우 중국 관영매체들의 태도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속편(續篇)의 평가를 문 대통령에게도 내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관영매체들의 보도 기준은 “우리 중국공산당이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총과 붓(槍干子和筆干子)을 모두 쥐고 있어야 한다”고 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시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이익이 최고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중국 관영매체들의 태도 바꾸기는 자본주의의 상업성 짙은 언론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중국 관영매체들이 문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의 관계를 ‘금란지교’라고 평가한 것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의 관계를 금란지교라고 평가한 이후 한국인에 대해서는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금란지교’란 주역(周易)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 친구 사이의 관계가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관계’일 때 쓰는 표현이다. 주역은 금란지교를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해서 그 단단하기가 쇠를 끊을 정도이고,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말씀은 난초 향기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嗅如蘭)”고 설명하고 있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금란지교는 “태어난 것은 동년 동월 동일이 아니지만, 죽는 것은 동년 동월 동일에 함께하기를 바라는 관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 관영매체들이 ‘금란지교’를 이룬 것으로 평가하는 저우언라이 전 총리와 덩샤오핑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20세기 최고의 진정한 교우관계”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鄧樸方)이 중국공산당 당사(黨史) 편찬 때 증언한 바에 따르면, 1898년생인 저우언라이와 1904년생으로 여섯 살 아래였던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가 1920년 11월 프랑스 유학을 위해 파리에 도착하고 덩샤오핑이 한 달 앞서 파리에 도착한 이래 한 집에서 같이 거주하며 평생을 같이했던 친구 사이였다. 1923년 파리에서 중국 청년들이 청년공산당 파리지부를 결성해서 첫 대표대회를 개최했을 때 저우언라이가 서기로 당선됐고 덩샤오핑은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당시 덩샤오핑은 ‘소년’ ‘적광(赤光)’ 등의 공산주의 선전 간행물의 발행을 담당하면서 물과 빵이 전부인 식사를 저우언라이와 함께하며 동고동락하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을 때 저우언라이는 총리, 덩샤오핑은 저우 총리를 보좌하는 부총리 직무를 맡았고, 이 관계는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될 때까지 지속됐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미움을 사 ‘주자파(走資派)’로 낙인이 찍혀 장시(江西)성 등지의 벽지로 유배되는 생활을 해야 했는데 당시 저우언라이는 베이징(北京) 권좌의 소식을 비밀리에 전해주면서 덩샤오핑이 살아있을 수 있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지방 벽지로 유배간 중국 정치인 대부분이 폐렴 등으로 사망했으나, 덩샤오핑은 60살이 넘은 나이에 트랙터 공장에서 나사 깎는 일을 하면서도 집 주변에 산책로가 새로 만들어질 정도로 걷고 또 걸으며 건강을 유지했다. 그런 덩샤오핑에게 저우언라이는 “마오 주석이 아직도 너에 대한 언사가 곱지 않으니 말조심 하라”는 등의 전갈을 보냈다. 때로는 비밀리에 베이징으로 불러서 닭고기를 먹이며 영양실조를 막아주기도 했다. 당시 저우언라이의 덩샤오핑 보호는 마오 주석에게 알려질 경우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지만 덩샤오핑을 향한 저우언라이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1976년 1월 저우 총리가 78세로 세상을 떠나자 덩샤오핑은 베이징으로 복귀해서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저우 사망을 애도하는 베이징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자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의해 시위의 배후인물로 찍혀 또다시 유배되는 고난을 겪었다. 덩샤오핑은 1976년 9월 마오가 사망하자 마오의 ‘바지 후계자’ 화궈펑(華國鋒)으로부터 당권을 빼앗아 중국의 개혁개방 시대를 여는 총설계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 사회주의 사회의 완성을 추구하던 마오쩌둥의 이상주의 때문에 피폐해진 중국 경제에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 도입이라는 현실주의를 택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는 저우언라이가 덩샤오핑의 목숨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으면 시작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노무현·문재인 ‘금란지교’의 공적(公敵)이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8년 동안 권좌에 앉아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면, 함께 프랑스 유학을 한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금란지교’의 공적은 1949년 10월부터 1976년 9월까지 27년 동안 중국의 최고 권좌에 앉아 중국을 가난에 빠뜨린 마오쩌둥이었다. 노무현과 문재인 두 사람이 금란지교를 이루며 정치에 뛰어든 배경에는 박정희라는 거물을 넘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동심이 있었다면,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라는 사회주의 원칙론자가 중국을 가난에 빠뜨린 것을 고치기 위해 금란지교를 쌓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미·중 관계를 모순의 강에 빠뜨린 사드 한국 배치를 과연 솔로몬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거기에 실패할 경우 문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을 금란지교로 평가했던 중국 관영매체들의 호평은 얼마 안 가 표변할 것이 뻔한 상황이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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