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지난 5월 31일, 이화여대는 131주년 기념식 자리에서 김혜숙(63) 교수를 16대 총장으로 맞았다. 미래라이프대학(평생교육단과대학) 사태와 정유라 입학비리 사건이 불거지면서 최경희 총장이 사퇴한 지 7개월여 만이었다. 이화여대 역사상 최초로 교수·학생·직원·동문의 4자 협의체가 참여해 전체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에서 김 총장은 학생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당선됐다. 학생 유효투표수 9835표 중 무려 9384표(95.4%)를 얻었다. 취임식장에서 김 총장을 향한 학생들의 환호는 대단했다.

그간 이화여대가 입은 상처는 넓고 깊다. 한국 여성 인재의 산실(産室)로서 자부심에 금이 갔고, 최경희 전 총장을 포함 교수진이 무더기로 구속되면서 학교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 지난해 7월 말에 터진 본관 점거사건 이후 10개월간 학사운영은 정상적이지 않았고 그로 인한 공백은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상태다.

이화여대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에는 우려와 기대가 섞여 있다. ‘131년 이화여대 역사상 최대의 고비’라는 걱정 어린 시선이 있는가 하면 ‘깨어 있는 학생들이 일궈낸 큰 변화’라는 박수와 응원의 시선도 있다. 이화여대는 과연 이 고비를 잘 극복해 제2의 도약을 이룩할 수 있을까.

최영희(78) 명예교수에게 이화여대 사태의 본질과 해법을 물었다. 최 교수는 한국 간호학계의 대모(代母)이자, 한국 여성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굵직한 역할을 해왔다. 이화여대에는 1970년에 간호학과 교수로 부임해 2000년 16대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을 맡기 전까지 30년간 봉직했다. 국회의원을 지내면서는 남녀 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제정과 군 가산점 폐지에 앞장서는가 하면, ‘친양자제도’를 대표 발의했다. 공직에서 일정 인원을 여성에게 배분하는 ‘여성할당제’ 확립의 중추적 역할도 그가 했다.

최 교수와의 인터뷰는 세 차례 이뤄졌다. 인터뷰 약속차 전화했을 때 전화 인터뷰로 한 번, 목동 자택 근처 커피숍에서 또 한 번, 그리고 전화로 보충 인터뷰 또 한 번. “학교를 떠난 지 오래돼서 학교 사정을 잘 몰라요”라는 말과 달리 그는 이번 사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신문에 나온 이화여대 관련 소식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학교 관계자와 제자들과도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학교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 이번 총장 선거에 참여하셨다고 들었다. “동문 자격으로 총장 투표권이 있다고 연락을 받았다. 총장 후보 정견 발표장에는 아쉽게도 못 갔다. 출마의 변을 보니 김혜숙 총장이 가장 예리하게 썼더라. 선거 당일 아침에 일찍 투표장에 갔다. 학생들과 교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줄 알았는데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투표가 인상적이었다.”

- 총장 직선제를 하면서 동문과 학생에게 투표권을 준 국내 최초의 사례인데.(학내 구성원별 투표반영 비율은 각각 전임교원 77.5%, 직원 12%, 학생 8.5%, 동문 2%였다.) “동문과 학생의 투표권은 상징성을 지녔다. 그들을 대변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양성을 포용한다는 의미다. 과거 김선욱 총장 선출 당시에도 학생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향후 고려해 볼 문제라며 반영하지는 않았다. 총장 선거 방식은 시류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한때 교수 직선제였다가 이런저런 폐해가 드러나면서 간선제로 바뀌었다. 이화여대뿐 아니라 다른 사립대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번에 행한 4자 합의체에 의한 총장 직선제는 또 다른 시대적 흐름이라고 본다. 총장 직선제가 최선이냐 아니냐, 옳으냐 아니냐의 여부는 별개다. 이 제도가 확산되는 것이 반드시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화에서 시작한 총장 직선제가 또 다른 민주적 절차를 확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 이사회의 권한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이화여대는 다른 대학에 비해 이사회가 권력 행사를 하지 않는 편이다. 30년간 교수로 있으면서 이화여대에 이사회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이사회의 전횡 문제가 심각한 사립대들이 꽤 있지만 이화여대는 그렇지 않다. 뒤에서 지원만 하고 학교 일에 간여를 안 하는 편이다. 행정이 민주화돼 있고, 자율 속에서 질서가 있다.”

- 이런 사태가 왜 터졌을까. “보통 사람들은 이화여대가 바닥에 떨어졌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위기는 위기다. 그러나 왜 이런 위기가 닥쳤는지 가만히 따져 보면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최재천 교수가 칼럼(3월 14일자 조선일보·‘여성 대통령’)에 쓴 대로 이번 민주혁명이 이화여대생의 혜안과 용기에서 비롯됐다는 데에 동의한다. 나비의 날갯짓이 이화에서 시작됐다.”

- 시민 민주주의의 일환으로 보는 건가. “그렇다. 이화에서 사회정의 문제를 고발하지 않았다면 촛불시위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화의 정신이 촛불의 동력이 된 것은 분명하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학생과 학부모들이 얼마나 고생하나. 그런데 부모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입학한 정유라를 보면서 심정이 어땠겠나. 공정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분노가 컸다. 나중에 정치인들이 참여하면서 애초의 촛불정신이 흐려진 느낌은 있다.”

- 이화여대가 국정농단의 희생양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그런 면이 없지 않다고 본다. 깜깜한 권력구조 안에서 일어난 국정농단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데에는 정유라의 입학비리 사건이 시발점이 됐다. 정유라 사건은 그동안 아무리 캐도 장막 뒤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국정농단 사건의 작고 투명한 구멍이었다. 다른 사건에서는 잘 숨겨져 파헤치기 어려웠지만 이화대학에서는 들여다보기 쉬웠다. 다른 곳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이화가 국정농단 규명의 표적이 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이화가 그만큼 썩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화에서 터져서 불행했지만 이화에서 터져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난 5월 31일 취임식을 마친 김혜숙 이화여대 신임총장이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photo 연합
지난 5월 31일 취임식을 마친 김혜숙 이화여대 신임총장이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photo 연합

- 다행이라니. “이화는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이 있다. 불의에 눈감지 않는 용기 있는 소수가 사회정의를 위해 고발했고, 그 움직임이 큰 변화를 이끌어냈다. 조용한 가운데에서 큰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낸 이화가 자랑스럽다. 이화대학은 규범과 질서가 엄격하다. 체육특기생 특혜입학 문제는 이화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관행처럼 이어져온 측면이 크다. 물론 이화에 대한 사회의 신뢰를 저버리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측면에 대해서는 면목이 없다. 학사비리로 불거진 이화의 사태를 단기간에 수습해보려 힘을 모았지만 국정농단을 파헤치기 위해 이화에 쏟아지는 언론의 포커스를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 같다.”

- 일부 교수들이 권력에 부역하는 모습을 보면서 심경이 어땠나. “부끄러웠다. 너무나 참담한 심정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이 부분은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명백한 잘못이다. 교수가 학생의 리포트를 대신 써주도록 한 건 이화대학 전체를 창피하게 만드는 거다. 이 생각만 하면 마음이 무너지는 듯하다. 하지만 이화를 잘 아는 입장에서 이화가 무너질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 그 확신을 갖게 한 이화여대의 저력은 뭔가. “이화 구성원은 사사로운 욕심이 없다. 이화의 가치를 공유하고, 암묵적인 동의하에 움직여왔다. 이번 사태도 그렇다. 사회정의를 고발하는 소수의 학생이 있었고, 그런 학생이 경찰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고 잘못됐다는 교수들이 있었고, 정유라의 교육비리 사태가 터지면서 졸업생과 동창들이 힘을 보탰고, 결국 최 총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의견이 달라 갈등과 대립은 있었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사회정의 실현으로 중지가 모아졌다. 단계마다 양보와 타협이 없었으면 이렇게 해결되기 힘들었을 거다. 상처는 입었지만 큰 의미에서 발전적인 이화가 됐다고 본다. 구성원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욕심 없이 선(善)을 이루어냈다.”

- 시발점이 된 미래라이프대학 문제는 어떻게 보나. “이화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의 문제에서 갈등을 일으킨 사건이었다고 본다. 이화가 교육부의 미래라이프대학 지원사업에 선정되었는데 이를 두고 이화가 지향하는 방향과 맞지 않는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교무회의를 통과했다는 건 절차상 하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학내 구성원 간 소통과 공감대 형성이 부족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상세한 내막까지는 잘 모르겠다. 결국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계획은 백지화됐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나 또한 미래라이프대학은 이화가 지향하는 방향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그러면 이화가 지향하는, 지향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이화는 우수한 여성 인재를 배출하는 산실이다. 수월성 교육에 집중하는 학문의 전당이 되어야 한다.”

- 일각에서는 학벌 이기주의는 이화의 설립 취지에 어긋난다고 지적한다. 설립 당시 이화는 배움 앞에서는 평등해야 한다며 노비의 딸도 받아들였다. “물론 그런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다르다. 평생교육원을 별도로 두는 건 몰라도 정규 학사조직에 편입시키는 건 문제가 있다. 현재 한국의 민주교육제도에는 교육사다리가 다양하게 갖춰져 있다. 2년제 대학에서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할 수도 있고, 평생교육원 학점이 일반대학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 이화가 개교한 초창기에는 교육 기회가 적었으나 지금은 달라졌다.”

- 새 총장에게 동문으로서 바라는 점이 있다면. “각 대학은 사회 발전에 부합하는 시대적 요구가 있었고, 이화도 발전의 도상에서 각 총장이 그 역할을 했다. 김활란 총장은 이화의 기초를 닦았고, 김옥길 총장은 내실을 다졌으며, 윤후정 총장은 여자대학 최초로 공과대학을 신설하는 등 우수인재 양성에 힘썼다. 김혜숙 총장에게 주어진 시대적 요구는 민주교육 시스템을 확장시키는 거다. 김혜숙 총장은 교수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이번 사태에서 김 총장이 앞장서서 학내 구성원 간 민주적 합의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비교적 순조롭게 수습된 것 같다. 김 총장이 교수와 학생 측의 의견을 잘 수용해왔다고 본다. 앞으로도 열린 마음으로 구성원 간 의사소통을 하고, 민주적 교육행정 시스템을 잘 갖추어 이화를 합리적으로 발전시킬 것이라 믿는다. ”

- 김혜숙 총장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는 무엇일까. “김혜숙 총장이 어깨가 많이 무거울 것 같다. 우선 상처 입은 이화를 잘 보듬는 것이 먼저인 듯 보인다. 더 욕심을 부리자면 대내적 민주행정도 중요하지만 대외적 측면도 중요하다. 대내적으로는 잘하리라 믿고, 대외적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더욱 활발해지고 학교 재정이 한층 탄탄해지도록 힘써주면 좋겠다. 여성의 권익이 많이 신장되었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여성들에게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있다. 우수한 여성인력이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한국 여성대학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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