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8일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 보좌관 회의. ⓒphoto 뉴시스
지난 6월 8일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 보좌관 회의. ⓒphoto 뉴시스

파죽지세(破竹之勢),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를 단번에 쪼개는 기세.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면서 말 그대로 파죽지세의 기세로 개혁의 드라이브를 걸었다. 과거의 적폐들을 일거에 척결하겠다는 무서운 기세에 모두가 목을 움츠렸다. 문 대통령은 취임 첫날 ‘1호 업무지시’로 일자리위원회 구성을 지시했다. 그날부터 하루 건너 하나씩 업무지시가 쏟아져 나왔다. 국정교과서 폐지, 검찰의 돈봉투 만찬 감찰, 4대강 감사 지시 등등 숨 쉴 틈이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삐끗하는 느낌을 준다. 이낙연 국무총리 인준을 둘러싼 논란이 단초였다. 이후 사드 배치를 두고 벌어지는 혼란과 미국과의 갈등, 또 문 대통령의 ‘6·15 제안’을 둘러싼 미국과의 충돌 조짐 등 악재의 연속이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대통령비서실이 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통령비서실은 국가운영의 CPU(중앙처리장치) 같은 존재다. 만에 하나 대통령비서실의 기능에 문제가 있거나 무엇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문제일 수밖에 없다.

만기친람과 호가호위

“청와대 참모는 연습하는 자리가 아니다.” 김대중 정부의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중권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의 말이다. 김 전 대표는 민정당(민자당) 3선 국회의원으로 노태우 정부 시절 장관급 정무수석을 지낸 보수 인사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런 그를 초대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국가경영의 경험이 부족했던 김대중 정부로서는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해서 보수정권 인물의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의 첫 ‘빅3’는 김종필 국무총리-이종찬 국정원장-김중권 비서실장, 이렇게 모두가 보수정권의 핵심적 위치에서 국가경영을 해봤던 인물들로 채워졌다.

김 전 대표는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들은 그야말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 즉 최고 중에 최고가 맡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복잡다기한 사안들이 즐비한 국정운영에서 최종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물론 내각의 국무총리와 각부 장관들이 상당 부분을 거르지만, 결국 대통령에게 판단을 구하고 결심이 필요한 사항은 각 부처, 각 부문 간에 갈등의 소지가 있는 사안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참모들도 자신들이 최후의 보루라는 각오로 업무에 임해야 한다.

“비서가 생각은 무슨 생각….”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사령탑이었던 김학렬 경제부총리의 일화다. 한번은 박 대통령과 김학렬 부총리가 경제정책을 두고 숙의를 하고 있었다. 그때 배석해 있던 경제수석이 “제 생각에는…” 하고 끼어들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때 김 부총리가 대통령 면전에서 경제수석에게 면박을 준 것이다. 김학렬 부총리의 전설 같은 이 일화는 청와대와 내각의 관계, 다시 말해서 책임총리·책임장관이 가능한가, 또 청와대비서실이 너무 비대해지면 자칫 비서정치가 횡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 대통령 집권 당시에는 청와대비서실의 힘이 지금과 같이 크지 않았다. 정치는 중앙정보부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도맡다시피 했다. 또 대통령이 직접 내각을 통해 경제를 비롯한 여타의 정책을 챙겼기 때문에 청와대비서실의 역할은 현 문재인 정부의 정책실 역할을 하는 정도였다. 청와대 비서실의 기능이 강화된 것은 노태우 정부에서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대통령프로젝트로 ‘북방정책’을 설정했다. 그리고 북방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청와대비서실 내에 정책보좌관실을 설치하고 박철언 정책보좌관으로 하여금 북방정책을 전담하게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는 비서실장-정책실장-안보실장의 삼각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상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와 비슷한 구조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를 비서실과 정책실로 나누고, 국정의 주요과제를 총괄하는 역할을 정책실에 맡기고 비서실은 그야말로 비서의 역할로 국한했다. 물론 이 같은 이원화(삼원화)의 시스템에도 장점은 있다. 하지만 자칫하면 권한의 영역과 책임의 소재가 불투명해진다는 약점도 있다. 요즘과 같이 안보 문제가 결국은 국내 정치, 경제 문제 등과 다 연계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더욱이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참모진 구성이, 비서실은 노무현 대통령 당시 문재인 수석(실장)과 함께 일했던 인물, 정책실은 주로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출신, 그리고 안보실은 이른바 ‘자주파’가 장악하다 보니, 과잉충성과 집단사고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권위적으로 변하는 풍토

지난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치고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날 오후 문 대통령은 직접 기자들 앞에 섰다.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 그리고 서훈 국정원장 후보자의 인선을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의 ‘빅3’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언론의 눈은 임종석 비서실장에 쏠렸다. 사실 임 실장은 지난해 10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캠프인 ‘광흥창팀’에 합류하기 전까지만 해도 박원순 서울시장 사람으로 분류되었던 인사다.

지난 5월 26일 임종석 실장은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의 ‘위장전입’ 문제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수차례 공언해온 ‘공직배제 5대 비리’와 관련하여 ‘빵 한 조각, 닭 한 마리의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국민들의 양해를 요청했다. 야당은 발끈했다. 후보자를 발표할 때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생색을 내면서 사과는 비서실장이 대신하느냐고 힐난했다.

지난 6월 20일 임 실장이 다시 언론 앞에 나섰다. 문재인 정부의 인사난맥을 두고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조국 민정수석의 출석을 둘러싸고 여야가 고성과 막말로 충돌하는 와중이었다. 임 실장은 “인사검증은 비서실장의 책임이며 특정 수석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했다. 비슷한 시각 전병헌 정무수석이 정세균 국회의장을 찾았다. 전날 정 의장이 “청문회가 참고용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며 청와대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자, 전 수석이 부랴부랴 국회의장을 찾아 고개를 조아린 것이다.

임종석 실장이나 전병헌 정무수석이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나서는 것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 문재인 청와대의 행태를 보면 과거 정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직접 사과하는 모습을 극구 피하려 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직접 말해야 할 사안을 수석비서관회의를 통해서 남의 말 하듯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박 전 대통령이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한다고 비판했다. 지금 청와대 참모진들도 혹시 관행이란 이름으로 과거의 퇴행적 자세로 문재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