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즈화 상하이 화동사범대 교수
선즈화 상하이 화동사범대 교수

선즈화(沈志華·67) 교수는 상하이 화동사범대 소속의 저명 역사학자다. 주로 중국과 소련, 중국과 북한의 현대사를 연구해왔다. 중국 내에서는 가장 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년에 들어서는 주로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 사이의 갈등사를 연구해왔다. 그는 1999년에 ‘중·소 동맹과 조선전쟁 연구’, 2009년에는 ‘마오쩌둥, 스탈린과 조선전쟁 연구’, 2015년에 ‘1948~1960년 중국 속의 소련 전문가들’이란 책을 출판했다.

선즈화 교수가 8월 초 중국과 북한의 1950년대 갈등을 다룬 ‘최후의 천조(天朝): 마오쩌둥, 김일성과 1945~1976년 중·조(中朝) 관계’란 책을 홍콩 중문대학출판부에서 냈다. 중국 내 사정에 밝은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중·조 관계의 역사적 진상을 복원해놓았다’는 제목으로 이 책을 소개했다.

“당대 중국과 조선 관계는 조선전쟁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온 ‘천조(天朝) 관계’, 다시 말해 천자국과 주변국가 관계에 영향을 받았으며,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에는 같은 사회주의 진영 내에 속해 있으면서 소국을 이끄는 대국으로서 중국이 조선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원칙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또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는 크게 보아 중국과 소련 사이의 사회주의 주도권 다툼이 배경에 작용하고 있으며 “마오쩌둥은 폴란드와 헝가리 사태를 겪으면서 소련이 수정주의의 길로 들어섰다고 판단하고, 원래는 아시아의 사회주의 주도국으로서의 지위만 확보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전 세계의 사회주의 주도국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중국과 북한 관계에 영향을 미쳐 불간섭주의 색깔이 짙어지게 됐다”고 아주주간은 설명했다.

선즈화 교수는 이 책의 출판과 관련 아주주간과 인터뷰를 갖고 “1956년 8월 김일성이 친중 노선의 연안파(延安派)를 숙청할 때 중국은 수동적으로 지켜보기만 했으며 최근 김정은이 친중 노선의 장성택 일파를 숙청할 때도 중국은 수동적으로 지켜보기만 했는데 역사적으로 북한 내부의 친중파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시대에 전 세계 사회주의 국가들의 리더가 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소련이 폴란드와 헝가리에 무력 개입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중국은 북한을 포함한 주변국에 대해 내정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는 바람에 1956년 북한 김일성이 연안파를 숙청할 때 수동적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선즈화 교수는 “1956년 8월의 연안파 숙청과 최근 김정은의 장성택 숙청은 서로 다른 사건”이라며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때 중국의 지도자는 마오쩌둥이었지만, 김정은의 장성택 숙청 때 중국 지도자는 현 당 총서기 시진핑으로, 김정은의 장성택 숙청 때 당연히 화가 났을 것인데 아무 대처도 하지 않은 데 대해서는 나도 이해하기 힘들다. 중국 지도자들이 북한 내부 사정에 대해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선즈화 교수는 자신의 저서 ‘최후의 천조: 마오쩌둥, 김일성과 1945~1976년 중·조 관계’에서 1950년 6월 25일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중국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면서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의 명령으로 국민당 최대의 저항세력인 대만 지역에 대한 수복을 목표로 수십만의 군사들을 대만섬 건너편에 집결해 두고 있었다. 당시 대만섬으로 패퇴한 장제스(蔣介石)는 죽음을 각오하고 공산당군의 공격을 막아낼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남한을 침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장제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측근들에게 했다. “이는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증거다.” 장제스는 손에 들고 있던 닭수프 그릇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조선이 마오에게 참전을 요청하건 말건 마오는 참전할 것이 분명하다.… 대륙의 조선전쟁 참전은 곧바로 우리를 공격할 여력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세계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리더로 군림하려 하는 마오쩌둥의 생각을 정확히 읽고 있던 장제스는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중국공산당의 참전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제3차 당 대회를 거치면서 김일성은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 작업을 시작해 전국 각지에 기념비와 초상화를 세우고 영화와 가곡, 저작 등을 통해 자신을 미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연안파의 핵심으로, 한국전쟁 초기에 베이징(北京)에 주재하면서 마오쩌둥과 김일성 사이를 연결했던 이상조는 “조선 인민 혁명 박물관이 김일성의 개인 역사박물관으로 변했다”는 보고를 베이징으로 했고, 이에 대응해서 김일성은 이상조와 또 다른 연안파의 거두로 황푸군관학교 출신인 최용건을 ‘반당집단’으로 규정해 숙청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잡은 직후인 1978년 9월 덩샤오핑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덩샤오핑은 김일성이 개인숭배를 위해 거대한 금빛 동상을 세워놓은 것을 보고 “이 동상 세우는 데 우리가 원조한 인민폐가 얼마나 들어갔을까”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나중에 귀국해서 “더 이상 조선에 대한 원조를 늘리지 말 것”을 지시했다는 일화도 선즈화 교수의 ‘최후의 천조’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김일성의 개인숭배 조장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못했으며, 북한은 경제적으로도 중국이 주문하는 개혁 작업에 나서지 않았다. 이는 중국을 대신해서 미국과 싸우는 역할을 해주면 중국은 꼼짝 못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김일성이 북한의 가장 주요한 전략을 반미(反美)로 표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선즈화 교수는 하고 있다. 선즈화 교수의 저서는 우리 외교와 통일 분야 당국자들이 꼭 읽어 봐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