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총서기와 왕치산 기율위 서기(왼쪽). ⓒphoto 바이두
시진핑 총서기와 왕치산 기율위 서기(왼쪽). ⓒphoto 바이두

‘디리(砥砺)’. “숫돌에 칼을 갈듯 연마하다”라는 뜻을 가진 어려운 말이다. ‘디리펀진(奮進)의 5년’이라면 “숫돌에 칼을 갈듯 단련하며 달려온 지난 5년”이라는 뜻이 된다. 지난 9월 20일 베이징(北京) 시각으로 저녁 7시(한국시각 저녁 8시) 매일 한 차례씩 전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중국 관영 중앙TV의 네트워크 뉴스 ‘신원롄보(新聞聯播)’는 ‘시진핑(習近平) 총서기의 촉구로 디리펀진하며 달려온 지난 5년’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의 첫 번째 경제특구 선전(深圳)의 발전상을 소개했다.

공교롭게도 이날의 신원롄보는 때마침 베이징을 방문한 리셴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를 시진핑과 리커창(李克强)을 비롯한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당내 서열 순으로 차례로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원롄보는 중국 내 뉴스 흐름을 리드하는 뉴스 프로그램이자, 14억 전체 인민을 대상으로 하는 비중 있는 뉴스만을 다루는 프로그램으로 유명하다. 이런 프로그램이 시진핑 총서기가 지난 2012년 11월 제18차 당 대회에서 총서기에 선출된 이후 집권한 기간을 “디리펀진의 5년”이라는 표현과 함께 소개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중대한 의미가 깔려 있음을 중국을 관찰해온 사람들이라면 감지했을 것이다.

더구나 시진핑 당 총서기가 오는 10월 18일 제19차 당 대회까지 지난 5년간 달려온 과정을 “숫돌에 칼을 갈듯 단련해온”이라고 표현하기 시작한 날 베이징을 방문한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를 8700만 중국공산당원을 이끄는 핵심 권력인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차례로 만나는 모습은,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가 아버지 리광야오(李光耀) 총리에 이어 싱가포르를 성공적으로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인 시청자들에게 부각시키기 위한 뉴스라는 점을 짐작게 했다.

더 나아가 중국 시청자들은 이 뉴스를 오는 10월 18일 개막되는 제19차 당 대회에서 나이 제한에 걸려 퇴진해야 하는 왕치산(王岐山)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의 유임과 총리직 담당을 희망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왕치산은 이번 당 대회에서 새로운 5년 임기의 당 총서기로 선출될 예정인 시진핑 당 총서기의 오른팔로, 그동안 시진핑의 반(反)부패운동을 사실상 전담해서 추진해왔다. 그런 그를 시진핑이 유임시키고 싶어 한다는 강력한 희망의 뜻을 표현한 뉴스라는 것이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에 관한 뉴스는 그 다음날부터 사라졌지만 ‘디리펀진의 5년’이라는 시진핑 띄우기 뉴스는 그 이후 10월 11일 저녁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방영됐다. 예컨대 9월 21일 신원롄보 톱뉴스는 ‘디리펀진의 5년’이라는 제목으로 시진핑 총서기가 당위원회 서기를 지낸 푸젠(福建)성의 빠른 발전상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9월 22일에는 같은 제목으로 다가오는 10월 18일의 제19차 당 대회를 기다린다는 뉴스가 중국 전역으로 전파를 타고 퍼져나갔다.

9월 25일에는 시진핑과 리커창을 비롯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베이징 전람관(展覽館)에서 개막한 ‘디리펀진의 5년’이라는 전시회를 참관하는 광경이 신원롄보의 톱뉴스였다. 그날 관영 신화통신도 ‘시진핑 총서기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계속 분투해왔다’는 제목을 달아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디리펀진의 5년’이라는 전시회를 관람한 소식을 보도했다.

홍콩과 일본 언론들이 이번 당 대회를 통해 시진핑이 새로운 5년 임기의 당 총서기로 선출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오는 2022년의 제20차 당 대회 이후까지 권력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할 것이라고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신원롄보의 그런 보도 태도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10월 1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68주년 국경절(國慶節)을 기리는 사설을 통해 신원롄보의 그런 들뜬 보도 태도에 일침을 가했다. 이날 인민일보는 “오늘의 중국이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목표에 근접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로 자만(自滿)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위대한 역정은 이제 막 시작됐으며, 위대한 승리는 아직도 여전히 우리의 앞날에 달려 있다”고 촉구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990년대 초에도 개혁파의 리더 덩샤오핑(鄧小平)과 보수파 경제이론가로 덩샤오핑의 오랜 경쟁자였던 천윈(陳雲)과의 갈등에서 보수파의 손을 들어주는 태도를 보여줬다. 지나치게 빠른 경제발전은 사회주의의 틀을 파괴한다는 천윈의 주장을 지지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었다. 당시의 갈등에서 덩샤오핑은 자신의 개혁개방 정책의 수혜자였던 상하이(上海)와 남부 광둥성의 경제특구들을 돌며 현지 신문들이 인민일보의 논조에 반대하는 ‘무엇이 두려운가, 기회를 잡았을 때 발전해나가자’는 사설을 쓰도록 독려했고 결국 여론전에서 이겼다. 경제특구 신문들의 논조가 인민일보를 압도하게 하는 정치력을 발휘한 것이다. 결국 덩샤오핑은 나중에 베이징으로 귀환한 후 인민일보 논설 지휘부를 교체하는 수술을 단행했다.

이번 10월 1일자 인민일보의 사설 후반부는 시진핑을 비롯한 현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지난 5년간의 업적에 너무 자만하지 말고 정치적인 틀을 깨거나 파격을 단행하는 결정들을 내리지 말도록 경고한 것으로 보인다. 10월 18일의 제19차 당 대회를 앞두고 시진핑의 새로운 임기나 직위 설정, 지난 35년간의 정치 규칙을 깨고 왕치산을 유임하는 결정들이 과연 이루어질지 10월 18일의 시진핑 공작보고 내용을 보아야만 알 수 있게 된 형세라고 할 수 있다. 열흘에서 2주 정도 개최되는 당 대회는 최종일에 발표되는 공보(公報)를 통해 새로운 임기 5년의 정치국 상무위원 면면과 약 30명의 정치국원 면면을 소개한다.

중국공산당 당 대회는 1921년 7월 제1차 대회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개최한 이후 지난 96년간 대체로 5년마다 한 차례씩 개최되는 전통을 고수해왔으며, 당 대회에서 선출되는 새로운 5년 임기의 중앙위원 300명 정도가 앞으로 매년 한 차례씩 중국의 국책을 결정하는 중앙위 전체회의를 개최하게 된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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