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5일 ‘19기 1중전회’ 직후 베이징 인민대회당 동대청에 서열 순으로 입장하는 신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7인. (왼쪽부터) 시진핑, 리커창, 리잔수, 왕양, 왕후닝, 자오러지, 한정. ⓒphoto 로이터·연합
지난 10월 25일 ‘19기 1중전회’ 직후 베이징 인민대회당 동대청에 서열 순으로 입장하는 신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7인. (왼쪽부터) 시진핑, 리커창, 리잔수, 왕양, 왕후닝, 자오러지, 한정. ⓒphoto 로이터·연합

지난 10월 25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동대청(東大廳)에서 14억 중국을 이끌 새 최고지도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발표 예정시간인 오전 11시45분(현지시각)을 조금 넘겨 시진핑이 연단에서 마실 차를 가져다둘 여성이 무대 위로 입장하자 600명에 달한 내외신 기자들이 일순 술렁였다. 예정시간을 10분가량 넘긴 11시55분 시진핑(習近平), 리커창(李克强), 리잔수(栗戰書), 왕양(汪洋), 왕후닝(王滬寧), 자오러지(趙樂際), 한정(韓正)이 새로 결정된 서열 순에 따라 동대청에 입장했다.

모습을 드러낸 신임 최고지도부 7인 가운데를 총서기 시진핑이 차지했고 나머지 6인이 서열에 따라 좌우로 도열해 내외신 기자 앞에서 데뷔무대를 가졌다. 7인 중 시진핑과 리커창은 전임 정치국 상무(常務)위원이고, 나머지 5명은 정치국원 중 새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된 사람들이다. 17대 때 시진핑, 리커창처럼 중앙위원 가운데 정치국원을 건너뛰어 정치국 상무위에 입성하는 이변은 19차 당대회 직후 열린 ‘19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19기 1중전회)’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시진핑 집권 2기 최고지도부의 특징은 모두 1950년대 이후 출생자인 ‘50허우(後)’로 채워진 점이다. 이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1950년생인 리잔수 신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고, 가장 젊은 사람은 1957년생인 자오러지 신임 중앙기율검사위 서기다.

‘60허우(後)’의 대표주자로 오래전부터 상무위 입성이 점쳐졌던 1963년생 후춘화(胡春華) 광둥성 서기와 깜짝발탁이 점쳐졌던 1960년생 천민얼(陳敏爾) 충칭시 서기는 상무위 문턱을 넘지 못하며 중남해(中南海)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이는 전전임인 장쩌민 총서기 때(14·15대) 후진타오, 전임인 후진타오 총서기(17대) 때 시진핑 같은 ‘영맨(young man)’을 상무위에 발탁해 안정적인 후계 훈련을 해왔던 기존 관례와는 다른 모습이다. 후진타오는 통역이 ‘영 우먼(young woman)’이라고 잘못 말해 장쩌민이 바로잡았을 정도로 생소한 인물이었다. 결국 5년 후인 20차 당대회 때 ‘포스트 시진핑’ 자리를 둘러싼 당내 물밑 경쟁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시진핑으로서는 집권 1기 때 자신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왕치산(王岐山) 기율검사위 서기를 상무위에 유임시키지 못한 대신, 자신의 직계를 대거 상무위에 전진배치한 것이 최대 수확으로 꼽힌다. 정치국 상무위에 새로 입성한 리잔수 전 중앙판공청 주임, 왕후닝 전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자오러지 전 중앙조직부장은 시진핑의 직계로 꼽힌다. 왕치산의 후임으로 사정작업을 이어갈 기율위 서기에도 자신의 직계인 자오러지 전 중앙조직부장을 발탁하면서 시진핑의 발언권은 집권 1기 때보다 좀 더 세지게 됐다.

시진핑의 또 다른 수확은 당장(黨章·당헌·당규)에 자신의 이름 석자가 들어간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삽입한 점이다. 중국공산당 당장에 이름이 들어간 것은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덩샤오핑에 이어 네 번째다. 또 ‘주의(主義)’보다는 한 단계 아래지만 ‘사상(思想)’으로 명명되면서 ‘마오쩌둥 사상’과 같은 반열에 올렸다. 덩샤오핑의 지도이념은 사상보다 한 단계 아래인 ‘이론(理論)’에 머문다.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각각 ‘3개 대표 중요사상’ ‘과학발전관’으로 이름 석 자가 들어가지 않는다. 다만 ‘시진핑 사상’이 아니라 덩샤오핑이 1982년 12차 당대회 개막사에서 처음 언급한 ‘중국 특색 사회주의’란 말이 군더더기처럼 삽입된 것은 지도이념의 당장 삽입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 주석 부활 무산

19차 당대회에서 당초 거론됐던 당 주석직(중공중앙주석) 부활이나, 현행 7인의 상무위를 5인 체제로 축소하는 조정은 이뤄지지 못했다.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로 화궈펑(華國鋒)이 마지막으로 보유했던 당 주석은 덩샤오핑 집권과 함께 마오쩌둥 ‘1인 독재’에 대한 반성으로 1982년 ‘12기 1중전회’ 결정으로 폐지됐다. 덩샤오핑 집권 후 당 총서기는 집단지도체제인 상무위 성원 중 하나에 불과했다. 정치국 회의 소집권은 있지만 당 주석이 가진 최종결정권은 없다. 중도퇴진한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의 사례에서 보듯이 실권을 틀어쥔 당 원로의 입김에 의해 언제든지 갈릴 수 있는 불안한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19차 당대회 때는 덩샤오핑이 폐지한 당 주석직을 새로 부활해 ‘당 주석-총서기 이원체제’로 복귀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으나 유야무야됐다.

19차 당대회는 중국공산당 후계 결정 과정의 불투명성을 또 한 번 노출했다. 중화권과 일본 언론이 당초 상무위 입성을 예상한 후춘화, 천민얼이 모두 상무위 입성에 실패하면서다. 당대회 폐막 직전인 10월 22일, 홍콩에서 발행되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만이 단독 보도를 통해 정치국 상무위에 후춘화와 천민얼 대신 왕후닝과 자오러지가 입성할 것이라고 맞혔다.

전 세계 기자들은 중국의 권부인 중남해를 둘러싼 ‘붉은 담장(紅墻)’의 높은 벽을 또 한 번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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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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