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汪洋) 신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12년 보시라이(薄熙來) 사건 때다. 덩샤오핑 집권 때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주임 덩샤오핑, 천윈)으로 원로정치를 주도한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의 아들로 태자당의 대표주자였던 보시라이는 당 총서기를 노리며 충칭에서 마오쩌둥의 극좌 노선을 표방한 사회실험을 벌였다.

반대로 보시라이의 전임 충칭시 서기이자 당시 광둥성 서기로 있던 왕양은 ‘새장을 비워 새로운 새로 바꾼다’는 뜻의 ‘등롱환조(騰籠換鳥)’론을 펴면서 온건개혁 노선을 걸어 양자 간의 노선 갈등은 주목을 끌었다. 보시라이가 아내 구카이라이의 살인사건에 휘말려 낙마하면서 왕양은 살아 남았고 결국 19차에서 정치국 상무위에 입성했다.

왕양은 1955년생으로 안후이성 쑤저우(宿州) 사람이다. 17세 때 부친을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홀어머니를 도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식품공장에서 돼지고기를 팔았다. 문화대혁명 말기인 1976년 5.7간부학교 교원을 시작으로 공직에 투신한 왕양은 줄곧 안후이성에서 근무했다.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한 왕양은 공청단 안후이성지부 선전부장과 부서기를 차례로 지냈다. 1988년에는 불과 33세의 나이로 안후이성 통링(銅陵)시장이 됐다. 당시 최연소 시장이란 뜻으로 ‘아기 시장’으로 불렸다. 왕양은 1992년 남순강화를 돌면서 ‘개혁개방의 지속’을 설파한 덩샤오핑(鄧小平)의 눈에 띄었다. 이후 38세 나이에 안후이성 부성장 자리에 올랐고, 원만한 업무처리로 주룽지 전 총리와 원자바오 전 총리의 눈에 들어 국가발전계획위원회(현 국가발전개혁위) 부주임, 국무원 부비서장으로 차례로 승진발탁됐다.

왕양을 정치적 거물로 만든 인사는 후진타오 전 총서기다. 장쩌민의 위세에 눌려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후진타오 전 총서기는 세를 보강하기 위해 지방에 대거 자파 인사들을 심었다. 안후이성 동향으로 공청단 배경을 가진 왕양은 4대 직할시인 충칭시 서기와 최대 부성(富省)인 광둥성 서기로 연이어 발탁됐다. 특히 왕양은 리창춘, 장더장 등 장쩌민계 인사가 줄곧 도맡아온 광둥성 서기로 임명되면서 중앙정치국원으로 승진해 체급을 한 단계 높였다.

리창춘, 장더장 등 전임 광둥성 서기가 모두 정치국 상무위에 입성한 터라 왕양은 5년 전인 2012년 18차 당대회 때부터 상무위 입성이 점쳐졌다. 하지만 보시라이 낙마에 따른 보수파의 집중견제로 왕양은 2012년 18차 당대회 때는 정치국원이자 국무원 부총리로 승진하는 데 머물러야 했다. 5년 후인 19차 당대회 때 상무위에 입성했으나 후진타오 계파라는 한계를 넘지 못하고 실권이 미미한 정협 주석으로 전임자인 위정성(兪正聲)의 뒤를 잇게 됐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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