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닝(王滬寧) 신임 중앙서기처 제1서기는 곧잘 삼국지에 나오는 사마의(司馬懿)에 비교된다.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친 신하라는 뜻이다. 이후 그 아들과 손자대에 조씨로부터 정권을 찬탈하는 데 성공한 대표적 모신(謀臣)이다. 왕후닝 역시 장쩌민·후진타오·시진핑 3대에 걸쳐 총서기를 보좌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대를 넘길수록 그의 정치적 비중도 커졌다. 결국 왕후닝은 성서기나 성장 같은 지방 최고책임자 경력이 단 한 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국 상무위에 입성하는 19차 당대회 최대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왕후닝은 1955년생으로 산둥성 라이저우(萊州)가 원적이다. 태어난 곳은 상하이로 어렸을 때부터 ‘책벌레’로 유명했다. 문화대혁명 때도 ‘상산하향(上山下鄕)’ 대신 집에 틀어박혀 책만 봤다고 한다. 이후 상하이사범대(현 화동사범대)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상하이시 출판국에 배속됐다. 문혁이 종료되면서 왕후닝은 푸단대 국제정치학과에 연구생(대학원생)으로 입학해 마르크스의 ‘자본론’ 연구 권위자인 천지런(陳其人) 교수 아래서 수학한다. 이후 1985년 30세에 중국에서 가장 젊은 푸단대 부교수로 임용됐고 미국 아이오와대, 캘리포니아대 방문학자를 지내는 등 정치학자로서 경력을 다졌다.

푸단대 법학원장으로 있던 왕후닝을 처음 눈여겨본 것은 쩡칭훙(曾慶紅)이었다. 장쩌민의 복심으로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있던 쩡칭훙은 1995년 푸단대 교수로 있던 왕후닝에게 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장을 맡겼다. 쩡칭훙에 의해 발탁된 왕후닝은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장으로 중국공산당이 ‘선진생산력(기업가)’을 대표한다는 ‘3개대표론’의 초안을 만들면서 중국공산당을 노동자 정당에서 대중집권 정당으로 변모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을 받는다.

왕후닝은 후진타오 집권 때는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 더욱 승진한다. 후진타오의 지도이념인 ‘과학발전관’도 왕후닝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진핑 역시 왕후닝을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 그대로 유임시켰고, 권력강화를 위해 태스크포스 형태로 발족한 중앙전면심화개혁영도소조 주임 자리를 맡겼다. 시진핑의 해외순방 때 가장 많이 동행해 늘 오른쪽에 배석한 사람도 왕후닝이다. 이때부터 왕후닝이 상무위에 입성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왕후닝은 지방 최고책임자인 지방 당 서기 경력이나, 국무원 주요 부처 수장 경력이 전무해 끝까지 상무위 입성 관측이 엇갈렸다. 하지만 이 같은 모든 약점을 극복하고 상무위에 입성해 당내 좌파 이론가로서 ‘좌왕(左王)’으로 불린 덩리췬 이후 최고위직에 올랐다. 상무위에서는 류윈산(劉雲山)의 후임으로 선전·이데올로기 부문을 관장하게 됐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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