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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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에 대한 얘기는 많은데 누가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불분명하다. 풀뿌리혁신(grassroot innovation) 기반을 만드는 게 핵심인데, 4차 산업혁명을 대기업이 하는 걸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박근혜 정부 시절 대기업이 지역별 센터를 만들었던 창조경제와 다를 바 없다.”

노무현 정부에서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낸 강철규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지난 10월 25일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소득주도성장과 함께 혁신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강 교수는 특히 “선수들은 민간에 있다”면서 민간 위주의 자생적 혁신에 방점을 찍었다. “정부가 어떤 산업을 육성·지원하는 식은 개발연대의 발상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민간에서 다양한 혁신이 쏟아져야 선진국에 안착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정부가 모든 걸 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라. 정부가 할 일과 민간이 할 일은 명확하게 구분하는 게 맞다. 사람 중심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겠다는 현 정부의 설계는 옳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그 이상을 실현할 것인지를 엄밀히 따져보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좁혀나가야 한다.”

강 교수는 자생적 혁신을 가로막고 있는 불공정한 시장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벤처와 혁신기업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기업이 진입장벽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시장에 진입하려 해도 이런 회사를 기존 기업이 가로막거나 삼켜버린다. 일부 신생업체가 시장에 진입한다 해도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로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음을 알고 낙담하기 일쑤다. 불공정하게 쌓아올린 성을 허물고 풀뿌리 혁신을 통한 창업자가 우대받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현 정부 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한다.”

강 교수는 2003년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공정거래위원장을 맡아 시장 개혁에 앞장섰다. 당시 그에게는 ‘재벌개혁 전도사’라는 별명이 있었다. 민간인 출신의 김상조 위원장은 ‘제2의 강철규’로도 불린다. 강 교수는 현재 롯데그룹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구성된 롯데경영투명성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 김상조 위원장 체제에서 기업들이 공정위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다. “정부 경제정책 기조가 기존과 달라졌기 때문에 당황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 때는 ‘비즈니스 프랜들리’였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대기업 중심의 창조경제가 있었다. 약간의 충돌과 갈등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소득주도성장 기조에 기업들이 함께해야 한다. 공정경제와 혁신경제로 변화하는 패러다임 속에서 기술과 생산기반 그리고 국제경쟁력을 갖춘 기업은 분명 역할이 있다. 혁신기업과 경쟁하고 협력함으로써 전체 운동장이 커지고 기업도 성장할 수 있다.”

- 공정거래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인가. “불공정거래를 적발하고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도 개선에 역점을 둬야 한다. 공정위 인력이나 능력으로 시장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예컨대 하도급 신고 건수만 수천 건에 달한다. 특정 기업을 처벌하는 건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만 갖고 공정위 역할을 다 했다고 하면 안 된다. 불공정을 바로잡고 대기업의 진입장벽을 허무는 제도개혁 로드맵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 정부 여당이 추가로 부동산대책을 발표했는데, 부동산이 안정될 것으로 보나. “정치적 손해를 무릅쓰고 정책을 내놓으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는 데 있다. 노무현 정부 때 표를 많이 잃은 배경에는 강력한 부동산정책이 있었다. 결국에는 보유세를 인상해야 부동산이 정상화될 것으로 본다. 선진국은 재산세로 시가의 1%를 내고 있으나 우리는 0.2~0.3% 수준에 머물고 있다.”

-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주류 경제학계에서 소득주도성장론을 검증이 안 된 소수학설로 본다. 그러나 주류 경제학을 배운 나는 지금의 양극화시대에 소득주도성장이 맞다고 생각한다. 반도체 등 일부 품목의 수출 증가로 전체 경제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잠재성장률이 떨어지고 소비도 줄고 있다. 2015년 IMF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소득 상위 20%의 수입이 늘면 성장률은 떨어지고 하위 소득이 오를수록 성장률이 오른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월드뱅크에서는 하위 40% 소득자에 주목하라는 슬로건까지 내걸었다. 미국도 양극화에 대한 원인을 분석한 결과 소득분배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위 소득계층의 소득이 올라야 경제가 성장한다는 이론은 G20에서도 관심 의제가 됐다.”

-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최근 김동연 부총리가 언론사 주최 경제포럼에 나와 기조강연을 했는데 공정경제와 혁신경제라는 두 기둥 위에 집을 지으면 그게 바로 사람 중심의 경제가 된다고 설명하는 걸 봤다. 내 생각과도 같다. 2015년 문재인 대표 시절 민주당에 유능한경제정당위원회를 만들고 내가 공동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 우리는 공정경제와 혁신주도성장을 양대 축으로 하는 공약집을 만들었다. 문 대통령이 생각하는 경제정책 방향의 기본틀도 그때 이미 정립됐을 것이다.”

- 삼성 등의 대기업도 혁신에 나서고 있지 않나.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고 생각한다. 창의적 기업이 클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그나마 일부 대기업이 혁신을 하고 있다. 삼성이 애플과 경쟁하듯 혁신을 계속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일부 기업에 의존하는 혁신은 한계가 분명하다. 자생적 혁신기업들이 계속 생겨날 수 있도록 생태계를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 자생적 혁신기업이 늘어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다면. “금융개혁과 교육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큰 은행은 신용 좋은 대기업을 주로 상대한다. 중소기업을 상대로 하는 마이크로 파이낸싱을 늘려야 한다. 누구든 아이디어만 있으면 자금을 쉽게 조달하는 금융구조가 필요하다. 수능 위주의 교육은 산업시대에나 어울리는 방식이다. 혁신시대에는 잠재력, 개성, 창의성, 호기심을 진작하는 교육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학입시제도를 바꾸고 고교선택과목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정부가 지적재산권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보상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창의적 기업이 생존할 수 있다.”

- 정규직화와 노동유연성은 함께 갈 수 있나. “나는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럽의 선진국 스웨덴도 비정규직이 15% 이상 된다. 산업 특성과 발전 과정에서 보면 모든 근로자를 정규직화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해소하고 기업이 비정규직 제도를 남용하는 걸 막는 데 있다.”

강 교수는 지난 10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양대 노총을 초청한 간담회에 민주노총이 불참한 것과 관련 “상대를 이해하고 조금씩 양보하며 타협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정부가 복지지출을 늘리려면 증세를 해야 하나. “나는 증세에 찬성한다. 민주당 유능한경제정당위원회가 증세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공약집에 넣지 못했다. 정치적 고려 때문이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상속세를 80%까지 올려 욕을 먹었지만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복지와 교육 등을 지원함으로써 미국 경제의 대번영시대를 열었다. 소득에는 누진제를, 부동산에는 보유세를, 기업은 R&D투자 세액공제를 줄이는 방안을 논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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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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