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9일 인도네시아 보고르 대통령궁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가진 문재인 대통령과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오른쪽). ⓒphoto 연합
지난 11월 9일 인도네시아 보고르 대통령궁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가진 문재인 대통령과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오른쪽). ⓒphoto 연합

‘신(新)남방정책’.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1월 9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밝힌 대(對)아세안 정책의 새 이름이다. 한국과 대만을 자주 오가는 한 화교(華僑) 기업인은 이 말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대만 민주진보당(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정부의 대아세안 정책인 ‘신남향정책’과 이름과 내용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글자만 ‘향(向)’에서 ‘방(方)’으로 바뀌었을 뿐 아세안과의 교류협력을 늘린다는 점에서 내용도 대동소이했다. 아세안 국가의 외신에 전달된 영문명도 ‘southbound(남향)’에서 ‘southern(남방)’으로 바뀐 정도였다. 이 관계자는 “한국의 ‘탈핵(脫核)’이 대만의 ‘비핵(非核)’을 따라한 것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고리 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탈핵’ 선언을 했다. 원전 비중을 축소하는 대신 오는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0%까지 늘린다는 내용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탈핵 선언은 대만 차이잉원 정부가 원전 비중을 축소해 오는 2025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0%로 늘리다는 내용의 ‘비핵’정책과 시기만 다를 뿐 내용 면에서 대동소이했다. 역시 한자만 ‘비(非)’에서 ‘탈(脫)’로 바뀌었을 뿐 해외에 소개한 정책의 영문이름은 모두 ‘nuclear free’로 동일했다.

‘탈핵’에 이어 ‘신남방정책’까지 문재인 정부 핵심정책의 대만 정책 베끼기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문 대통령이 ‘신남방정책’을 발표한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대통령을 수행한 김현철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배경 설명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대만의 신남향정책은 내용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신남방정책을 소개하면서 김현철 경제보좌관이 밝힌 ‘3P전략’(People·Prosperity·Peace)의 첫 번째는 사람(People)이다. 김현철 보좌관은 “중국이나 일본은 물량공세”라며 “우리는 물량으로 안 되기 때문에 사람으로 승부하겠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 보좌관에 이어 브리핑한 채희봉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 역시 “사람 중심으로의 협력을 확대해 나간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 역시 11월 13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기업투자 서미트’에서도 ‘3P공동체’를 내세우면서 ‘사람(People)공동체’를 언급했다.

한국 ‘사람 중심’ vs 대만 ‘이인위본’

이는 대만 차이잉원 정부가 밝힌 ‘사람을 근본으로 한다’는 뜻의 ‘이인위본(以人爲本)’과 동일하다. 대만 행정원은 지난해 12월 ‘신남향정책 공작계획’을 승인하면서 ‘이인위본 쌍향다원(以人爲本 雙向多元)’의 원칙을 수차례 강조했다. 주한타이베이대표부는 이를 한글로 “사람을 근본으로 하는 접근노선”이라고 옮겼다. 공교롭게도 ‘신남방정책’ 역시 ‘사람을 중심으로 한다’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이다. 또 김현철 보좌관이 ‘3P전략’의 두 번째인 ‘Prosperity(번영)’를 소개하면서 말한 “원웨이로는 오래갈 수 없다. 투웨이 윈윈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역시 대만이 신남향정책을 발표하면서 원칙으로 밝힌 ‘투웨이 다원화’라는 뜻의 ‘쌍향다원(雙向多元)’과 동일한 접근법이다.

‘신남방정책’이란 이름도 한국에는 다소 생경하다. 김현철 경제보좌관은 브리핑을 통해 신남방정책이 지난 9월 문재인 대통령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3차 동방경제포럼에 참석차 취임 후 첫 러시아 방문 때 소개한 ‘신북방정책’에 대응하는 개념이란 취지로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동방경제포럼 기조연설에서 “신북방정책은 극동지역 개발을 목표로 하는 푸틴 대통령의 신동방정책과 맞닿아 있다”고 밝혔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 밝힌 신북방정책은 노태우 정부 때 구(舊)소련, 중국 등 공산권 국가를 상대로 한 외교정책인 ‘북방정책’이란 용어가 처음 회자된 지 수십 년 만에 나온 정책이기에 ‘신북방정책’이라고 불릴 나름의 역사적 근원과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신남방정책’의 경우 굳이 ‘신(新)’ 자를 붙일 이유가 없었다는 지적이다. 외교부 남아시아태평양국의 한 관계자는 “과거 남방정책이란 용어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신(新) 자를 붙이는 것이 맞느냐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다”며 “신북방정책과 운율도 맞추고 새롭게 시작해 보자는 뜻에서 신남방정책으로 이름을 붙인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일찌감치 신남향정책을 표방한 대만의 경우 대아세안 정책에 ‘신남향정책’이란 이름을 붙인 역사적 유래가 있다. 대만에서 ‘신남향정책’과 비슷한 개념이 등장한 것은 대만 최초의 민선 총통인 리덩후이(李登輝) 총통 집권 때인 1993년 ‘남진정책’이란 이름으로다. 1992년 덩샤오핑(鄧小平)이 노구를 이끌고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개혁개방의 지속’을 설파하며 동남아 화교자본 위주의 외자(外資)를 급속히 빨아들이자 이에 맞서 동남아에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정책이었다. 친일파를 자임하는 리덩후이 총통은 과거 일본이 동남아 공략 때 내건 ‘남진정책’에서 이름을 따 ‘남진정책’이라고 명명했다.

리덩후이의 후임 총통으로 2000년 민진당 최초로 정권교체에 성공하며 집권한 천수이볜(陳水扁) 정부는 리덩후이의 ‘남진정책’을 계승해 ‘남향정책’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재등장시켰다. 리덩후이는 국민당 소속 총통이었지만 국민당에서 제명될 정도로 민진당과 더 가까웠다. 이어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총통에 정권을 내어주었다가 지난해 다시 집권에 성공한 민진당 차이잉원 총통은 과거 리덩후이의 ‘남진정책’과 천수이볜의 ‘남향정책’ 등 과거 정권의 정책을 계승해 ‘신남향정책’이란 이름으로 재포장해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차이잉원 총통이 신남향정책을 내건 것은 2013년 시진핑 주석이 표방한 대외정책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에 맞서는 전략적 측면도 있다. 중국이 대만과 바로 마주한 푸젠성 푸저우(福州)에서 출발하는 ‘일로(一路)’, 즉 고대 해상실크로드를 따라 횡축(橫軸)으로 동남아 각국에 영향력을 투사하는데 맞서 ‘신남향정책’을 통해 종축(縱軸)으로 맞서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이 같은 고민 끝에 차이잉원 총통은 지난해 5월 취임 때도 ‘신남향정책’을 취임사에서 밝혔고, 취임 직후 총통부 내에 ‘신남향정책판공실’이란 총통부 직속 태스크포스까지 만들었다. 같은해 8월 신남향정책 ‘정책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자신이 주재하는 ‘대외경제무역전략회담’에서 정식으로 통과시켰고, 대만 행정원은 이를 지난해 12월 최종 승인했다.

수십 년 역사를 가진 대만의 ‘신남향정책’과 달리 문재인 정부가 밝힌 ‘신남방정책’은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난 5월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워싱턴’ ‘베이징’ ‘도쿄’ 심지어 ‘평양’까지 언급됐지만 ‘아세안’이나 ‘동남아’는 따로 언급된 바가 없다. “중국의 사드 보복에 맞서 임기응변 식으로 만들어낸 어젠다”라는 일각의 지적은 이 때문에 나온다. ‘신남방정책’이란 용어가 공식 등장하는 것은 지난 7월 문재인 정부 인수위원회 격인 국정기획자문위가 발간한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통해서다. 당시 계획에는 ‘신북방정책 및 신남방정책으로 동북아 지역의 장기적인 평화 협력적 환경조성’이란 말이 나온다.

이어 지난 8월에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인도양 컨퍼런스’ 때는 외교부는 “신정부의 신남방정책을 소개할 예정”이란 부제의 보도자료를 냈다. 당시 한국 대표로 참석한 사람이 지난 대선 때 문재인 캠프의 전직 외교관 지지그룹인 ‘국민아그레망’ 간사를 지낸 조병제 신임 국립외교원장이다. 대선 때 국민아그레망 단장이었던 정의용 현 국가안보실장(전 주제네바 대사)과 손발을 맞춘 조병제 원장은 미얀마와 말레이시아 대사를 거쳤는데, 조 원장이 말레이시아에서 있을 당시 대만에서 한창 ‘신남향정책’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었다. 이에 조병제 원장은 ‘신남방정책’의 입안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된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다들 신남방정책을 만들었다는 사람이 많아서 한 사람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며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서 만든 것 같다”고 했다.

노태우 정부 때 추진했던 북방정책과 같이 소련 및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북한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뚜렷한 정책적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신남방정책’의 핵심이라고 김현철 경제보좌관이 설명한 “오는 2020년까지 한국과 아세안의 교역규모를 2000억달러로 키우겠다”는 내용은 이미 지난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한국과 아세안 수교 25주년을 맞아 부산에서 열린 ‘제2차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때 언급된 구문이다. 당시 부산에서 채택한 ‘한·아세안 특별공동성명’에는 “2020년까지 상호 교역량을 2000억달러까지 확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문구가 나온다.

신남향정책을 설명하는 차이잉원 대만 총통. ⓒphoto 대만구글
신남향정책을 설명하는 차이잉원 대만 총통. ⓒphoto 대만구글

2020년 2000억달러 목표 재탕

앞서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한·아세안 수교 20주년을 맞아 제주도에서 열린 ‘제1차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때 “양측 간 교역규모가 2015년까지 1500억달러 규모로 증대되도록 적극 노력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확대발전시킨 것이었다. 한국과 아세안 간의 교역규모는 2007년 한·아세안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2006년 618억달러에 불과했던 한·아세안 교역규모는 2016년 1188억달러까지 늘어났다. 약 10년 만에 1.9배 늘어난 것으로 연평균 증가율은 6.8%에 달한다.

하지만 시장을 선점한 중국과 일본 때문에 한국과 아세안과의 교역 목표 달성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한국과 아세안과의 교역규모는 2014년 1380억달러로 정점을 찍고 지난해 1188억달러까지 하락한 상태다. 현재 한국과 아세안 간의 교역 규모는 전전(前前) 정부인 이명박 정부 때 공언한 목표치(2015년 1500억달러)에도 못 미치는 상태다. 이는 중국과 일본이 이미 선점하고 대만까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아세안 시장 공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중국과 일본의 대아세안 교역규모는 지난해 기준으로 각각 4522억달러, 1878억달러로 한국보다 월등하다.

정책이 좋고 목표만 뚜렷하다면 경쟁국의 좋은 정책을 벤치마킹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대만의 경우 약 25만명에 달하는 동남아 화상(華商)네트워크를 믿고 수십 년 전부터 ‘신남향정책’을 펴왔음에도 아세안 시장 개척이 만만치 않다. 대만과 아세안의 교역규모는 지난해 기준 784억달러로 한국(약 1188억달러)에 비해서도 작다. 아무리 ‘이인위본’ ‘쌍향다원’을 강조해도 결국 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정치적 파워와 경제적 이해관계가 핵심이다. 일대일로 정책을 펴면서 실탄을 공급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까지 설립한 중국에 밀릴 수밖에 없다. 대만 재계에서는 “신남향정책을 체감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사람 중심’의 신남방정책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가 잘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다.

이동훈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