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활동비 상납 의혹’으로 전직 국정원장 2명이 구속되면서 베일에 싸인 국정원 예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은 국가정보원 청사. ⓒphoto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상납 의혹’으로 전직 국정원장 2명이 구속되면서 베일에 싸인 국정원 예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은 국가정보원 청사. ⓒphoto 국가정보원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의 부훈(部訓)은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국정원 예산도 과거 안기부의 부훈처럼 ‘음지의 영역’, 정확히 말해 ‘대외비’ 성격을 띠고 있어 그 예산 내역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이는 극소수다. 국정원 예산에 대한 감사도 규정상 감사원이 손댈 수 없고, 해당 상임위인 국회 정보위에도 단순 합산 내역만 보고된다. 필요에 따라선 아예 공개되지 않는 내역도 많다. 모두 정보기관이란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다.

최근 불거진 국정원 특수활동비(특활비) 상납 의혹도 이 같은 폐쇄적 예산 운용 때문에 빚어졌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 11월 15일 박근혜 정부 국정원장 3명이 이재만·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특활비를 상납했다는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그중 두 명이 구속수감되었다. 복수의 자유한국당 의원도 국정원으로부터 특활비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돼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랐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인사들도 야당 시절 특활비를 챙겼다는 주장이 있다.

“국정원 예산 전체가 특활비”

먼저 특활비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기획재정부가 매년 발표하는 ‘예산 및 기금운용계획 집행지침’에 의하면 “기밀 유지가 요구되는 정보 및 사건 수사, 기타 이에 준하는 국정수행 활동에 직접 소요되는 경비”라고 규정돼 있다. 특활비는 상세한 지출 항목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 감사원의 ‘특수활동비에 대한 계산증명지침’에는 “특수활동비는 사용처가 밝혀지면 경비집행의 목적 달성에 현저히 지장을 받을 경우 집행내용확인서를 생략할 수 있다”고 명기돼 있다. 국정원 요원들의 경우 지출 내역이 드러나면 동선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침에 따라 영수증을 제출할 필요도 없으며 수령자의 서명만으로 현금 사용이 가능하다. 특활비는 국정감사 때도 항목을 공개하지 않으며 국가재정법에 따라 총액으로 편성하도록 되어 있다.

기자가 만난 A씨는 예산을 담당하는 국정원 기획조정실(기조실)에서만 30여년 가까이 근무한 예산 전문가였다. A씨는 “국정원 예산은 크게 본예산과 예비비 두 갈래로 나뉜다”고 했다. 본예산은 경상비인데 규모는 4000억~5000억원이며 예비비는 4900억원 정도로 둘을 합치면 약 1조원가량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국정원 본예산과 예비비는 모두 기획재정부가 편성.) A씨는 “국정원 예산 전체(본예산·예비비)가 특활비로 분류돼 있다”며 “국정원 예산을 다른 부처의 예산과 동일하게 봐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5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서훈 국정원장 인사청문회에서도 확인된다. 이태규 국민의당 의원이 “국정원 예산이 대부분 그렇게(특수활동비로) 되어 있지요? 전부 다”라고 묻자 서훈 원장은 “예”라며 “국정원은 특수활동비라는 하나의 항목으로 모든 일반 예산이 다 편성되어 있다”고 답했다. 그동안 대다수 언론은 ‘국정원 특활비가 4900억원 규모’라며 마치 국정원 전체 예산과는 별개의 돈인 것처럼 보도해왔는데 사실과 다른 셈이다.

그렇다면 ‘국정원 특활비 4900억원’은 어디서 나온 수치일까. 지난해 9월 기획재정부가 작성한 ‘2016년도 기관별 특수활동비 편성내역’과 ‘2017년 기관별 특수활동비 편성안’이 공개됐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국정원 특활비는 2016년 4860억원에서 2017년 4947억원으로 편성돼 약 87억원이 늘어난 규모였다. 국정원 예산 전문가인 앞서 A씨의 주장이 맞다면 이 자료에 기재된 특활비도 국정원 전체 예산의 일부여야 한다. 국정원 대변인실에 직접 확인한 결과, 실제 기재부 자료에 기재된 특활비도 국정원 전체 예산에 포함된 금액이 맞다고 했다. 본예산과 예비비 중 순수한 특활비(국내 및 해외 요원 활동비 등)로 볼 수 있는 항목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4947억원이란 계산이 나온 것 같다는 취지의 설명이었다.

‘국정원이 특활비를 경찰과 군(軍) 등 다른 부처에 지원하고, 각 부처에 국정원 예산이 숨겨져 있다’는 요지의 보도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지난 11월 7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에서 강창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정원이 경찰청에 매년 800억~900억원의 특활비를 지원해주고 있냐”고 묻자 이철성 경찰청장은 “국정원과 관계 없는 경찰청 예산”이라고 못 박았다. 박상기 법무장관도 지난 8월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국정원 예산이 법무부 예산에 포함돼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며 “법무부에서 집행하는 예산”이라고 말했다. A씨는 “미국 CIA 예산은 국방부 예산에 끼워져 사실상 은닉돼 있지만 국정원 예산은 단 한 푼도 숨겨진 게 없다”고 강조했다.

다만 기무사령부의 경우, 국정원과 대공·방첩 업무를 공유하고 있어 일부 예산을 국정원이 통제·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원을 오래 취재해온 한 일간지 기자도 “과거에는 국정원 예산이 정부 부처 예산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논란이 되는 예산도 국정원과 무관한 해당 부처 예산”이라고 말했다.

A씨는 “국회 정보위에서 예산 심의를 받을 때 국정원이 제출하는 보고서는 한 장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본예산 얼마’ ‘국가안전보장을 위한 예비비 얼마’ 이런 식으로 액수를 합산한 채 보고한다는 것이다. ‘국정원법’과 ‘예산회계에 관한 특례법’, 그리고 예산 전체가 ‘특활비’에 해당하므로 세부 내역을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국정원장 판공비의 비밀

국정원과 달리 청와대는 업무추진비와 특활비가 구분되어 있다. 업무추진비는 증빙을 필요로 하지만, 특활비는 국정원과 마찬가지로 증빙이 필요 없다. 청와대 1년 예산 규모는 1700억원 정도로, 국정원 예산의 10분의 1 수준이라 특활비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다. 국정원이 이재만·안봉근 전 비서관에게 특활비를 상납했다는 의혹에 대해 A씨는 “청와대 예산 규모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예산 규모가 작아 국정원이 두 비서관에게 활동비조로 돈을 보태줬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A씨는 “청와대는 예산에 있어서 사실상 ‘거지’라고 보면 된다”며 “과거 청와대에서 잠시 근무한 적이 있는데, 출장비를 신청했더니 총무비서관이 ‘돈이 없다’며 신청한 금액의 20%를 깎았다”고 회고했다. A씨는 두 비서관이 국정원 돈으로 아파트를 샀다는 보도에 대해선 “그 돈 전체가 국정원 돈이었는지 여부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대중 정부 때 국정원 고위직을 지낸 B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B씨는 “이재만·안봉근 비서관에게 국정원 돈이 갔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의 빈약한 예산으로 돈에 쪼들린 안봉근·이재만 비서관이 ‘꼬리표’가 없는 국정원 예산을 활동비조로 타 썼던 것 같다. 대통령 월급이나 판공비도 매우 적어 (대통령이) 청와대 직원들을 일일이 격려할 수 없다. 그래서 국정원이 통치권자를 대신해 청와대 직원들에게 용돈을 준 것이라고 봐야 한다.”

기자는 한 전직 국정원장이 재임 시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행정관 등에게 봉투를 챙겨줬다는 상세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A씨와 B씨 모두 그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B씨는 한발 더 나아가 “국정원에 있을 때 권력 고위층 친인척의 빚을 국정원 예산(특활비)으로 갚아준 일도 있다”고 했다. 해당 전직 국정원장에게 청와대 직원들에게 돈을 건넨 사실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지만, 그는 일절 답변하지 않았다. A씨와 B씨는 청와대 직원뿐 아니라 국회의원 상당수가 국정원 예산을 이른바 ‘떡값’ 명목으로 받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국정원장 판공비도 관심의 대상이다. 원장 판공비와 공관 운영비 내역은 국정원 내에서 원장과 기조실장(1급), 그리고 감사관(2급)과 기조실 산하의 예산관(3~4급) 정도만 알고 있다고 한다. 확인 결과 원장의 판공비 액수는 월 5억원, 연간 60억원 규모였다. 국정원장은 서울 시내 L호텔과 서울 강남에 전용 안가가 있고, 국정원 2차장 안가도 서울 양재동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소요되는 경비가 국정원장 판공비에서 나가는지, 아니면 예산에서 나가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원장 판공비는 가장 은밀한 부분이기 때문에 비서실이나 기조실 직원도 잘 모른다고 한다.

역대 정권의 예

취재 과정에서 원장 판공비와 관련해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한 전직 국정원장은 퇴임 시 판공비를 반납하지 않고 가지고 나가 그 돈으로 수도권에 빌딩을 샀다는 것이었다. 사실 여부를 국정원 내부 사정에 밝은 C씨에게 물어보았다. C씨는 “판공비 미반납은 일종의 전관(前官) 예우이자 관례”라며 이렇게 말했다.

“신임 국정원장이 전임자의 노하우, 그러니까 대통령이 좋아하는 보고서 서체, 보고 방식 등을 제대로 인계받지 못하면, 신임 국정원장은 대통령에게 깨지다가 세월을 다 보낸다. 그래서 (전임자의) 판공비 미반납을 눈감아준다. 전직 국정원장들 거의 모두가 두툼한 수표를 갖고 다닌다.”

과거엔 어땠을까.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는 중앙정보부(중정)와 안기부가 정치자금 모금 창구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샀고, 민주화가 된 후엔 국정원(안기부) 예산이 선거자금으로 전용했다는 의혹도 일었다.

1998년 발생한 이른바 ‘안풍(安風)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검찰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 4·13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이 안기부 예산 1197억원을 끌어다 선거를 치렀다고 발표했다. 강삼재 전 신한국당 사무총장,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이 검찰 조사를 받는 등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2005년 대법원은 안기부 예산이 아닌 1992년 김영삼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쓰고 남은 ‘대선잔금’이라고 판시했다. 그 잔금이 국정원(당시 안기부) 비밀계좌에 예치됐고, 신한국당이 그 돈을 끌어다 총선자금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비밀이 보장된 안기부 계좌를 정권이 ‘선거자금 중간 통로’로 악용한 셈이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국정원 예산이 정치권에 직접적으로 유입됐다는 보도나 증거는 없다. 그러나 B씨는 “국정원을 매개로 다른 경로를 통해 거액이 조성된 정황이 있다”고 말했다. B씨는 자신이 국정원에 재직할 당시 국정원 고위 간부의 지시를 받고 은행을 담당하는 국정원 IO(Intelligence Officer·국내 정보관)를 통해 시중 은행 여신으로 거액의 뭉칫돈을 조성했다고 주장했다. B씨는 이와 관련된 권력실세 두 명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때 이 돈의 조성 경위를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용처에 대해선 아직 밝혀진 게 없다. B씨도 이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이는 국정원이 자체 예산이 아닌 ‘제2의 경로’를 통해서도 손쉽게 거액을 마련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밖에도 동교동 실세였던 K 국회의원이 아파트 계약금 일부로 국정원 수표를 사용한 사실이 검찰 조사를 통해 드러난 적이 있다.

노무현 정부 때는 국정원 돈이 정치권에서 말썽을 일으킨 적은 없었지만 다른 목적으로 유용됐다는 논란은 있었다. 2007년 7월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를 갔던 샘물교회 교인 23명이 무장세력 탈레반에 의해 피랍되었을 때, 인질 석방 비용으로 국정원 돈이 쓰였다는 의혹이 대표적이다. 인질들이 석방된 지 약 한 달 후인 9월 6일, 국회 정보위에서 김만복 국정원장은 인질 몸값 지불 논란과 관련해 “탈레반과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에 공개된 것 외에는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무렵 로이터통신은 “한국인 19명을 풀어주는 대가로 2000만달러(당시 약 190억원) 정도를 한국 정부로부터 받았다”고 보도했다. 2008년 국회 정보위 결산 보고 및 심의에 착수한 복수의 정보위원들도 사실상 이를 인정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을 통해 몸값이 지불된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이명박 정부 때에는 국정원 예비비 액수가 노무현 정부에 비해 큰 폭으로 상승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국정원에 편성된 ‘국가안전보장 활동경비(예비비)’는 900억원이었으나. 2008년 2628억원, 2009~2011년까지는 모두 3540억원으로 서너 배나 증가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은 보수단체에 일간지 광고비, 활동비를 지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해 5월, 보수단체 국민행동본부의 서정갑 본부장은 “이병기 국정원장이 ‘돈 지원해주는 창구를 하나로 해야 쉽게 그 창구에다 (돈을) 넣는다’는 말을 했다”고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특활비 논란 잠재울 방법은?

그동안 감사원은 ‘예산회계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국정원 예산의 편성·집행·결산·과정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국정원 비공개 세입·세출예산에 대한 국회 정보위 심의는 구체적인 세목이 보고되지 않아 ‘수박 겉핥기’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최근의 ‘국정원 특활비 상납 의혹’을 기점으로 감사원이나 독립된 외부 감사기관이 국정원 예산 감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결국 11월 22일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국정원 명칭 변경을 포함해 국정원 예산의 감사원 감사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어디에 돈이 쓰일지 예측하기 어려운 정보기관의 특성상 ‘편성’보다 ‘결산’ 단계에서 확인이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 같은 대책이 강구된 것이다.

하지만 전직 국정원 직원들은 감사원 등 외부에 의한 예산 감사에는 대체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해외 정보기관도 그런 식의 감사를 받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A씨는 “국정원 감사관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정원장이 임명하고, 내부 예산을 감사하는 국정원 감사관이 원장이나 기조실장의 통제를 받지 않도록 독립된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밀유지와 보안이 생명인 정보기관의 특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납세자의 권리를 충족하는 차원에서 공개 가능한 부분은 과감히 공개하는 게 국정원의 신뢰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조성호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