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과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왼쪽). ⓒphoto 뉴시스
박원순 서울시장과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왼쪽).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15일, 경북 포항지진으로 취약함이 입증된 다세대·다가구주택이 수도 서울에서 대폭 늘어난 데는 서울시의 주거정책 변화가 한몫을 했다. 서울시는 산하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를 앞세워 2002년부터 다세대·다가구주택을 사들였다. 매입한 다세대·다가구주택은 시세의 30% 금액으로 기초생활수급자와 한부모가정 등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최장 20년간 빌려주는 임대주택으로 활용해왔다. 박원순 시장 취임 후에는 이를 연간 1500호 규모로 대폭 늘렸다. 이런 식으로 서울시가 2015년까지 매입한 다세대·다가구주택은 무려 1만327호에 달한다. 서울시가 다세대·다가구주택을 사들이는 큰손이 된 것이다.

2013년부터는 건축 중이거나 건축이 예정된 다세대·다가구주택으로까지 매입 대상을 대폭 확대했다. 다세대·다가구주택의 건축주나 건축업자들 입장에서는 짓다가 분양이나 임대가 안 돼도 서울시에서 세금으로 매입해주니 리스크 부담 없이 다세대·다가구주택 건설에 나설 환경이 마련된 셈이다. 일례로 2015년에 매입한 다세대·다가구주택 1500호 가운데 무려 98%에 달하는 1459호가 건축 중인 주택이었다. 서울주택도시공사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1500가구의 다세대·다가구주택을 매입했는데 모두 건축 중인 주택이었다”며 “올해도 건축 예정인 주택을 중심으로 1500가구를 매입할 계획”이라고 했다.

건축 중인 주택을 주로 매입하는 까닭은 기존 다세대·다가구주택의 품질기준이 서울시의 요구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매입 실무자들이 적지 않은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서울시 주택정책과가 작성한 ‘2016 다세대·다가구주택 매입 공급계획’이란 문건에 따르면, ‘매입신청된 준공완료 주택 201호 가운데 20호(10%)만 품질기준 충족’이란 언급도 나온다. 시민 세금을 투입해 안전성조차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부실 자산을 웃돈 들여 매입한다는 비난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건축 중인 다세대·다가구주택은 서울시가 가이드라인으로 정한 가격보다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부르는 경우가 왕왕 있어 역시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진다. 박합수 KB국민은행 수석 부동산전문위원은 “일부 건축업자들은 SH에서 원하는 건축 기준에 맞춰 다세대·다가구를 지어 팔아넘기는 전략을 쓰고 있다”며 “사실상의 ‘관급공사’ 업체로 바뀐 경우”라고 했다.

전임 이명박·오세훈 시장 때 서울시 주택정책은 다세대·다가구주택 등 노후불량주택을 철거하고 아파트를 짓는 방향에 초점이 맞춰졌다. 소위 ‘뉴타운 사업’으로 불리는 ‘도시재정비촉진사업’이다. 주 대상지는 다세대·다가구주택이 밀집한 노후불량주거지가 됐다. 은평·길음·왕십리가 1차 뉴타운 시범지구로 선정된 데 이어 모두 26개 뉴타운 지구가 지정됐다. 주택개량 측면에서만 보면 뉴타운 사업은 주택개량 보조금과 같은 세금 한 푼 안 들이고 개발이익을 통해 헌집을 새집으로 바꿀 수 있는 사업이다. 실제 노후불량주택들이 즐비했던 1차 뉴타운 시범지구(은평·길음·왕십리)는 서울 강북에서도 선호하는 주거지로 상전벽해(桑田碧海)했다.

하지만 뉴타운 사업 과정에서 개발을 원하는 토지주와 살던 다세대·다가구주택을 비워줘야 하는 세입자들과의 충돌이 곳곳에서 빚어졌다. 박원순 시장은 오세훈 전 시장의 중도사퇴로 치러진 보궐선거를 통해 서울시장에 당선된 직후인 2012년 1월 ‘뉴타운 정비사업 신(新)정책구상’을 발표하면서 전임 시장의 ‘뉴타운 정책’을 백지화했다. 원주민 재정착 문제와 주변 지역 전월세값 자극 등 뉴타운의 부정적 측면만을 주목한 것이다. 이후 박원순 시장은 2015년 3월 ‘서울 도시재생 종합플랜’을 발표하면서 ‘마중물사업’ ‘마을공동체’ 등 기존 노후불량주택들을 최대한 유지하는 쪽으로 서울시 주거정책 방향을 180도 돌려놨다.

이 과정에는 김수현 현 청와대 사회수석의 철학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원순 시장은 2014년 서울시 싱크탱크인 서울연구원장에 김수현 당시 세종대 교수를 발탁했다. 김수현 수석은 판자촌 철거반대 운동가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 청와대 국정과제·국민경제·사회정책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이정우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과 함께 노무현 정부 부동산정책의 틀을 짠 부동산 학자다. 그간 아파트보다는 판자촌을 비롯 다세대·다가구주택 같은 소위 ‘싼집’을 적극 옹호해왔다. 김 수석은 ‘부동산은 끝났다’란 저서에서 “1990년도부터 대대적으로 지어진 다세대·다가구주택은 6개월이면 뚝딱 집이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에 화급한 주거난을 해결하는 응급대책으로는 최고였다”고 밝힌 바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 김수현 사회수석 등이 선호하는 방식의 도시재생은 세입자 재정과 주변 전월세값 자극 등의 부동산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점은 있다. 하지만 노후불량주택을 그대로 둘 경우 내진설계는 고사하고 소방도로와 통학로 확보 등 안전문제 해결이 어려운 치명적 문제가 있다. 법률사무소 집의 원영섭 대표변호사는 “다세대·다가구주택이 난립하면 동네가 슬럼화된다”며 “세입자들도 다세대·다가구에 계속 살기보다 저렴한 임대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을 선호한다”고 했다. 전면 철거보다 세금이 더 많이 들어갈 수도 있다. 김수현 사회수석도 자신의 책에서 “주택 자체의 개량이란 측면에서 보면 현행 재개발이나 뉴타운 사업은 효과적인 방식”이라며 “정부 돈도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고 인정하고 있다.

2014년 박원순식 ‘도시재생 사업 1호’ 지구로 지정된 서울 종로구 창신동·숭인동 일대는 뉴타운 가운데 가장 먼저 지정 해제된 곳이다. 이곳에는 ‘도시재생’이란 명목으로 국비와 시비 등 1007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지난 11월 21일 찾아간 종로구 창신동과 숭인동 일대는 전면 철거 방식의 재개발 없이 1007억원으로 도시재생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저절로 들었다. 다닥다닥 붙은 다세대·다가구주택 사이로 난 소방도로는 비좁기 그지없고, 전신주의 전선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역대 서울시장은 세입자의 욕을 먹어가면서 무허가 정착지 조성, 합동재개발, 뉴타운과 같은 다양한 방식의 주택개량을 추진해왔다. 그러지 않았다면 수도 서울은 여전히 판자촌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서민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天災地變)에 없는 살림마저 송두리째 날아가지 않게 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현상 유지는 정치인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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