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중 화장실. 재래식 변기 사이에 칸막이가 전혀 없다. ⓒphoto 연합
중국 공중 화장실. 재래식 변기 사이에 칸막이가 전혀 없다. ⓒphoto 연합

1988년 10월 하순 조선일보 홍콩특파원으로 일하던 필자는 옌볜대학 초청으로 처음으로 중국 여행에 나섰다. 당시 홍콩에서 옌지(延吉)로 가려면 홍콩→베이징(北京)→창춘(長春)→옌지를 통과해야 했다. 홍콩에서 베이징까지는 비행기편으로 갔고, 나머지는 열차를 갈아타야 하는 여정이었다. 베이징을 출발한 열차가 창춘에 도착한 것이 새벽 3시. 오후 5시까지 숙소에서 쉬고 다시 창춘→옌지행 열차를 타야 했다.

그때 처음 본 것이 창춘역 앞의 공중화장실이었다. 처음 본 중국 지방도시의 역 앞 공중화장실 안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한쪽에 직사각형의 구멍만 50여개 뚫어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옆 사람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 장치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도 그 시간 지방도시에서는 역전 화장실이 나은 건지 화장실 안에는 신문조각과 책을 든 중국 인민들이 일렬로 죽 늘어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일을 보면서 서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이었다. 격벽 건너 여자화장실에서도 서로 잡담하고 떠드는 소리가 남자화장실로 건너오는 것을 보면, 여자화장실 안도 사람 사이의 가림막은 없는 것으로 추정됐다. 중국에서 처음 본 지방도시 역 앞 공중화장실의 풍경은 그 후 몇 년 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꿈에도 가끔 나타났다.

그로부터 28년. 지난 10월 25일의 중국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9기 1중전회)에서 권력구조 내에 광범위한 이른바 ‘시자쥔(習家軍)’을 형성한 시진핑 당 총서기가 지난 11월 29일 전체 당원과 행정조직이 일제히 ‘변소 혁명’에 나설 것을 지시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전했다. 중국에서는 화장실을 ‘처수오(厠所·변소)’, ‘시소우지엔(洗手間·화장실)’으로 나눠 부르는데, 정확히 시진핑은 ‘처수오 혁명’에 나서라고 지시했다. 처수오는 우리말로 ‘뒷간’ ‘측간’ 등으로 번역된다.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은 “변소는 조그만 곳이지만 커다란 민생 문제를 안고 있는 곳”이라고 전제하고 “중국의 변소는 많은 사람들이 ‘불가(不佳·아름답지 못하다)하다’고 느끼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더럽고(臟), 어지럽고(亂), 수준이 떨어지고(差), 구석에 처박혀 있고(偏), 작다(少)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두 덩어리의 벽돌과 하나의 구덩이면 충분하고, 파리가 날아다니는 가운데 냄새로 가득 차 있다”고 시진핑은 중국의 지방 공중화장실을 묘사했다. 그러면서 “샤오캉(小康·중진국) 사회이건 아니건 변소가 더러워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전면적인 샤오캉 사회의 건설과 민족 부흥이라는 위대한 목표도 화장실 혁명을 하지 못하면 역사적 결함을 갖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화장실 혁명에 대한 사상적 인식과 정책적 조치, 시스템의 개선 등 일련의 심각한 변혁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웬만한 변소에 들어가면 우선 중국인들의 인내심을 존경하게 된다. 이미 넘친 똥오줌으로 발판 위에 발 디딜 틈이 없고, 여름철이면 맹렬한 속도로 날아다니는 엄청난 파리떼와 각종 벌레들이 엉덩이 피부가 닿을 만한 곳에서 꾸물거리는 것이 중국의 화장실 풍경이다. 그런데 신문지 한 조각 들고 그 속에 들어가서 일을 보고 나오는 중국인들을 보면 인내심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화장실에 남녀 구분이 생긴 것은 40여년 전이다. 열여섯의 나이에 아버지가 문화대혁명에서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자진해서 산시(陝西)성 시골 마을로 하방(下放) 내려간 ‘지식청년’ 시진핑이 만든 화장실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웬만한 지방에서는 ‘땅바닥에 구덩이 하나 파고, 주위를 나무판대기로 대충 가린 후, 지붕이라고는 풀더미로 덮은 것’이 화장실이다. 그런 시골 화장실을 열여섯 살의 시진핑이 “벽돌로 보다 넓은 곳에 비교적 깨끗한 공간을 만들고 남녀 구분을 한 것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생긴 선진 화장실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1989년 4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50여일간 천안문광장을 가득 메운 베이징 시민과 대학생 100만명의 시위 과정에서 보게 된 ‘끔직한’ 광경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야 천안문광장 사방에 군데군데 화장실이 세워져 있지만 놀랍게도 1989년 당시에는 천안문광장 사방에 화장실이 없었다. 광장 북쪽 시위 학생 지도부가 팔괘진을 치고 드러누워 있는 인민영웅 기념탑 주변에는 시위 학생들이 먹다가 버린 빵조각, 우유, 소시지 등 음식물쓰레기가 학생들과 함께 뒤엉켜 썩어가고 있었다. 100만명이 넘는다는 학생들은 광장 사방의 하수도 위를 덮은 직사각형 철판을 하나씩 들어내고 거기를 화장실로 썼다. 물론 남녀 학생 구분도 없고 가림막도 없었다. 여학생의 경우 친구 몇 명이 둘러서서 가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위가 한 달 넘게 계속되자 인민영웅기념탑 주위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광장 서쪽의 인민대회당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학생들은 소독차가 들어갈 길을 터주기를 바란다. 지금 이대로 가서 광장 안에 전염병이 돌면 여러분들은 다 죽는다. 그러니 소독차가 들어갈 길을 터주기 바란다.” 길이 열리자 소독차가 들어와 6·25전쟁 때 포로들의 머리 위에 뿌렸다는 DDT로 추정되는 허연 소독약을 시위 학생들의 머리 위에 한바탕 뿌리고는 돌아 나갔다. 당시 광경은 전 세계에서 날아온 외국 기자들이 다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보도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글이 천안문사태 당시의 화장실과 소독에 대해 전하는 첫 글일 가능성이 있다.

필자는 시진핑의 화장실 혁명이 성공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이번 화장실 혁명이 성공하면 아마도 아시아를 보는 서양인들의 눈길이 바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 11월 20일 화장실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입법안으로 ‘농촌인 거주환경 정돈 3년 행동방안’이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신화통신의 표현처럼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 이끄는 화장실 혁명이 한 건 한 건씩이라도, 그리고 조그만 승리들을 모아 커다란 승리를 만드는 식으로라도” 꾸준히 전진하기 바란다. 그렇게 해서 화장실 혁명이 성공한다면 “중국 인민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부자로 만든 위인은 덩샤오핑(鄧小平), 수천 년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화장실 혁명에 성공한 것은 시진핑”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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