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서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관련해 “실수하지 말라”고 경고한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2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서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관련해 “실수하지 말라”고 경고한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 ⓒphoto 뉴시스

지난 12월 18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긴급회의에서 니키 헤일리(45)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예루살렘 결의안’에 홀로 반대표를 던졌다. 15개 안보리 이사국 중 14개국이 찬성하고 미국만 반대하는 14 대 1의 일방적 싸움이었지만 그는 전혀 밀리지 않고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veto)을 행사해 결의안을 폐기시켰다.

발언도 단호했다. 회의에서 “미국의 (예루살렘 수도 인정) 결정은 중동 평화를 위한 미국의 역할, 미국의 주권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며 “안보리가 거부권 행사를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회의를 마친 후에는 기자들에게 “이번 결의안은 모욕적”이라며 “유엔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을 다루는 데 있어 득보다 해가 되는 행위를 한다는 또 하나의 예시”라고 비판했다.

차기 대권후보로까지 거론

따지고 보면 헤일리 대사의 이날 발언은 ‘억지’에 가까웠다. 이번 ‘예루살렘 결의안’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승인함으로써 일으킨 평지풍파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 선언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분쟁은 격화되고 중동 평화는 더 요원해졌다는 비판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상황이다.

유엔대사로 발탁될 때에는 트럼프 정부의 ‘의외의 인선’ 중 하나로 꼽혔던 헤일리 대사가 지금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가장 트럼프를 잘 대변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는 지난해 대선 때는 공화당 내에서 가장 강경한 반(反)트럼프파 중 하나였다. 공화당 경선에서 처음엔 마코 루비오를 지지했다가 그 후 테드 크루즈를 지지했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는 날 선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를 장관급인 유엔 대사로 기용할 때에는 그저 ‘마이너리티’ 몫 구색 맞추기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이제 미국 외교계의 핵심을 넘어 차기 대권후보군으로 거론될 만큼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는 혹평을 들으며 시시때때로 경질설이 나오는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이미 제친 것 같은 분위기다. 틸러슨 장관의 경질설이 나올 때마다 헤일리 대사가 유력한 후임으로 거론됐고, 그럴 때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국무장관에 뜻이 없다”고 부인하는 게 레퍼토리처럼 돼버렸다. 그의 이 같은 급성장 배경이 무엇인지가 유엔 외교가에서 중요한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헤일리 대사는 인도 펀자브 출신 이민 2세다. 그의 아버지는 캐나다에서 박사를 받은 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부히스칼리지 교수가 되면서 미국에 정착했다.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어머니는 뱀버그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의류 사업을 시작했다.

헤일리 대사는 12세 때부터 어머니의 의류 가게에서 회계일을 했고, 대학도 회계학 전공으로 마쳤다. 졸업 후 회사 회계책임자 등으로 일하다가 어머니의 의류회사를 거쳐 뱀버그시 상공회의소 재무담당 임원에 임명됐다. 그후 시의원,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을 거쳐 39세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 당선됐다. 당시 전국 최연소 주지사였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최초의 여성 주지사, 인도계로는 두 번째 주지사 기록을 세웠다.

늘씬한 미인형 외모가 호감을 준다는 평도 있다. 헤일리 대사가 다섯 살 때 ‘어린이 미스 뱀버그’ 대회에 나갔던 일화도 유명하다. 이 대회는 흑인과 백인으로 나눠 각 1명씩 상을 주는데 주최 측이 헤일리 대사가 흑인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백인으로 보기도 어려워 탈락시켰다는 것이다.

미인형 외모와 달리 그가 강성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 것은 주로 북한 핵·미사일 관련 대북(對北) 제재 결의안을 안보리에서 채택할 때 양보 없는 강공, 속전속결형 일처리로 ‘외교관 같지 않은 외교관’이라는 평을 듣게 된 것과 관련이 많다. 자신의 강력한 대북 제재 주장에 반대 발언을 한 중국과 러시아의 유엔 주재 대사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제재가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고, 시한을 정해 놓은 후 그 기간 내에 무조건 제재 결의안을 통과시키겠다고 못 박기도 했다. 유엔 외교무대에서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가진 거부권을 공개리에 거론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이며, 시한을 못 박는 것 역시 대단한 파격이다. 그렇지만 결과는 다 그의 뜻대로 됐다.

공격적 행보로 외교무대서 새 바람

그는 역대 유엔 주재 미국대사들과는 대조적으로 TV 인터뷰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외교 문제뿐 아니라 국내 정치, 심지어 누구도 말하기 곤란해 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욕먹는 문제에까지 거침이 없다. 지난 5월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커넥션’을 수사 중이던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해임한 것이 논란이 됐을 때 “대통령은 국가 CEO(최고경영자)인데 자신이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해고할 수 있다”고 해 ‘총대’를 메기도 했다.

외교 문제도 잔잔한 문제보다는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북한, 시리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러시아 등 민감한 사안에 주력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4월 그에 관한 기사에서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변죽을 울리고 있을 때 누군가 나서서 세계 무대에 미국의 원칙을 정확히 말하는 게 나쁠 게 없다”고 했다.

유엔의 한 외교관은 “가장 외교관 같지 않은 외교관, 가장 정치인 같은 외교관”이라면서 “분명하지 않고 모호한 말을 하는 게 대세인 외교무대에서 공격적인 행보를 하는 것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관의 일반적인 모습과 전혀 다른, 적극적인 정치적 공세가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 밖의 헤일리’는 매우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유엔의 한 소식통은 최근 헤일리 대사를 ‘외강내유(外剛內剛)형’이라고 평했다. 유엔 주재 미국대사들은 다른 나라 대사들을 만날 때 미국 대표부로 부르는 게 일반적인데 헤일리 대사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일은 스스로 찾아간다는 것이다. 공식석상에서 공격적인 발언을 하는 것과는 달리 말하는 시간보다 듣는 시간이 훨씬 많다고 한 외교소식통은 전했다. 헤일리 대사는 주방위군 장교인 남편도 뉴욕으로 옮겨와 맨해튼의 관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만찬 모임 등에도 부부 동반으로 참석해 소탈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언론들은 그를 두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수전 라이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유력한 여성들과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 등이 유엔 대사 출신”이라며 “헤일리 대사가 이 전임자들보다 얼마나 더 높게 올라갈지 주목된다”고 그에 대한 관심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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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한 뉴욕 특파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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