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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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행복을 위해 만들어졌던 레일이 지금 이 나라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정치가 그 레일을 부숴야 한다. 좀 더 자유로운 일본을 만들기 위해.”

‘포스트 아베’로 부상한 고이즈미 신지로(37) 자민당 수석 부간사장과 젊은 의원 20여명이 일본의 다음 100년을 위한 전략을 내놓았다. 이들이 ‘레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고 나선 것은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로는 저출산·초고령사회의 일본을 더 이상 이끌고 갈 수 없다는 위기감이다. 인생 100년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저출산 해결이 우선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 사회 전체가 육아·보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기본 방향이다.

이들은 고이즈미를 중심으로 자민당 내에 ‘2020년 이후의 경제재정구상 소위원회’를 만들었다. 2016년 2월의 일이다. 2015년 정부의 추경예산에 대한 문제의식이 계기였다. 저소득 고령자에게 1인당 3만엔을 지급하는 예산이 추경에 포함된 것을 두고, 고령자에게 예산이 치중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쏟아져 나왔다. 사회보장제도 개혁에 대한 필요성이 소위원회 구성으로 이어졌다. 소위원회는 2년 가까이 저출산·초고령사회의 해법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소위원회는 일명 ‘고이즈미 소위원회’로 불린다. 고이즈미 신지로가 위원장 대행을 맡아 소위원회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신지로는 ‘정계의 아이돌’로 통한다. 차차기 총리 후보는 물론 차기 총리 후보로 꼽히고 있다. 최근 TV아사히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에 적합한 인물’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아베 신조 총리와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각각 16%)을 제치고 29%를 얻어 1위를 기록했다. 그만큼 ‘고이즈미 소위원회’의 활동에도 무게가 실려 있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고민은 우리에게도 발등의 불이다. 그들의 해법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고이즈미 소위원회’의 활동을 결산한 책이 지난해 연말 출간됐다. ‘인생 100년 시대의 국가전략’이라는 제목이다. ‘고이즈미 소위원회의 500일간의 격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에서 고이즈미 소위원회는 사회보장개혁 등 22세기의 일본을 제안했다. 제안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일본에서 22세기를 정책에 끌어들인 것은 ‘고이즈미 소위원회’가 처음이다. 소위원회는 22세기의 키워드는 ‘인생 100년 시대’라고 말한다. 20년 배우고, 40년 일하고, 정년 후 20년을 보내는 ‘20-40-20’을 전제로 설계된 사회제도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는 것. 흥미로운 점은 ‘국가전략’이라는 단어를 정치·안보만이 아닌 사회 전반의 문제로 확대했다는 것이다.

소위원회는 매주 2시간씩 머리를 맞대고 의원들 간 치열한 격론을 벌였다. 소위원회 500일의 기록을 정리한 사람은 후지사와 레츠씨이다. 사회적 사업의 경영컨설턴트로, 정부 부흥청의 정책조사관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후지사와 레츠씨는 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소위원회의 열정적인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일은 관료에게 맡기고 의원들은 아무 의견이 없다’. 그는 물론 일본 국민들이 정치인들을 보는 일반적 시선이다. 의원들조차도 다른 의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위원회를 통해 처음 알았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후지사와씨는 전했다.

소위원회는 주제별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의원들 간 반론과 악평을 거침없이 쏟아냈다고 한다. 소위원회의 분위기는 자민당 위원회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통상적으로 부회라고 불리는 자민당의 위원회는 정부가 제안한 정책을 승인하는 기능으로 의원들 간 토론이 벌어지는 일은 좀체 없기 때문이다.

소위원회는 다양한 전문가를 불러 강연을 듣고 공부를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첫 번째 강의 테마는 인공지능, 두 번째 테마는 교육이었다. 사회보장 연구가 주 목적이었지만 미래 국민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레일로부터의 해방’을 기본으로 소위원회가 제안한 ‘후생노동성 분할안’ ‘인생 100년 시대의 사회보장으로’ ‘어린이보험 도입’ 등은 당 내외서 큰 화제를 불렀다. 고이즈미 소위원회의 제안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위해 2017년 4월 자민당 내에 ‘인생 100년 시대의 제도설계 특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어 9월에는 아베 내각도 ‘인생 100년 시대 구상회의’를 발족했다. 세계 최초로 초고령사회 교육, 고용, 사회보장 등 폭넓은 분야에서 새로운 삶의 모델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100세 시대. 고이즈미 신지로와 젊은 의원들이 주창한 새로운 일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일본의 차기 리더들이 만든 ‘인생 100년 시대의 국가전략’의 주요 골자를 살펴보자.

1. 레일로부터의 해방

현재 일본 사회보장은 고령자 중심으로 젊은 세대가 모든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고령화가 진전될수록 그 부담은 커질 것이다. 때문에 나이가 아닌 소득과 자산에 따른 ‘전 세대형 급부, 부담’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사회보장의 기본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사회 전체가 지원하는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입사원 일괄채용, 종신고용에 의한 생활보장, 이를 토대로 설계된 국민개보험(전국민보험), 개연금(전국민연금) 등의 획일적인 일본형 경제 모델은 ‘제1창업기’이다. 가속화하는 인구감소와 고령화사회에서는 제1창업기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고령화를 역으로 강점으로 바꾸는 새로운 경제사회상, 즉 ‘제2창업기’가 필요하다. ‘제2창업기’에는 인공지능, 로봇 등 혁신적인 기술이 키워드이다. 65세 이상 일할 의욕이 있는 고령자, 일과 육아를 양립하려는 여성도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전직(轉職), 교육개편 등을 통해 연령·성별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2. 인생 100년 시대 사회보장으로!

‘레일로부터의 해방’을 구체화한 것이다. 제2창업기 사회안전망으로 전 노동자를 위한 사회보험제도 창설을 제안했다. 현재 기업의 후생연금과 건강보험은 정규직 중심이다. 일정 소득과 노동시간이 충족되지 않으면 가입이 힘들다. 이를 주 20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이면 정규직·비정규직 관계없이 사회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보험료 부담은 그대로 유지하되 저소득 노동자의 보험료는 면제 또는 경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해고 규칙을 재검토하고 재교육·재취업 지원을 확대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같은 개혁에 의해 일시적으로는 노동비용이 확대되겠지만 보험료 면제·경감 등으로 세후 소득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받게 될 연금도 보장되고 청년들의 장래에 대한 불안도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청년 절반 가까이가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장래 무연금·저연금 고령자가 늘어 생활보호비가 급증할 우려가 있다. 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직·겸업·부업이 쉬워지면 기업도 근로자도 선택의 여지가 많은 노동시장이 형성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3. 인생 100년형 연금

연금수급 개시 연령의 유연화를 제안하고 있다. 현재의 연금제도는 후생연금 보험료를 납부할 수 있는 연령이 69세, 수급 개시도 70세까지는 해야 한다. 연금을 수급하면서 일을 계속하면 연금이 감액되는 체계(재직노령연금)인데, 이는 일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고령자의 취업을 막을 우려가 있다. 70세가 넘어도 연금보험료를 납부할 수 있도록 하고, 연금수급 개시연령(현행 60~70세)도 유연화하는 방향으로 재직노령연금을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4. 건강 골드면허

의료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수명연장은 의료간병비의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현행 제도는 건강관리를 제대로 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보험료의 자기 부담은 같다. 이대로는 건강관리를 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운전면허증의 골드면허처럼 건강 골드면허를 도입하자는 것. 또 현행제도에서는 경증·중증 질환이 똑같은 부담인데 공적보험의 적용범위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5. 어린이보험

아이가 있든 없든 사회 전체가 육아를 책임지는 ‘어린이보험’을 도입하자는 제안이다. 공적연금처럼 개인·기업으로부터 보험료를 거둬 육아를 지원하는 새로운 사회보험제도를 만들자는 것. 사실상 전체 국민인 사회보험 가입자가 아이들을 키울 재원을 부담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저출산으로 젊은 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사회보장제도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사회 전체의 리스크가 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제안 내용은 이렇다. 2017년 기준 근로자, 사업주의 연금, 의료, 개호(간호), 고용 사회보험료의 부담은 모두 15.275%였다. 여기에 근로자·사업주 각각 보험료율 0.1%(연소득 400만엔 세대의 경우 월 240엔 부담)를 더 부담하면 약 3400억엔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 그 재원으로는 아동수당 월 5000엔을 추가로 지원할 수 있다. 또 보육시설 등을 확대해 대기자 수를 줄임으로써 유아교육, 보육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보육원 대기자 수를 ‘0’으로 하는 것이 목표이다. 최종적으로 보험료율을 0.5%(연 400만엔 세대 월 1200엔 부담)까지 올리면 약 1조7000억엔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는 아동수당 2만5000엔 추가지원과 유아교육, 보육의 무상화를 이룰 수 있다.

이 중에서 ‘어린이보험’은 고이즈미 소위원회의 핵심 정책이다. 고이즈미 의원은 지난해 5월 소위원회의 논의를 바탕으로 ‘어린이보험’을 주창하고 나섰다. 아베도 고이즈미 의원의 제안을 적극 검토했다. 경제재정운용 기본방침에 ‘어린이보험’ 문구를 넣을 것을 지시하고 ‘인생 100년 구상회의’를 구성했다. 10월 중의원 선거에서는 유아보육·교육의 무상화가 골자인 ‘2조엔 패키지’를 핵심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아베가 최종 발표한 ‘2조엔 패키지’에 어린이보험은 포함되지 않았다. 아베는 재원마련 방안을 어린이보험 대신 2019년 10월로 예정돼 있던 소비세 인상분 1조7000억엔과 기업출연금 3000억엔으로 충당하기로 결정했다.

어린이보험이 빠진 배경에는 아베 총리와 고이즈미 의원 간의 미묘한 정치적 관계가 숨어 있다. 지난해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가케이학원’ 스캔들로 위기에 처해 있던 아베는 고이즈미의 인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이즈미가 제안한 ‘어린이보험’을 수용하는 척하면서 고이즈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선거의 얼굴로 활용했다. 실제 중의원 선거 때 아베를 제치고 고이즈미에게 지원유세 요청이 쏟아졌다. 전국을 누비고 다닌 고이즈미 지원유세에는 마치 아이돌 공연처럼 팬들이 몰려들었다.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후 ‘어린이보험’은 자취를 감췄다. 아베에게 고이즈미의 효용가치는 다했던 셈이다. 오히려 선거를 거치면서 고이즈미의 존재감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졌다. 오는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3선을 노리는 아베에게 고이즈미는 견제의 대상이 됐다. ‘디플레이션 탈출’을 최우선 정책으로 내걸고 있는 마당에 개인의 부담을 늘리는 ‘어린이보험’을 채택해 고이즈미를 키워줄 필요가 없었다. 자민당 내부에서는 아베가 처음부터 소비세 인상분을 재원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고이즈미의 대표정책인 어린이보험은 애초에 실행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도 아베의 계산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동안 아베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지난해 8월 개각 때 아베가 제의한 관방장관직을 거절하고 아베를 비판하는 발언을 심심찮게 내놓았다. 중의원 선거 개표일에도 고이즈미는 NHK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민은 아베 정권에 점점 권태감을 느끼고 있다. 가케이학원 등을 포함해 아직 불신을 가지고 있는 국민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하는 등 아베와 각을 세워왔다. 아베가 ‘2조엔 패키지’의 일부 재원인 3000억엔을 기업에 부담시키겠다는 발표를 하자 “당과 협의가 없었다. 이런 식이면 당의 존재 이유가 없다”면서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둘째 아들이다. 2008년 부친이 정계은퇴를 하면서 지역구인 가나가와 11구를 물려받았다. 28세에 처음 당선돼 벌써 3선 의원이다. 일본 총리의 필수 코스로 알려진 자민당 청년국장, 내각부 및 부흥담당 정무관(차관급) 등을 거쳤다. 잘생긴 외모에 겸손함까지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언변이 뛰어나 그의 연설을 들으면 누구나 팬이 된다고 한다. 대중적 인기만큼은 차기 총리로 꼽히고도 남는다. 지난 연말 출간된 ‘인생 100년 시대 국가전략’에는 고이즈미의 철학과 국가관이 담겨 있다. 무라이 히데키, 고바야시 후미아키 등 ‘고이즈미 소위원회’에 참가했던 의원들은 당의 요직으로 들어갔다. 500일 동안 그들이 고민하고 설계한 국가전략은 새로운 일본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 100세 시대, 다음 100년을 위한 준비가 일본에서는 벌써 시작됐다.

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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