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무력과 경제 병진 노선을 강조하는 포스터. ⓒphoto KCNA
북한이 핵무력과 경제 병진 노선을 강조하는 포스터. ⓒphoto KCNA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 세계에서 분쟁을 가장 많이 일으켜온 대표적인 국가로 꼽힌다. 분쟁의 씨앗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인도 대륙이 1947년 종교(힌두교·이슬람)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하면서 뿌려졌다. 양국은 국경 지역에 있는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세 차례 전쟁까지 벌였다. 카슈미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대부분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지만 영토의 대부분은 인도가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양국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국지전까지 벌일 정도로 대립해왔다. 특히 양국은 1998년을 기점으로 모두 핵실험에 성공해 핵보유국이 됨으로써 카슈미르 분쟁이 격화할 경우 핵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 국제정치학에는 ‘안정과 불안정의 역설(stability-instability paradox)’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는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이 갈등 해소를 위해 핵무기를 동반한 전면전은 자제하지만, 그보다 낮은 수준의 무력 사용을 동반한 국지전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려고 할 가능성은 오히려 높아진다는 말이다. 이 이론에 가장 적합한 사례가 1999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카슈미르 지역에서 벌였던 카길전쟁(Kargil War)이었다. 이 전쟁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파키스탄이 국지전을 벌이더라도 인도가 함부로 맞서지 못할 것이라고 오판해서 일으킨 것이었다. 파키스탄은 또 국제사회가 핵전쟁을 예방할 목적으로 적극 개입해 인도에 자신들의 점령을 용인하도록 압력을 넣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파키스탄은 국제사회로부터 침략자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고, 인도와의 전쟁에서도 패배했다.

인도·파키스탄의 교훈

카길전쟁 이후에도 파키스탄은 인도에 다양한 형태의 도발을 계속 감행해왔다. 파키스탄의 이런 행태는 핵보유국이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파키스탄은 핵 공격이 아닌 인도의 재래식 공격이라 할지라도 자국의 생존이 위태로운 경우에는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원칙까지 천명해왔다. 이 때문에 카슈미르 지역은 ‘서남아시아의 화약고’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분쟁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례는 한반도에도 적용할 수 있다. 북한은 그동안 제1·2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목함 지뢰 등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도발을 해왔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북한이 협정을 위반한 건 모두 42만여건이나 된다. 이 가운데 중대한 위반 사례만 지난해 말 기준으로 3000건이 넘는다. 북한이 핵보유국이 된다면 지금까지의 도발들을 뛰어넘는 행동을 벌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이 백령도 등 서해 NLL 지역의 도서들을 기습 점령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한국은 속수무책이 될 수 있다. 핵보유국인 인도조차 파키스탄의 도발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핵이 없는 한국이 핵무장한 북한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김정은이 제7차 당대회 때 주장한 것처럼 북한은 대외적으로 자신들이 핵 공격을 받거나, 재래식 공격이라 할지라도 체제 도전과 위협을 받을 경우엔 가차 없이 핵 사용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북한은 한국이 참수작전을 통해 수뇌부(김정은)를 타격할 경우에도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다. 김정은은 지난 3월 5일 한국의 대북특사단을 만나 남북 정상회담 개최와 북한의 비핵화 의지 및 북미 대화 의사를 밝혔다. 수석대북특사인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방북 결과 언론 발표문에서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하였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고 말했다. 정 실장은 “남북과 북미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북측은 추가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 전략도발을 재개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고 밝혔다. 정 실장은 또 “북측은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를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했다”면서 “(김정은이)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고, 선대의 유훈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고 덧붙였다.

김정은의 이런 발언은 과거 북한의 전략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은 1994년 미국과의 제네바협상 때도 체제 안전 보장을 요구했다. 당시 미국이 이를 약속하고 경수로를 제공하기로 하면서 제네바합의를 도출했지만 북한은 핵 개발을 계속했다. 2005년의 9·19 공동성명도 마찬가지다. 당시 북한은 6자회담에서 모든 핵무기를 포기하고 미국은 이에 대한 대가로 평화협정 체결과 핵무기 불사용 등을 북한에 약속했다. 하지만 북한은 2006년 제1차 핵실험을 실시하면서 9·19 공동성명을 파기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로 북한과의 핵 협상을 벌였던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태평양 차관보는 “김정은의 발언은 과거의 발언들과 매우 비슷하다”면서 “이번 발언이 사실이라면 북한이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힐 전 차관보는 또 “북한의 핵무기는 정권 생존 목표가 아니라 미국과 한국을 갈라놓기 위해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2008년 영변 5MW 원자로의 냉각탑올 폭파하는 쇼를 하고 있는 모습.
북한이 2008년 영변 5MW 원자로의 냉각탑올 폭파하는 쇼를 하고 있는 모습.

실제로 북한은 애초부터 한반도 평화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것도 체제 유지가 아닌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6·25전쟁 직후부터 소련에 과학자들을 보내어 교육을 받도록 하는 등 핵무기 개발에 나섰고, 1963년 소련으로부터 IRT-2000 연구용 원자로를 지원받음으로써 실질적인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다. 북한은 또 1986년부터 영변에 건설한 5㎿급 원자로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등 핵보유국이 되려는 계획을 착착 진행해왔다. 북한은 6·25전쟁을 통해 달성하지 못했던 한반도 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다. 북한의 의도는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통해 핵이나 미사일 개발 동결의 대가로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영구 중단을 시작으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미동맹은 와해되고 북한은 한반도 적화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마이크 폼페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김정은은 핵무기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 아래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 행보를 보이는 의도는 비핵화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미국을 겨냥해 ‘우리 민족 대 미국의 대결 국면’으로 전환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북한은 자신들의 핵무기가 민족공동 자산이라며 동족이 아닌 오로지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북한의 의도는 이른바 ‘핵 있는 평화(nuclear peace)’ 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핵 있는 평화’는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인 케네스 왈츠의 이론이다. 왈츠는 ‘상호확증파괴(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때문에 핵보유국들 간의 평화가 보장된다면서 핵무기가 많을수록 전쟁을 방지하고 세계평화에 유익하다고 주장했다. 왈츠의 논리는 핵보유국들이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에 대한 대가가 너무 크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핵심은 선제 핵 공격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제2차 보복타격 능력’을 포함한 ‘공포의 핵 균형’을 구축할 경우 평화를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왈츠의 이론을 한반도 상황에 적용한다면 한국도 북한처럼 핵을 보유해야 한다. 이 경우 한국과 북한이 공포의 핵 균형을 통해 평화체제를 보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과 대화와 협상을 통해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일부 정치 세력과 학자들은 한국의 핵 보유를 절대 반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이 핵을 보유해도 한반도에 평화가 가능할 것인가. 우리나라 국민들 중 상당수는 북한이 동족인 한국을 핵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북한은 6·25전쟁을 일으켜 한국을 적화통일하려고 했었다. 북한은 그동안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등 한국에 대한 온갖 위협을 해왔다. 그랬던 북한의 김정은이 남북 정상회담은 물론 북미 대화에도 나서겠다는 입장을 보인 것은 미국 등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에 따른 경제·외교적 고립국면을 타개해 보겠다는 절박한 몸짓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한반도 평화 정착 방안을 논의하겠다는 것도 대북 제재 완화를 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정은이 핵과 재래식 무기를 한국에 사용하지 않겠다고 확약했다는 것은 다분히 우리나라 국민을 향한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 김정은이 무엇을 담보로 자신의 이런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정은의 발언은 핵을 그대로 보유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때문에 한국의 입장에선 북한의 비핵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북한의 핵을 머리 위에 이고 살 수는 없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6차 핵실험과 11회의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으며, 핵 무력 완성도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의 외교·안보 참모들과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 등 대통령 주변 인사들은 북한의 핵개발은 미국으로부터 체제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이런 대북정책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한국을 겨냥한 게 아니고, 남북관계만 개선되면 북한도 변할 것이란 선의를 전제로 깔고 있다. 문 대통령이 “미국은 대화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의 ‘통 큰 제의’를 마치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인다면 북한의 기만전술에 당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항공모함 3척과 한국 함정들이 지난해 11월 동해에서 연합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photo 미 해군
미국 항공모함 3척과 한국 함정들이 지난해 11월 동해에서 연합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photo 미 해군

“과거에도 많이 듣던 소리”

트럼프 미국 정부가 북한과의 어떤 대화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라는 분명하고 확고한 목표를 갖고 진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도 바로 북한의 기만전술에 속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이다. CVID는 비핵화에 대한 가장 높은 수준의 표현이다. 트럼프 정부가 그 어느 때보다 북한의 비핵화에 강력한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트럼프 정부는 비핵화를 북·미 대화의 입구에 두겠다는 것으로, 문재인 정부의 ‘동결→폐기’라는 2단계 비핵화 해법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역대 미국 대통령들과 비교할 때 북한의 비핵화를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6일 김정은의 비핵화 대화 의지를 표명한 데 대해 “북한과의 대화에 있어 가능성 있는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면서도 “헛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미국은 어느 방향이 됐든 열심히 갈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앞으로 전망에 대해 “무슨 일이 생길지는 매우 불확실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언급은 북한의 시간 벌기식 협상 전술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란 강한 의지를 표명함과 동시에 북한이 비핵화에 나서지 않는다면 군사 옵션도 검토할 것이란 의도를 내비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트럼프 정부의 고위 관리들과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도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다. 미국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DNI)의 댄 코츠 국장은 “과거의 모든 노력은 실패했고 단지 북한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줬을 뿐”이라면서 “북한은 핵보유국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해야 하고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북한과의 합의는 없다”고 밝혔다. 백악관의 한 고위 관리도 “북한의 의도가 핵무기를 계속 만들 시간을 벌려는 것이라면 대화는 절대로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부 군축담당 특보는 “북한 정권이 진정으로 비핵화를 할 준비가 돼 있다는 어떤 확신도 이번 발표에서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에번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는 “북한 정권의 이런 입장은 과거에도 많이 듣던 소리”라고 밝혔다. 동북아 전문가인 고든 창 변호사는 “한국에서 6월에 실시될 지방선거를 의식해 북한이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트럼프 정부의 입장은 CVID가 북한 비핵화의 목표이자 기준이며,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북·미 대화는 없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평화공세 앞에 흔히 따라붙는 표현은 ‘위장’이라는 단어다. 북한은 그동안 가짜 평화를 수없이 말해왔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는 한 남북관계를 아무리 개선해 봤자 별로 의미가 없다. 핵은 그대로 놔둔 채 ‘우리 민족끼리’를 외쳐 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 관영 노동신문은 최근 논평(2월 23일자)에서 “핵을 포기할 것을 바라는 것은 바닷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논평이 김정은의 속내일 것이다. 때문에 북한이 강조하는 ‘핵 있는 평화’는 허구라고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인 한스 모겐소는 일찍이 “핵 보복 능력이 없는 국가는 핵보유국의 위협에 미리 항복하든지 아니면 핵 공격을 받아서 초토화된 이후에 항복하든지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핵 있는 북한’과 평화 공존할 수 없는 한국의 입장에선 북한의 비핵화만이 평화는 물론 생존의 필수조건이자 목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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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전 한국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전 주간한국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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