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개혁개방을 선포했다.”

북한 조선노동당은 지난 4월 21일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 결정서를 발표했다. 결정서는 “우리 공화국이 세계적인 정치사상 강국, 군사 강국의 지위에 확고히 올라선 현 단계에서 전당 전국이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하는 것, 이것이 우리 당의 전략적 노선”이라고 밝혔다. 조선노동당의 이 결정 발표 이틀 전부터 중국의 SNS 웨이신(微信)에서는 “조선이 개혁개방을 선포한다”는 뉴스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선이 개혁개방을 하면 투자를 해야 하는 곳은?”이라는 물음에 대한 수많은 Q&A가 뒤따랐다.

중국 SNS에서 북한이 실제 개혁개방을 할 경우 투자할 대상은 대체로 이렇게 순위가 정리됐다. 첫째 북한의 부동산 중에서도 평양 최고층인 류경호텔의 리모델링과 같은 관광업 관련 투자, 둘째 인구 2500만의 ‘소국(小國)’이 싼 노동력을 활용해서 ‘세계의 또 다른 공장’이 될 상황에 대비한 제조업에 대한 투자, 셋째 현재 휴대전화 사용인구가 300만명에 불과한 통신과 인터넷 관련 사업에 대한 투자.

물론 중국 내에서는 이런 장밋빛 전망과 함께 부정적인 견해도 나왔다. “조선이 개혁개방을 한다고?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닐 텐데….”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해외판 칼럼 ‘협객도(俠客島)’는 조선노동당 7기 3차 전원회의가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한다”는 결의를 발표하자 다소 부정적인 전망을 소개했다. 협객도는 “현재 조선의 개혁은 물이 절반쯤 채워진 병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 이유로는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에 필수적인 평화 확보, 다시 말해 핵무기 포기가 선포되지 않고, 핵실험 중단과 핵실험장 폐기만 발표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선포한 것은 40년 전인 1978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를 통해서였다. 1976년 9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죽고 당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해 “평화의 요소가 전쟁의 요소보다 커져서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게 됐으며, 장기적인 평화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면서 “평화와 발전이 이 시대의 양대(兩大) 주제”라고 제시했다. 마오쩌둥이 19세기 최대 강국 영국과 20세기 최대 강국 미국과의 한판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며 제시한 ‘초영간미(超英赶美)’라는 국가전략을 ‘화평발전(Peaceful Development)’이라는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바꾼 것이다.

당시 덩샤오핑은 중국의 국가전략이 “한판 전쟁에 대비하는 것”에서 “평화 속에서 경제건설에 전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증거로 미국 방문을 택했다. 마오쩌둥이 평생 적으로 간주했던 미국과 1979년 1월 수교를 단행한 데 이어 그해 9월에는 중국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했다. 덩샤오핑은 미국 방문에서 당시 카터 미 대통령과 활짝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어 전 세계에 보여줬다. 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미국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중국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덩샤오핑은 1985년에는 350만명 정도이던 인민해방군 병력을 250만명으로 줄이는 실천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덩샤오핑의 그런 평화공세의 목적은 중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직접투자(FDI)를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덩샤오핑은 그런 대외적인 조치에 앞서 국내 정치적으로도 경제건설에 집중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해나갔다. 인민 모두가 잘사는 ‘다퉁(大同)사회’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스템에서 중산층이 적절히 확보된 ‘샤오캉(小康)사회’로 당과 정부의 정책 최고목표를 바꿨다. 이를 위해 11기3중전회에서 ‘사상해방(思想解放)’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당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했다. 마오쩌둥이 죽기 직전에 후계자로 선택한 화궈펑(華國鋒)이 말한 이른바 ‘양개범시론(兩個凡是論)’을 뒤엎은 것이다. ‘양개범시론’은 마오쩌둥이 죽기 전에 한 지시와 내린 결론은 무엇이든 옳다는 유훈통치 방침이다. 덩샤오핑은 이미 죽은 사람이 내린 지시와 결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상을 해방해야 하며, 지나간 과거보다는 당장의 현실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실사구시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이를 통해 당의 이념문제를 정리한 것이다.

덩샤오핑은 이러한 조치들을 내리면서 당원들과 인민들 사이에서의 사상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당의 기본 방침이 ‘하나의 중심과 두 개의 기본점’이라고 정리해주었다. 여기서 하나의 중심은 ‘경제건설이 가장 중요한 중심점’이라는 의미다. 이와 함께 “사회주의와 인민민주독재, 중국공산당의 영도,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등 ‘네 가지의 이념’과 ‘개혁개방의 견지’라는 이념이 당의 기본점”이라고 제시했다. 덩샤오핑은 이와 함께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다”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채택할 수 있다”(사회주의 시장경제론), “부자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죄악이 아니라 누구든 먼저 부자가 되어야 모두들 잘살 수 있게 된다”(선부론)는 전략적 문구들을 만들어 냈다. 덩샤오핑의 이런 정책 방향 개혁과 이데올로기 전환 등을 중국 사회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으로 정리해서 받아들였다.

과거와의 단절이 시작이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성공적인 경제발전으로 이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받는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토지 공유와 인민공사 제도를 폐지시키는 데서 출발했다. 토지를 농민가정에 실제로 배분하는 혁명을 단행한 것이다. 진(秦)나라 이후 2300년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실제 농토를 배분받은 중국 농민들은 매년 생산량을 3배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그런 변혁이 현재의 중국 경제발전의 토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과연 김정은이 이런 덩샤오핑의 뒤를 따라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김정은은 덩샤오핑이 제시했던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라는 과거와의 단절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김정은이 나서야 할 과거와의 단절은 바로 김일성·김정일과의 단절이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과 함께 추진한 개인숭배 금지에 따라 중국 전역에서는 마오쩌둥의 동상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천안문의 마오쩌둥 초상화는 덩샤오핑의 특별 지시로 그대로 걸어두었지만 마오쩌둥의 동상들은 대부분 철거됐다. 김정은도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 초상화를 제거하는 작업에 나설 수 있을까. 스위스 유학파 김정은이 프랑스 유학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뒤따라 가려면 과거 사상과 단절하고 현실로부터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 그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ㆍ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ㆍ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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