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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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 국가원수는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전 오른팔인 무사 쿠사 정보국장을 영국에 특사로 파견해 핵을 비롯해 대량살상무기(WMD) 문제에 대해 미국과 협상할 의사를 전달했다. 영국 해외정보국(MI6)은 토니 블레어 총리의 지시에 따라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카다피의 이런 뜻을 전달했다. 이때부터 조지 테넷 CIA 국장과 리처드 디어러브 MI6 국장 및 쿠사 국장 간의 3각 비밀 채널이 가동됐다. 테넷 국장은 쿠사 국장에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제시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가 이뤄져야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카다피가 부시 대통령의 제안을 수용하면서 협상은 급진전됐다. 이후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서 카다피와 CIA 부국장 간의 비밀 심야 협상이 여러 차례 열렸고, 그 결과로 CIA 요원들은 리비아가 신고한 모든 핵시설과 화학무기 저장시설 등을 사찰했다. 미국은 리비아가 대량살상무기를 모두 폐기하자 그 대가로 리비아에 대사관을 설치하고 경제제재를 공식 해제했다.

지난 3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신임 미국 국무장관과 김정은 위원장. ⓒphoto 뉴시스
지난 3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신임 미국 국무장관과 김정은 위원장. ⓒphoto 뉴시스

리비아 비밀협상과 빼닮은 폼페이오 방북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CIA 국장 시절인 지난 3월 31일과 4월 1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났다. 폼페이오 국장의 방북은 한국의 서훈 국정원장과 북한의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3각 비밀 채널을 통해 성사됐다. 폼페이오는 CIA 국장 전용기를 타고 오산 미 공군기지를 거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폼페이오는 백악관이나 국무부 관계자 없이 CIA 요원 6명만을 데리고 갔다. 폼페이오는 김 위원장과 1시간 동안 북한의 비핵화 방안을 논의했다. 김 위원장은 폼페이오에게 최장 수년이 걸릴 수 있는 일정표에 따라 서로 양보 조치를 병행하는 방식의 단계적·동시적 비핵화 방안을 제시했다. 김 위원장이 지난 3월 26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미국과 단계적·동시적 조치로 비핵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던 주장을 반복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 중단과 핵 실험장 폐기를 약속하면서 비핵화 의지를 보였다. 이러한 김 위원장에게 폼페이오는 트럼프 대통령이 강조해온 CVID라는 방안을 제시하면서 설득했다. 폼페이오의 방북과 김 위원장과의 만남은 과거 리비아와의 비밀 협상과 매우 유사하다. 다만 김 위원장이 현재로선 카다피와는 달리 미국이 제시한 CVID 방안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국제사회의 관심이 앞으로 열릴 미·북 정상회담에 집중되고 있다. 남북 정상은 지난 4월 27일 판문점선언을 통해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와 종전 선언 및 평화협정 체결 추진’에 합의했지만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때문에 미·북 정상회담에선 북한 비핵화를 어떤 방식으로 언제까지 실현할 것인지를 논의해야만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엇보다 북한 비핵화의 원칙과 방식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28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북한의 평화롭고 번영하는 미래는 북한의 CVID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도 “CVID를 실현할 때까지 북한에 대한 최대의 압박을 계속할 것이며 제재를 해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샌더스 대변인은 “우리는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순진하지 않을 것이며 과거 정부의 실수를 되풀이하지도 않을 것”이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나쁜 합의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왔다”고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판문점선언에 명시된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는 CVID의 부분집합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말 그대로 ‘완전한 CVID’가 아니기 때문에 미·북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CVID를 수용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비핵화의 방식과 관련해선 트럼프 대통령은 단계적·동시적 비핵화를 주장하는 김 위원장에게 이른바 ‘빅뱅 방식’의 비핵화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빅뱅(Big Bang)은 137억년 전 우주를 탄생시킨 대폭발을 말하는데, 빅뱅 방식은 한꺼번에 비핵화와 보상 문제 등 모든 사안을 일괄 타결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관련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4월 29일 폭스뉴스·C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2003~2004년 리비아식 모델을 상당히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볼턴 보좌관은 “미국이 양보하기 전에 북한이 핵무기와 핵연료, 미사일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것이냐”고 사회자가 묻자 “나는 그것이 비핵화의 의미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북한이 먼저 핵무기를 폐기해야만 북한의 체제 보장과 관계 정상화, 경제 지원 등이 이뤄질 수 있다는 뜻이다. 리비아식 모델은 ‘선(先) 핵폐기·후(後) 보상’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볼턴 보좌관은 “리비아의 프로그램은 북한보다 훨씬 더 작았다”고 밝혀 리비아식 모델로 하되 일부 변용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는 또 “북한이 전략적 결정을 했다면, 우리가 보기 원하는 것은 수사가 아닌 진짜 증거”라며 사찰을 통한 핵 포기의 구체적 증거를 수차례 강조했다.

불가역적 증거나 조치 있어야 보상

볼턴 보좌관의 이런 언급을 볼 때 트럼프 정부는 미·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와 보상 등이 일괄 타결될 경우 북한이 어느 정도의 비핵화 목표 지점에 도달하고 이에 대한 ‘불가역적인 증거나 조치’가 확보되면 보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트럼프 정부는 북한이 과거 비핵화 약속을 수차례 어겨왔기 때문에 비핵화 이전에 제재 해제는 없다는 입장을 거듭 피력해왔지만 제재 해제는 단계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만큼 단계적 제재 완화에 앞서 북한에 ‘불가역적인 조치나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그동안 핵동결→불능화→폐기로 가는 3단계 비핵화와 함께 단계별로 미국의 경제, 외교 및 안전보장 조치 등 보상을 요구했었다. 북한은 이 과정에서 보상만을 얻어내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계속해왔다. 때문에 볼턴 보좌관은 단계별로 무조건 보상해주는 과거 방식에 대해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실제로 볼턴 보좌관이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 시절 주도했던 리비아 핵 폐기 작업의 큰 틀은 ‘선 핵폐기·후 보상’이었지만 리비아가 육불화우라늄과 원심분리기 2대 및 부품 등을 미국에 넘기는 등 ‘불가역적인 조치’를 취하자 제재를 단계적으로 해제했다.

특히 볼턴 보좌관은 비핵화는 북한 비핵화이지 한반도 비핵화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그는 “북한은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핵무기와 우라늄 농축, 플루토늄 재처리 등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며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대상은 남과 북이지 미국은 결부되지 않는다”고 밝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핵우산 등은 대상이 아님을 지적했다. 북한이 주장해온 한반도 비핵화는 자신들만 비핵화 조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도 핵이 없어야 하고, 주한미군에도 없어야 하고, 미국 핵우산도 폐기해야 하고, 전략자산을 전개하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1992년 2월 19일 ‘남북기본합의서’와 함께 발효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르면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配備), 사용 등을 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턴 보좌관은 미·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할 비핵화는 북한 비핵화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와 함께 핵 폐기의 시한도 구체적으로 정하고 이행기간도 최대한 짧게 하는 것을 북한에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언론들은 핵 폐기 시한을 ‘6개월∼1년’으로 못 박고 북핵 문제의 완전 해결 시점을 2020년으로 정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오는 11월의 중간선거와 2020년 대선을 목표 시점으로 삼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는 북핵 문제 해결을 최대의 외교·안보 성과로 내세우면서 중간선거에서 승리하고 대선에서도 재선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볼턴 보좌관도 “북한이 빠르게 비핵화를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비아의 경우 2003년 12월 핵 포기를 선언한 이후 1년10개월 만인 2005년 10월에 들어서야 핵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했다. 북한은 리비아 때보다 더 빠르게 핵 폐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트럼프 정부는 핵동결과 핵시설 불능화 및 검증과 사찰, 핵무기와 핵물질 폐기 등의 수순을 밟으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만큼, 마지막 단계인 핵무기와 핵물질 폐기 조치를 초기 단계에서 일부 시행할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리비아보다 더 빠른 핵 폐기 요구할 듯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요구를 김정은이 수용할지 여부를 놓고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린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과 폼페이오 장관은 낙관적이면서도 한편으로 경계심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를 표명한 것은 고무적”이라면서도 “과거처럼 북한에 속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미·북 정상회담에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면서 “회담 성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럴 경우 회담장을 떠날 것”이라고 밝혔다. 폼페이오 장관은 “김 위원장과 만남의 목표는 진정한 기회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고,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폼페이오 장관은 “그동안 약속들이 맺어지고 희망이 커졌다가 내동댕이쳐진 많은 역사가 있다”면서 “우리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고 행동을 지켜볼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패트릭 크로닌 신안보센터 아시아태평양 안보소장은 “북한이 여전히 핵보유국으로 남길 원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로버트 매닝 애틀랜틱 카운슬 선임연구원은 “북한이 비핵화에 진지하다면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면서 “김정은이 미·북 정상회담에서 2020년까지 CVID에 합의한다면 체제안전 등 원하는 걸 빨리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수미 테리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한국담당 보좌관은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마주 앉아서도 원칙적으로 일반적인 성명이나 합의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앤서니 블링큰 전 국무부 부장관은 “북한이 리비아식 모델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중국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면서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정부의 또 다른 요구사항은 북한의 완벽한 사찰과 검증 수용이다. 미·북이 비핵화에 합의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검증과 사찰에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될 수 있다. 미·북 간 수차례의 합의가 그동안 파기된 결정적 요인은 사찰과 검증에 있었다. 북한은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 핵시설을 동결·봉인하기로 했으나 검증 수위를 놓고 강제사찰을 요구해온 미국과 갈등이 불거졌다. 결국 6자회담이 결렬됐다. 제1차 북핵 위기도 검증 문제로 발생했다. 북한은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플루토늄 양을 신고했으나 IAEA는 1993년 이에 의문을 제기하며 미신고 시설에 대한 사찰을 요구했지만 이에 반발한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불신하면서 검증해야 한다”

북한의 핵물질과 핵무기 등 사찰과 검증 대상은 광범위하다. 영변 핵시설에만 390여개의 건물이 있다. 고농축우라늄 시설들도 은닉된 상태다. 핵물질과 핵무기 및 ICBM 등을 지하터널과 군기지 등에 숨겨놓을 경우 찾아내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비핵화의 검증과 사찰 강도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트럼프 정부는 북한이 핵무기, 핵물질, 핵시설, 핵기술, 인적자원 목록 등을 정확하게 신고하고 북한의 어느 지역이든 불시에 전면 사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트럼프 정부는 미국의 주도로 북한 비핵화를 사찰·검증하고 이를 IAEA 및 국제기구를 통해 확인받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볼턴 보좌관은 “리비아의 경우 미국과 영국의 사찰단에 핵시설들을 전면 개방했다”며 “이 때문에 리비아의 비핵화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옛 소련과의 군축 회담에서 “신뢰하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고 강조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말을 북한에 적용한다면 “불신하면서 검증해야 한다(Distrust and verify)”가 될 것이다. 아무튼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미·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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