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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호] 2018.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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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문재인- 콜 총리처럼 신의 옷자락 잡으려면

김택환  경기대 특임교수 

photo 뉴시스
“역사 속을 신(神)이 지나갈 때 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책무다.”
   
   1871년 처음으로 독일 통일을 달성한 철혈 재상 오토 비스마르크가 한 말이다. 이런 인상적인 말을 남긴 ‘백색의 혁명가’에 대해서는 독일 지식인들 모두가 정치적 이념에 상관없이 높이 평가한다. 2010년 작고한 좌파 성향의 비스마르크 최고 연구자인 엥겔베르크 교수 역시 “그 누구도 비스마르크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창조적 상상력을 당해내지 못 한다”고 평가한다.
   
   ‘신의 옷자락’이 소중한 이유는 아무때나 함부로 잡아채서는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건국의 주역으로 활동한 기민당 소속의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를 보자. 그는 2차 대전 이후 공산 진영의 패권국인 소련의 권력자 스탈린이 제기한 ‘중립국 통일론’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미국과 프랑스 등 ‘서양의 양탄자’ 위에 올라타야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거짓된 신의 옷자락은 잡아채기를 거부한 셈이다.
   
   실제 그는 자신의 믿음과 판단대로 ‘서방정책’에 기반해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는 진짜 신의 옷자락이 언젠가는 온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1959년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소련이 언젠가는 독일 분단과 이로 인한 유럽 분단이 자신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면서 “그런 순간이 가까이 오면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기민당 전당대회장에는 29살이었던 청년 당원 헬무트 콜이 아데나워 총리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젊은 시절 들었던 아데나워의 말을 직접 실천했다. 통일의 문이 조금 열리기 시작할 때 앞장서서 그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후예답게 동물적 감각으로 ‘역사 속 진짜 신의 옷자락을 잡아챈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 누구도 그로부터 ‘통일의 주역’이라는 타이틀을 빼앗을 수 없게 자신이 직접 역사를 써내려갔다.
   
   콜 총리 이전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비전의 정치가’ 빌리 브란트 총리였다. 사민당 소속이었던 그는 패권국가인 미·소가 만든 냉전 질서를 해체하는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했다. 이전 정권이 시행한 동·서독 올림픽 공동 입장과 단일 팀 같은 이벤트보다 동·서독 인민의 교류와 동서 유럽의 화해·협력에 앞장선 것이다. 콜이 통일의 열매를 딸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으로 거리가 먼’ 전임자 브란트를 자신의 멘토로 삼은 것이 한 요인이었다. 콜은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의 기반 위에서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융합하는 통합의 정치로 통일의 문을 열어젖혔다.
   
   
▲ 1987년 9월 서독 본에서 열린 헬무트 콜 총리(왼쪽)와 동독 호네커 서기장의 3차 정상회담.

   독일이 NATO 잔류 결정한 배경
   
   지난 4월 27일 개최된 3차 남북 정상회담보다 31년 전인 1987년 9월 서독 본에서 헬무트 콜 총리와 동독의 호네커 서기장 간의 3차 정상회담이 열렸다. 당시 동·서독 양 정상은 ‘과학기술 및 의학 협력 협정문’에 서명했다. 서독 출신인 호네커는 1933년 이후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해 여동생을 만나기도 했다.
   
   당시 콜 총리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동독 주민의 엑소더스(대탈출)가 시작된 1989년 여름까지 특별한 업적도, 대중적 인기도 없던 콜은 총리직 사퇴까지 고민할 만큼 녹초가 돼 있던 상태였다. 당시 기민당 수뇌부는 총선에 대비해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젊은 주지사인 로타 슈페트를 차기 총리 후보감으로 치켜세울 정도였다. 반면 사민당의 총리 대항마로 꼽혔던 브란트의 ‘정치 손자’인 오스카 라퐁텐은 의기양양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던 상황에서 콜 총리는 ‘역사 속 신이 지나가는 옷자락을 붙잡고’ 변혁기 역사를 만들어냈다.
   
   “톡 탁 톡 탁.”
   
   1989년 11월 26일 헬무트 콜 총리는 과거 자신이 박사학위 논문을 썼던 구식 타자기를 꺼내 ‘독수리 타법’으로 뭔가를 치기 시작했다. 루트비히스하펜시 인근의 오거스하임이라는 고향 마을 작은 집에서 그는 독일 통일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바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유럽 통합’의 지붕하에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외교안보보좌관 텔치크 등 극소수만 이 작업에 참여했다. 이틀 후 콜 총리는 본의 의회에서 이를 발표했고, 그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맞았다. 정치지도자는 위기 때 총칼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비전과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한다는 걸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1989년 7월 동독 주민의 엑소더스부터 1990년 10월 3일 통일까지 15개월 동안 20세기 독일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이 연출됐고 그 주역은 단연 콜이었다.
   
   콜 총리가 통일의 주역이 된 데는 무엇보다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지켜나갔기 때문이다. 우선 콜은 총리 취임 후 미국·프랑스와의 동맹을 최우선으로 하는 ‘서방정책’을 굳건히 붙잡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선임자인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했다. 무엇보다 그는 동·서독 관계를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묶어놓고 싶어했고 이를 위해 동독에 대한 지원과 대화 창구 유지를 중시했다. 기민당 내에 이견도 있었지만 콜은 집권하자마자 동독 정부에 유리한 조건으로 10억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했다. 1973년부터 1989년까지 서독이 동독에 제공한 지원금액은 총 917억마르크였다. 하지만 이는 공짜가 아니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동·서독 주민 사이의 서신 교환, 전화 통화, 상호 방문 등 인도주의적 조건을 달성했다.
   
   콜에게는 동·서독 인민의 실핏줄 연결이 최우선이었다. 그 덕에 1984년 한 해 서독에서 동독을 방문한 이가 500만명, 동독에서 서독을 방문한 인구가 160만명을 넘어섰다. 34개 동·서독 도시가 자매결연을 했고, 종교 및 스포츠 교류도 대폭 늘었다. 동독의 정치범을 돈으로 사는 ‘프라이 카우프’도 활성화됐다. 이를 위해 서독은 통일 전까지 정치범 3만3755명에 대해 35억마르크(1조7500억원)를 지불했다. 1인당 5만마르크(약 2500만원)를 준 셈이다. 콜이 인도적으로도 통 큰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콜은 또 소련의 최고권력자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도 지원했다. 그는 소련에 대해 35억마르크의 차관과 선진기술을 제공했다. 콜은 역사학도답게 역사 속 신의 행보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소련의 붕괴는 곧 동독 정권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내다봤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정권은 건국 40주년을 맞이해 여느 해와 다름없이 군사퍼레이드를 벌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고르바초프는 “너무 늦게 오는 사람의 인생은 벌을 받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동독 정권을 겨냥해 개혁하지 않으면 몰락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이는 동독 정권에 치명타였고, 실제 고르바초프의 이 말 이후 동독에서는 대규모 주민 탈출과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최대 쟁점은 통일 독일이 소련에 대항해 만들어진 집단안보체제인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남느냐 마느냐는 문제였다. 이 논란 속에서도 콜 총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뿐 아니라 서방과의 연대도 포기하지 않았다. 콜 총리의 파트너였던 미국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도 당시 고르바초프에게 “통일 독일이 NATO에 잔류해도 소련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결국 콜 총리는 고르바초프와 1990년 7월 16일 독·소 코카서스 정상회담에서 NATO 잔류를, 그리고 9월 12일 ‘2+4 모스크바 회담’을 통해 완전한 주권 회복에 따른 독일 통일을 문서로 보장받았다.
   
   콜 총리가 NATO 잔류를 결정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요즘 우리와는 다른 국내 상황도 영향이 있었다. 당시 서독 내부에서는 오늘날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것과 같은 미군 철수 논란이 없었다. 서방과의 연대를 통해 경제가 번영했고, NATO가 유럽의 안보를 확실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인식이 확고했기 때문에 통일 후에도 미군이 독일에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었다.
   
   통일된 지금도 미군은 독일에 주둔하고 있는데 실제 독일 통일 이후에도 미군의 주둔은 유럽 안보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인식이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 “통일이 되더라도 주한미군의 역할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벌써부터 평화협정 체결을 주한미군 철수로 연결시키는 우리 사회의 인식과 언급들은 경망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시 8번, 미테랑 10번, 고르비 4번
   
   콜 총리는 통일 논의 과정에서 미·프·소·영 등 주요 국가 리더들을 좌우 정파 가리지 않고 친구로 만들었다. 통독 전 10개월 동안 콜은 부시를 8번, 미테랑을 10번, 고르바초프를 4번이나 만났다. 통일 과정에서 이들 국가와의 신뢰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화 정치’의 귀신이기도 했다. 주요 현안에 대해 미국 부시 및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 등에게 항상 전화로 상세히 설명을 했다. 이들 주요국 리더들이 아쉬워하는 정보를 주면서 지원을 받는 노련함을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런 콜 총리처럼 역사 속 신의 옷자락을 잡을 수 있을까. 늦었지만 한반도는 격변기에 들어섰다. 독일에 비하면 역사의 지체라 할 수 있다. 이제 판이 너무 커져버려서 돌이키는 것은 모두에게 부담이다. 하지만 3차 남북 정상회담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험할 수 있다. 1차 관건은 5월 말에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 평화열차의 출발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다. 이를 통해 남북 관계의 진일보한 개선뿐 아니라 북한의 경제 개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평화와 번영, 통일로 가기 위해선 여러 단계가 필요하다. 먼저 평화협정과 북·미 수교가 성사되어야 한다. 이어 북한이 개혁개방을 한 후 국제 사회가 참여한 ‘뉴 마셜 플랜’으로 경제 발전에 성공해야 명실상부한 남북한 경제공동체로 도약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개성공단 같은 저임금 하청산업이 아니라 4차 산업혁명 메카로의 북한식 점프가 필요하다. 나아가 남북한을 포함해 동북아 경제공동체가 건설되고, 새로운 안보체제가 형성될 때 통일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본다. 필자가 최근 독일 베를린에서 만난 구 동독의 마지막 총리 로타 드메지어는 “대한민국 통일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군·교육 시스템 등 점진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서독 3차 정상회담 이후 3년 만에 구 동독 공산정권이 무너졌다. 동독 인민의 민주화운동,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 콜 총리의 리더십,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의 지원 등이 통일의 주요 동력이었다. 역사 속 신은 지금 통일 한국을 향한 옷자락을 펼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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