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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4호]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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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뉴스] 조남기와 김종필, 한·중 두 거목 마지막 길은 너무 달랐다

김대현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 빈소를 찾아 조문하는 대신 화환만 보냈다. photo 뉴시스
▲ 조남기 전 정협 부주석 빈소를 직접 찾아 유가족을 위로한 시진핑 주석. photo 뉴시스

   2018년 6월, 충청도 출신의 ‘큰 별’ 두 개가 졌다. 한 명은 중국 베이징에서, 나머지 한 명은 서울에서. 조남기(91) 전 장군과 김종필(92) 전 국무총리의 얘기다.
   
   충청도 출신이면서 한 살 터울로 동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 공교롭게도 동년 동월에 생을 마감했다. 군인 출신이면서 동시에 정치가로 성장한 두 사람은 각각 한국의 국무총리와 중국의 부총리급 고위직을 지냈다는 유사점이 있다. 생전에 두 사람은 인연을 맺었을 법한데, 후일담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아직 없다. 두 사람의 차이점이라면 당대 거목(巨木)을 떠나보내는 양국의 추모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는 정도다.
   
   
   ‘조선족의 우상’에 대한 중국의 예의
   
   ‘조선족의 우상’으로 추앙받던 조남기 장군은 지난 6월 17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1927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난 그는 1939년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 지린성 옌지현으로 건너가 자랐다. 이후 중국 동북군정대학과 총후근학원을 졸업하고 1945년 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 조 장군은 지린성 토지공작대원을 거쳐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군 후근부 기획수송과장으로 참전했다. 당시 그는 펑더화이(彭德怀) 중국인민군 사령관의 한국어 통역을 맡기도 했다.
   
   전쟁영웅으로 살아돌아온 그는 지린성 옌볜의 정치위원장을 맡아 입지를 다졌으나 1960년대 말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모든 관직에서 해임되는 수난을 겪었다. 조 장군이 다시 관직에 돌아온 것은 1973년. 퉁화군구 정치위원, 지린성군구 부정치위원, 옌볜자치구 제1서기, 총후근부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한 그는 인민해방군 중앙군사위원 및 군사과학원장까지 지내고 1997년 퇴역했다. 조 장군은 총후근부장을 지낼 때 이미 인민군 최고 계급인 상장을 달았다.
   
   1998년 조 장군은 군복을 벗은 지 1년 만에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9기 전국위원회에서 군부 대표로 부주석(부총리급)에 선출됐다. 중국 전체 소수민족 가운데 최고의 지위였다. 이후 그는 한국과의 교류와 지원에 힘을 보탰다. 2000년과 2004년 두 차례 중국 국제우호연락회 최고고문 자격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했고, 국내 대기업이 중국에 진출해 사업을 도모할 때면 직접 현장을 찾아 한국 방문단을 환대해주기도 했다. 2000년 말에는 청원 오송단지 개발에 중국 측이 투자협약을 맺도록 가교 역할도 했다.
   
   조 장군의 영결식은 7일장 마지막날인 지난 6월 25일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 대례당에서 열렸다. 바바오산 혁명공묘는 장관급 이상 국가 지도자가 사망했을 때 사용하는 장례식장이다. 이날 영결식에는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롯해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조문을 다녀간 것으로 알려졌다.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도 애도를 표하기 위해 영결식장을 찾았다. 중국 지도부가 영결식장에 출동한 것을 두고 중국 내 언론들은 “공산주의 수호와 무산계급 혁명을 이끈 지도자에 대한 예우인 동시에 소수민족을 대하는 중국 지도부의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라고 해석했다.
   
   조선족 출신의 이선호 실크로드국제교류협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조 장군님은 중국의 최고 영도자 중 한 분이다. 군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조선족의 위상을 제고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영결식에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의 조선족 대표자들이 대거 베이징 영결식장을 찾아 애도를 표했다.”
   
   조 장군 역시 공과에 대한 평가가 있지만 중국 지도부는 고인이 세운 공적만을 주로 언급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집권한 뎡샤오핑이 ‘공칠과삼(功七過三)’을 언급하며 마오를 포용한 이후 중국 지도부가 보여온 포용력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는 분석도 나온다.
   
   조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일주일 뒤인 지난 6월 23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향년 92세로 일기를 마감했다. JP는 며칠 전부터 곡기를 들지 못해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얘기가 언론과 정치권을 통해 회자됐다.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은 서둘러 JP를 찾아 생전 마지막 인사를 나눈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JP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굵직한 궤적을 남기며 정치사의 변곡점마다 빠짐없이 등장한 인물이다. 그가 없으면 설명이 불가한 정치적 사건도 한둘이 아니다.
   
   1926년 1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JP는 공주중·고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대에 진학했다 중퇴하고 대전사범대에 들어갔다. 1945년 충남 보령군 소재 천북초등학교(초등학교)에서 2개월간 교편을 잡았던 그는 다시 서울대 사범대에 진학했지만 대학 3학년 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1949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이때부터 JP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1951년 박정희 당시 대령의 조카딸 박영옥과 결혼한 JP는 1961년 5월 박정희와 함께 5·16쿠데타를 주도하며 군부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당시 그의 계급은 중령이었다. 1963년까지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을 지내다 준장으로 예편한 그는 공화당 창당위원장으로 정치권에 입문하게 된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JP는 이후 11대를 제외하고 16대까지 내리 9선의 고지에 오른 한국 최다선 국회의원이었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내며 유신정권을 보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 이후 잠시 정계를 떠났지만 1987년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와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영원한 2인자의 쓸쓸한 퇴장
   
   1987년 대선에서 야권 분열로 낙선한 그는 1990년 노태우·김영삼과 함께 3당 합당에 동참한다. 이렇게 태동한 민주자유당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배출한 후 정치적으로 위기에 놓이자 1995년 2월 탈당해 충청 기반의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이후 1996년 총선에서 50석의 자민련 소속 국회의원을 배출하며 충청의 맹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그가 언급한 ‘핫바지론’ 등이 지역정서를 파고들자 정치권에서는 그를 정치적 수사의 달인으로 부르기도 했다.
   
   1997년 대선에서는 ‘킹메이커’로 나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 기반이 된 DJP연합을 성사시켰다. 김대중 정부에서 두 번째 국무총리에 오른 JP는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고 1년 뒤인 2004년 4월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이후에도 충청권 유력 정치인들이 그의 조언을 구하러 청구동 JP 자택을 수시로 드나들며 ‘제2의 JP’를 꿈꿨으나 아직 그의 족적을 넘어선 이는 나오지 않았다.
   
   2차례 국무총리를 지내고 충청의 맹주이자 정계의 어른으로 떠받들여지던 JP.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그의 빈소를 찾지 않았다. 청와대는 이와 관련 “문 대통령이 훈장을 추서하러 가는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유족에게 예의를 갖춰 애도하라’고 했다. 문 대통령의 조문은 이것으로 갈음한다”고 밝혔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6월 23일 빈소를 찾아 1시간30분가량 자리를 지켰고 문 대통령을 대신해 한병도 정무수석이 빈소를 찾아 조문하기도 했지만 거목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장면이 중국과 비교된 것이 사실이다. 한국 정치의 ‘영원한 2인자’의 퇴장이 ‘1인자만 살아남는’ 한국 정치의 옹졸함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온다. JP의 장지는 고인의 뜻에 따라 국립현충원이 아닌 부인 박영옥 여사가 묻힌 부여의 선산으로 정해졌다.
   
   일부 친문 지지자들과 시민단체는 정부가 JP에게 수여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철회하라는 주장까지 펴고 있는데 이에 대해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공과는 있다. 국무총리를 두 차례나 역임한 전 국가 지도자의 빈소를 현 최고 지도자가 찾지 않았다는 것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낸 대한민국의 품격에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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