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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7호] 201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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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北·日 정상회담 최대 난제

납북자 문제의 정치학

배연홍  자유기고가·전 선데이마이니치 기자 

▲ 지난 6월 14일 아베 일본 총리(오른쪽)가 일본인 납북자 가족 대표들과 면담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3차례의 북·중 정상회담, 2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6월 12일 사상 최초의 미·북 정상회담까지 실현시켰다. 김정은 위원장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도 의지를 보이고 있어 과거 6자회담 참가국 중 대북 강경 일변도인 일본만이 ‘모기장 밖’에 놓이는 신세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기대온 아베 외교 역시 노선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라는 압력에 직면했고, 이에 따라 16년 만에 북·일 정상회담을 본격적으로 모색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북한의 대응은 냉담하다. 일본이 제기한 납치 문제를 이미 끝난 일이라고 자르면서 ‘우리나라의 대외적 이미지에 흙칠을 하려는 것’이라고 오히려 일본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6월 28일자)은 “과거 청산부터 성실히 하여야 한다”며 관계개선의 의지를 시사했다. 국교정상화로 얻게 될, 100억달러에 이른다는 거액의 투자 원조금을 염두에 둔 언급으로 보인다.
   
   2002년 9월 17일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에서 회담을 열고, 양국 간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정상화를 조기 실현한다는 ‘평양선언’을 발표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의 통절한 반성과 사과를 표명하고, 국교정상화 이후 무상자금협력과 저금리의 장기차관 제공 등을 실시하기 위한 협의를 하기로 했다. 북한은 ‘일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걸린 현안 문제’, 즉 일본인 납치 문제에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확인했다. 김정일은 이때 “1970~1980년대 특수기관에 망동주의, 영웅주의가 있었다. 유감스러운 일이며 사과한다”고 스스로 납치를 인정하고 사죄했다.
   
   이때 북한은 일본 당국이 파악하고 있지 않았던 피해자를 포함해 ‘5명 생존, 8명 사망’이라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생존자 5명이 24년 만에 귀국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망했다는 8명의 정보에 모순점이 많아 북한의 의도와 달리 일본의 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후 일본 정부가 인정한 납치피해자는 17명에 이르렀으며, 귀국한 5명을 제외한 12명의 생존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판단됐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그동안 납치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자 노력해왔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진전되지 않았고 북한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을 강행함으로써 평양선언은 이름만 남게 되었다.
   
   앞으로 미·북 외교가 진전돼 비핵화에 성과가 있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북·일 외교도 시작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경제 지원은 한국과 일본이 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팬 패싱’은 한국의 부담이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납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평양선언의 이행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납치는 김정일 정권 아래서 일어난 국가범죄로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직접적 책임은 없다. 김정은 위원장이 전면적인 해결에 나서 지도력을 보여준다면, 이는 경제개혁에 필요한 자금을 힘 안 들이고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납치 문제가 해결될 전망은 매우 어두워 보인다.
   
   일본인 납치 의혹이 처음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1988년 1월 15일 KAL기 폭파사건 실행범인 김현희 전 공작원이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일본인화를 교육했던 ‘이은혜’가 납치된 일본인 여성이었다고 증언하면서부터였다. 2년 후 일본의 사이타마현 경찰은, 이은혜가 다구치 야에코(1978년 실종·당시 22세)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같은 시기에 개최된 북·일 교섭에서 의제가 되자 북한은 교섭을 결렬시켰다. 1978년 여름 일본 각지에서 발생한 3쌍의 아베크족 실종 사건도 북한의 범행일 것이라는 의혹이 있었으나 확실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후 상황이 급변한 것은 1997년이다. 한국 당국이 전해준 망명 공작원의 증언에 따라, 1977년 니가타현에서 실종된 여중생 요코타 메구미(당시 13세)가 북한에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사망자 8명에 대한 북한의 거짓말들
   
   이은혜라고 특정되고 있던 다구치 야에코는 물론이고 여중생 납치 사실도 강하게 부정하던 북한이 고이즈미 총리가 방북했던 북·일 정상회담에서 범행을 인정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이 일본 측에 전달한 피해자 정보의 내용이다. 사망했다는 8명 대부분이 20~30대의 젊은 시절에 교통사고나 심장마비, 연탄가스중독, 자살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특별관리되었던 일본인 납치피해자 숙박시설은 난방을 전기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수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연탄가스중독은 가능성이 낮다. 심장마비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베크족 실종 사건 중 하나인 이치카와 슈이치와 마스모토 루미코의 경우를 보면, 납치 이듬해인 1979년 7월에 둘이 결혼했는데 같은 해 9월에 남편인 이치카와 슈이치가 원산 해수욕장에서, 2년 후에는 아내인 마스모토 루미코가 심장마비로 연달아 사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귀국한 납치피해자 중 한 명은 1981년 10월까지 마스모토 루미코와 함께 생활했는데 결혼이나 남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 북한은 사망한 8명 가운데 6명의 유해가 세 곳의 묘지에 매장되었으나 모두 홍수로 유실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이 유골을 돌려보낸 것은 요코타 메구미와 마쓰키 가오루(남성), 두 사람뿐이다. DNA 감정 결과 그 유골 일부분에서 각각 다른 사람의 DNA가 검출되었다. 마쓰키 가오루의 뼛조각이 본인의 신체적 특징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결과도 나와 있다.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에도 문제가 있었다. 요코타 메구미는 납치된 한국인 김영남과 1986년 8월에 결혼해 다음해 9월에 딸 은경을 출산했다. 그 후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져 ‘49호예방원’(평양시 승호리)에 입원했다가 자살했다고 한다. 사망확인서의 사망일에는 담당의가 ‘1993년 3월’이라고 기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귀국한 납치피해자에게서 다음 해인 1994년까지도 요코타 메구미를 봤다는 증언이 나오자, 북한은 김일성 생일 직전인 ‘1994년 4월’로 사망일을 수정했다. 그런데 이 역시 거짓이라는 것이 귀국한 납치피해자들의 증언으로 확인되고 있다. 1994년 4월 요코타 메구미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는 운전기사의 증언이 대표적이다. 그는 메구미가 입원한 곳은 평양이 아니라 평안북도 의주에 있는 49호예방원이었다고 들었을 뿐만 아니라 두 달 후인 6월에는 요코타 메구미가 이웃에 혼자 이사왔다는 것을 기억한다고 증언했다. 거짓에 거짓을 거듭하며 북한은 반론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요코타 메구미는 사망 후에 매장했으나 3년이 지난 1997년 봄 무렵 전 남편 김영남이 대동강 남쪽에 있는 평양시 낙랑구역에 있는 ‘오봉산봉사사업소’(화장장)에서 화장했다고 한다. 일본에 전달된 메구미의 유골이 이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월간조선 보도에 따르면 그 오봉산봉사사업소가 완성된 것도 1999년이어서 이 역시 앞뒤가 어긋나게 됐다. 애초에 북한에 유골을 보관하는 관습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김현희 증언 부정이 거짓말의 목적
   
   북한은 요코타 메구미와 다구치 야에코 두 사람이 1981년부터 1984년까지 공동생활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다가 다구치 야에코가 일본인 납치피해자와 결혼하면서 따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2년 후인 1986년 남편이 병사하고, 같은 해에 다구치 야에코도 원산에서 휴양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식령에서 군부대 차량에 부딪치는 사고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측의 정보는 다르다. 일본인 납치피해자가 많이 살고 있던 평양 남쪽의 중화군 충룡리 초대소에서 두 사람이 1983년부터 1985년까지 공동생활을 했다는 것이 일본 측이 파악한 내용이다. 북한의 주장과는 시기가 미묘하게 어긋난다. 이들과 같은 초대소에서 살았던 일본인 납치피해자들은 1986년 평양 북쪽의 태양리 초대소로 옮겨졌는데 여기서도 이상한 증언이 나왔다. 초대소의 운전기사에게서 “평양 시내 백화점(낙원백화점)에서 다구치 야에코씨가 쇼핑하는 것을 봤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1986년 10월의 일이라고 한다. 다구치 야에코가 사고로 사망한 지 2개월이 더 지난 시점이다.
   
   다구치 야에코가 살아 있다는 인상을 주는 증언은 또 있다. 그 무렵 다구치 야에코가 일본인 납치피해자가 아니라 ‘의거자’(월북자)와 결혼했다는 소문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의거자는 김영남과 같은 한국인 납북자로 대남공작기관에 관여하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필자가 파악한 다구치 야에코에 관한 마지막 증언은 “야에코씨가 ‘적공지’라 불리는 곳으로 갔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한 전 공작원 K씨를 최근 서울에서 만날 기회가 있어서 적공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 이렇게 답했다. “아마도 ‘적공국(敵工局)’이라고 한 걸 일본인이니까 ‘적공구’라고 잘못 듣고는, 부서를 뜻하는 ‘局’을 지역을 뜻하는 ‘區’로 잘못 이해하여 비슷한 의미의 ‘地’, 그러니까 ‘적공지’라고 왜곡해서 기억했는지도 모르겠다.” 적공국이란 ‘적군와해공작국’의 약칭으로, 말 그대로 한국군을 와해하기 위한 대남심리작전을 행하는 부서를 가리킨다.
   
   북한이 다쿠치 야에코와 요코타 메구미의 공동생활 시기 등 사실과 다른 조사 결과를 강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김현희의 증언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승무원과 승객 115명의 목숨을 앗아간 KAL기 사건은 한국에 대한 최대 테러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북한을 ‘테러 지원국가’로 지정했다. 공작기관에 이용당한 다구치 야에코와 요코타 메구미가 만약 살아 있다면, 북한에 치명적인 증언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그 밖의 다른 일본인 피해자들에 관한 정보가 모순되는 것도 이들이 대남공작에 관여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6·25전쟁 때 월북해서 노동당 중앙당 대남공작에 오래 관여했던 귀순자 신평길은 저서 ‘김정일과 대남공작’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을 공작 거점으로 한 우회침투공작이 적극화, 다양화된 것도 이 시기 대남공작의 또 다른 특징적 양상이었다.” 나아가 이런 언급도 있다. “한편 납북 어부를 포섭하여 이들을 내륙지역(한국) 공작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한 공작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국 정부가 파악한 납북자는 516명이다. 납북자가족회가 독자적으로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이 중 적어도 150여명의 생존이 확인된 상태다. 그러나 올해 8월에 실시되는 남북이산가족재회사업에서 이들이 가족과 재회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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