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을 ‘재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인사들이 최근 공공기관이나 정부 입김이 닿는 단체의 장(長)으로 속속 자리를 잡고 있다. 해당 분야 전문성이나 이력이 눈에 띄지 않는 이들을 두고 낙하산 논란도 일고 있다. 만약 이들이 ‘대통령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기관이나 단체의 장이 됐다면 전 정부의 정실인사를 단죄해온 현 정부의 적폐청산이 또 한 번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들의 인사 과정에 문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는지, 아니면 대통령 주변의 과잉충성이 빚은 결과인지도 한번 따져볼 대목이다.

최근 낙하산 논란을 일으킨 문 대통령의 친구 중 한 명은 지난 6월 27일 신임 한국화학섬유협회(이하 화섬협회) 회장으로 선임된 김국진 전 호국문화진흥위원회 감사다. 김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경남중학교 동기동창이다. 김 회장은 경남고 입학 당시 재수를 해 고교는 1년 늦게 졸업했다. 부산 출신인 김 회장은 1972년 경남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고려대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대입 재수를 한 문재인 대통령도 72학번(경희대 법학과)이다. 김 회장은 1987년 경남지역에 자리를 잡고 농업용 지지대와 텐트용 폴더 등을 주로 제작하는 중소기업을 설립해 2012년까지 대표이사를 지냈다.

화섬협회는 코오롱·대한화섬·태광·효성·도레이·성안합섬 등을 회원사로 둔 단체다. 회원사들은 주로 화학섬유를 이용해 스포츠웨어, 인조피혁, 안전벨트 등의 제품을 만든다. 산업통상자원부에 속한 화섬협회 회원사들은 정부 정책에 민감하다. 그래서 줄곧 고위 공직자 출신을 회장으로 선임해 대정부 업무를 맡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협회 설립 55년 만에 처음으로 중소기업인 출신의 김국진씨가 회장으로 선임됐다.

전임 회장 연임 3개월 만에 사퇴

이에 앞서 화섬협회 전임 박승훈 회장은 지난 2월 연임에 성공하고도 3개월여 만에 돌연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해병대 준장 출신인 박 전 회장은 예편 후 국정원 고위직을 거쳐 2015년 화섬협회장에 취임한 바 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 시절 고위 공직자 출신을 영입해온 관례에 따라 화섬협회장으로 선임됐고, 지난 2월 회원사 만장일치로 연임안이 승인됐다.

박 전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퇴와 관련, 회원사 안팎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인사정책에 호응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왔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회장 교체에 대한 모종의 메시지를 화섬협회 측에 전달한 게 아니냐는 얘기였다. 화섬협회 관계자도 “소관부처인 산업부 의견을 반영해 회장을 선출한다”고 말했다. 회원사 입장에서 보면 정권과 소통이 원활한 인사를 회장으로 영입하는 게 유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회원사의 만장일치로 연임된 전임 회장이 연임 성공 몇 개월 만에 물러나고 그 뒤를 이어 중소기업인 출신의 회장이 선임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취재 결과 김국진 회장은 화섬협회장에 취임하기 전 청와대로부터 공공기관 감사직도 제안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문 대통령의 친구인 김국진씨에게 코트라 감사직을 제안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본인이 고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대신 화섬협회장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코트라는 김 회장의 화섬협회장 취임과 비슷한 시기 신임 감사를 임명했다. 김애경 전 BC카드 컴플라이언스 실장이 감사로 선임됐는데 1962년 코트라 출범 이후 첫 여성 감사라고 한다.

지난 7월 5일 출범한 한국해양진흥공사 사장에 임명된 황호선 전 부경대 명예교수도 문재인 대통령의 경남중·고 동기동창이다. 한국해양진흥공사는 해운산업 육성을 위해 지난 7월 5일 공식 출범했는데 해양수산부가 공사 초대 사장으로 황 전 교수를 임명했다. 공사 설립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대선 공약 중 하나였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황 사장은 늦깎이 유학을 떠나 1996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부터 부경대 국제지역학부 교수로 일해왔다. 한때 해양수산부 정책자문위원 등을 지냈지만 경제학자인 그가 해양진흥공사를 이끌 해운과 항만의 전문성을 갖추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름 부를 정도로 막역한 친구

황 사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격의 없는 친구 사이로 알려져 있다. 부산 경실련 등 지역 내 시민사회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해온 그는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부산지역 진보 지식인들이 모여 설립한 시민사회연구소 초대 소장과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문 대통령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황 교수도 선거를 도우며 문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가 됐다. 2014년 문 대통령의 국회의원 지역구였던 부산 사상구청장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올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황 사장은 한국해양진흥공사 사장 선출 당시 김연신 전 성동조선 사장, 나성대 한국선박해양 사장 등과 함께 최종 후보 3인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가 가장 유력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황 사장은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이론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홍장표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문 대통령에게 천거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지난해 대선 당시 문 대통령에게 경제 관련 조언을 해줄 인물로 홍장표 부경대 경제학부 교수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홍 교수가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운 경제학계 비주류 이론가였음에도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배경에 황 사장이 있었다는 얘기다.

언론인 출신 중에서는 조양일 전 연합뉴스 논설주간이 문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다. 문 대통령과 경남고 동기인 조양일 전 주간은 2010년대 초반 삼성에스원 상임고문으로 자리를 옮긴 뒤 6~7년간 일했다. 지역 정가에는 그가 지난 두 차례 대선 과정에서 문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조 전 주간은 문재인 정부 들어 일부 기업에서 핵심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본인이 고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KT 계열사인 스카이라이프 대표직을 제안받았다고 한다.

업계 사정에 밝은 한 인사의 설명은 이랬다. “올 초 KT 측에서 조양일씨 측에 계열사 대표이사를 제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황창규 회장 교체론이 나오고 있는 데다 정치권에 쪼개기 후원금을 제공한 혐의로 황 회장이 경찰 조사를 받는 상황을 감안해 조씨가 거절했다고 들었다. 청와대에서는 황창규 회장이 문 대통령 친구를 계열사 사장에 임명함으로써 일종의 ‘보험’을 들려 한 게 아니냐면서 불쾌해했다.” 정치권 주변에서는 문 대통령과 가까운 조씨가 기업이나 미디어 관련 기관에 조만간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1978년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양통신에 입사한 조씨는 이후 사명을 바꾼 연합뉴스에서 32년간 재직했다.

그러나 조씨는 주간조선과의 전화통화에서 “KT 측에서 자리 제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KT 측의 한 관계자도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씨는 “지난 대선 당시 어떤 역할을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친구니까 (대선 때) 동문들 만나 도와주자는 정도의 역할은 했다”고 답했다. 그는 삼성에스원을 그만 둔 요즘 “새 일자리를 찾아보고 있다”면서도 “공기업 같은 곳에 갈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경남중·고 동문들이 문 정권 들어 ‘몸값’이 치솟는 현상에 대해서는 “예상 밖의 결과”라는 반응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재직할 당시 동문들의 민원을 일절 받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학연으로 얽히는 것을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해 동문들과 거리를 멀리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문 대통령도 2012년 대선 패배 이후에는 국내 최고 명문고인 경남중·고 동문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동문들과 소통을 늘리며 세를 모으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대선 기간 경남고 원로 동문들이 문재인 후보를 불러 현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등 ‘면접’을 봤다는 얘기도 나왔다. 실제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보수 텃밭인 부산에서 38%의 득표를 거둬 자유한국당 후보인 홍준표 후보(31%)를 제쳤다.

대학 동문 거취도 주목

문 대통령의 대학 동문 중에도 막역한 친구들이 있다. 지난 4월 보수단체의 대표격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에 취임한 박종환씨가 대표적 인물이다. 박 총재는 경희대 법학과 72학번으로 문 대통령과 대학생활을 함께했다. 대학 재수를 한 문 대통령이 나이는 한 살 위지만 두 사람은 사법시험 준비를 함께하며 우의를 다진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대학 졸업 후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문 대통령이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반면 박 총재는 1981년 경찰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경위로 채용됐다. ‘경찰의 꽃’으로 불리는 치안감까지 승진한 박 총재는 2009년 경찰학교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2012년·2017년 대선에서 문 대통령 당선을 위해 비선에서 움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총재와 가까운 익명의 인사는 “박 청장(충북경찰청장을 지냄)은 문 대통령과 서로 말을 놓고 지낼 정도로 가깝다. 부부끼리도 자주 만나는 사이다. 지난 대선 때 방한한 중국 측 고위인사가 문 대통령과 비공개리에 만나는 자리에도 박 청장이 동석하는 등 매우 친하다”고 말했다.

박 총재는 지난해 5월 문 대통령 당선 직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알려진 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이 뉴질랜드로 떠난 시기와 비슷했다. 박 총재는 양 전 비서관보다 이른 지난해 여름 귀국했는데 이때 문 대통령은 박 총재 부부를 청와대로 불러 함께 식사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총재는 얼마 뒤 다시 중국으로 출국해 한동안 체류했었다.

자유총연맹 총재 자리는 전임 김경재 총재가 인사청탁 및 배임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다가 지난 2월 말 사퇴의사를 밝히고 물러나면서 공석이 됐다. 이 직후부터 후임 총재로 박종환씨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박씨를 총재로 선임하기 위해 정부가 측면지원을 했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이세창 자유총연맹 총재 권한대행은 지난 4월 일부 언론과 만나 “행정안전부 차관과 국장이 최근 나를 찾아와 ‘단일후보로 해달라’ ‘후보 모집을 외부에 공고하지 말라’ 는 요구를 했다”면서 외압 의혹을 폭로했다.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박 총재 역시 총재 임명 전에 자유총연맹 시도지부장들과 접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총재는 지난 6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유총연맹 총재가 된 것은 문 대통령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경남고 동문이자 경희대 동문인 공민배 전 창원시장도 문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다. 경희대 재학 시절 공씨는 문 대통령과 상당 기간 같은 하숙집에서 동고동락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군입대 전날에도 공씨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공씨는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경남도지사 출마를 준비하다가 문 대통령의 최측근인 김경수 의원이 출사표를 던지자 출마를 접었다. 경남 지역정가에서는 조만간 공씨가 공공기관장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하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공기업인 대한지적공사 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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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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