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인 2017년 7월 27일. 서울중앙지법에서는 박근혜 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한 1심 선고가 있었다. 이날 선고에 이목이 집중됐던 것은 두 사람이 박근혜 정부에서 차지했던 위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 피고인들에 대한 첫 법원 선고였다는 점에서 관심이 더욱 집중됐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수사했던 박영수 특검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 끊이지 않았던 상황에서 과연 법원은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할까.’ 이것이 이날 법원 선고를 바라보는 법조계 안팎의 관전 포인트였다.

당시 1심 법원은 김기춘 전 실장에게는 명단 작성과 관련해 직권남용과 강요 등의 혐의를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법원은 같은 사안으로 기소된 조 전 장관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조 전 장관의 국회 위증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해 그를 석방했다. 이날 오후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서울중앙지검 13층에 있는 검사장실에서 기자와 함께 TV로 관련 뉴스를 지켜봤다. 윤 지검장은 조 전 장관을 구속기소한 박영수 특검팀의 수사팀장이었고 이후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영전했다. 기자는 윤 지검장에게 ‘법원의 판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윤 지검장은 무덤덤하게 이렇게 말했다.

“검찰은 수사를 해서 기소를 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판단은 법원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이 수사를 하고 구속영장을 치는 일 자체로 이 사회가 조금 더 발전하고 투명해지는 것이다.”

그는 끝내 법원의 판단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법원의 판결에 이렇다 할 반박을 자제하던 윤 지검장은 불과 두 달 뒤 입장을 바꿔 법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법원이 당시 검찰이 공들여 수사하던 국정원 댓글사건과 한국항공우주(KAI) 사건과 관련해 핵심인물 3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모두 기각한 것이 계기가 됐다. 서울중앙지법 오민석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지난해 9월 8일 새벽 공직선거법·국정원법 위반 혐의 및 증거은닉 혐의로 각각 청구된 국정원 퇴직자모임인 양지회 전·현직 간부의 구속영장을 모두 기각했다. 같은 날 권순호 영장전담 부장판사도 검찰이 채용비리와 관련한 업무방해 혐의로 청구한 KAI 경영지원본부장 이모씨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이날 검찰은 기자들에게 법원의 영장기각과 관련한 입장문을 발표했다. 입장문의 작성과 발표는 모두 윤 지검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

“지난 2월 말 중앙지법에 새로운 영장전담 판사들이 배치된 이후 주요 국정농단 사건을 비롯한 국민 이익과 사회정의에 직결되는 핵심 수사의 영장들이 거의 예외 없이 기각되고 있다. 국민들 사이에 법과 원칙 외에 또 다른 요소가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제기되고 있다.”

영장기각에 따른 법원과 검찰의 충돌은 빈번한 일이다. 하지만 검찰이 고위 관계자의 ‘코멘트’가 아닌 ‘텍스트’로 공개 반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후 법원과 검찰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져갔고, 검찰이 법원의 판단을 공개비판하는 것도 다반사가 됐다.

9월 8일 이후에도 사회적으로 주목을 끄는 사건의 핵심 피의자에 대한 법원의 영장기각은 계속 이뤄졌다.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뇌물수수 혐의), 맥키코리아 임직원 3명(맥도날드 햄버거 불량패티 유통 혐의), 김태효 전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군 사이버사령부를 통한 정치관여 혐의),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국정원 특수활동비 수수 혐의)에 대한 영장이 모두 기각됐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법원의 영장기각과 관련해 출입기자들에게 총 9차례 비판 문자를 보내고 한 차례 입장문을 냈다. 지난

1년 동안 법원을 향한 검찰의 비판 수위는 “납득하기 어렵다” “이해하기 어렵다”에서 “비상식적”이라는 표현으로 이어지며 점점 더 거칠어졌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

일련의 영장기각 사태로 극에 달한 법원과 검찰의 갈등은 ‘사법농단’ 사태를 통해 더욱 심해지는 흐름이다. 이른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각종 재판거래 의혹에 대해 검찰이 강제수사에 나서자 법원이 이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검찰은 박근혜 정권에서 법원의 최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권)의 기소를 염두에 두고 수사를 진행 중이다. 검찰이 전 대법원장 자택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한 것은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검찰이 법원을 ‘말’로써가 아니라 ‘수사’로 겨냥하는 일은 흔치 않다. 따라서 검찰 입장에서 이번 수사는 꽃놀이패를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검찰 수사는 점차 강도를 높여갈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에서는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영장이 발부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검찰에 영장 발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분위기다. 절차를 밟아가며 수사를 진행하면, 점차 궁지에 몰리는 것은 법원이기 때문이다. 이미 법원은 검찰 수사를 앞두고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대법관의 하드디스크를 디가우징을 통해 완전히 삭제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비난을 샀다. 법원은 퇴임한 대법관의 하드디스크를 완전 폐기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주장하지만, 법원 내부에서조차 이에 대한 의문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법원의 이런 대응방식은 그야말로 ‘자충수’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 전 처장의 자택에서 검찰이 찾아낸 USB는 법원을 압박할 또 하나의 카드가 될 전망이다. 당장 검찰은 임 전 처장의 USB에서 법원행정처가 2016년 부산지역 건설업자의 뇌물공여 사건 항소심 재판에 관여하려 한 정황이 담긴 문건을 확보했다. 당시 법원행정처가 윤인태 전 부산고법원장에게 재판과 관련해 지침을 내려 이것이 실제로 반영된 사실을 검찰이 밝혀낸다면, 법원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질 수 있다. 게다가 당시 행정처장이 현직 고영한 대법관이란 점을 감안하면, 현직 대법관이 검찰에 불려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것 역시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문건에는 “법원 감사위원회에 문모 판사(건설업자 뇌물공여 사건 항소심 담당판사) 건이 회부되면 관련 사실이 외부로 유출된다” 등 비위행위를 무마하려는 내용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내용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법원은 “검찰이 여론을 통해 피의사실을 공표하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는 2013년 윤석열 현 서울중앙지검장이 직접 수사했던 국가정보원 댓글 사태 때와 비슷한 측면이 많다. 당시에도 검찰의 국정원 수사에는 장애물이 많았다. 국정원이 국가기밀 누설 반대로 압수수색에 저항했고, 결국 검찰은 국정원으로부터 임의로 자료를 받는 방식으로 수사했다. 그런데 검찰이 확보한 자료에 생각지도 못한 실마리가 담겨 있었다.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공작과 관련한 모든 자료가 삭제된 줄 알았던 상황에서, 한 50대 국정원 직원의 개인자료에서 관련 로그파일 하나를 수사팀이 찾아낸 것이다. 이 파일이 수사의 돌파구가 됐고, 이후 검찰이 법원에 청구한 100개가 넘는 통신 관련 영장이 100% 발부됐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윤 지검장은 임 전 처장의 USB가 가지고 있는 폭발력을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검찰이 수사단 규모를 계속 충원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검은 이번 수사를 위해 법무부에 인력 충원을 요청, 법무부와 다른 검찰청 등에서 10여명의 비공식 파견 검사를 차출받았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특수1부(부장 신봉수)와 특수3부(부장 양석조)를 중심으로 꾸려진 사법농단 수사팀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사법농단 수사팀에 참여한 검사는 약 20명 규모로 늘어났다. 서울중앙지검의 전체 검사 숫자가 256명임에 비춰볼 때 중앙지검의 10%에 가까운 검사가 한 사건에 투입된 셈이다. 이는 지난해 3월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활동이 종료된 뒤 출범한 검찰의 국정농단 사건 2기 특수본과 비슷한 규모다.

법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검찰이 이처럼 대규모 수사단까지 꾸려 법원을 압박하면서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뭘까. 검찰 주변에서는 ‘우리만 개혁 대상, 즉 적폐냐’는 것이 검찰 수뇌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검찰은 지난 몇 년간 적폐청산 1순위로 꼽혀왔다.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직자비리수사처, 검경수사권 조정, 개헌을 통한 영장청구권의 재조정 등 다양한 검찰 개혁 방안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검찰은 경찰에 적지 않은 권한을 내줘야 했다. 지난 6월 21일 발표된 검경수사권 조정 합의안은 양 기관을 상호협력 관계로 지정했다. 경찰이 수사하는 사건에 대해 검사의 송치 전 수사지휘도 폐지했다. 검경 관계가 그간 지휘·감독의 수직적 관계를 벗어나 원칙적으로는 수평적 관계가 된 것이다.

검찰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불만을 내놓을 순 없었지만, 이런 방안이 거론될 때마다 검찰 내부 불만의 목소리도 커져갔다. 물을 흐리는 것은 일부 정치검사들인데 이들 때문에 마치 검찰 전체가 ‘거악(巨惡)’으로 비쳐지는 것은 억울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재경지검 한 부장급 인사는 “경찰과 법원 사이에 끼어서 검찰만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측면이 있다”며 “검찰만 적폐청산 대상이자 개혁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법원이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최소화해왔지만 법원 역시 청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며 “이번 사법농단을 통해서 그것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법원에 대한 검찰의 불신은 생각보다 뿌리 깊다. 박영수 특검에 참여했던 한 인사의 말을 보면 그 불신이 잘 드러난다.

“특검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청구한 1차 구속영장이 기각된 적이 있다. 당시 법원이 영장을 기각한 이유는 결과적으로 삼성이 벌이는 광범위한 로비에 대한 소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당시 특검이 이 부회장에게 적용한 혐의는 뇌물공여, 제3자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위증 혐의 등이었다.) 삼성 측 변호를 맡았던 판사 출신 변호사는 ‘삼성이 피해자’라는 프레임으로 영장실질심사에 나섰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인 셈이다. 법원 전례로 비추어봤을 때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때 우리가 미리 준비했던 것이 바로 삼성그룹 장충기 부회장의 휴대폰 문자 내역이었다. 나중에 일부 언론 보도를 통해 공개됐지만, 휴대폰에 담긴 그 문자들은 삼성이 언론과 관(管)을 상대로 얼마나 공세적으로 로비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관련 자료를 첨부한 두 번째 영장심사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법원도 별수 없었던 거다.”

이 인사의 말은 법원 역시 검찰과 다르지 않게 전관예우와 같은 관행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법원은 상대적으로 여론의 비판에서 한발 비켜나 있었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실제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법원의 영장기각은 ‘무리한 검찰의 영장청구’란 부메랑이 되어 검찰을 향했다. 검찰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은 경찰과 권한을 나누는데, 법원의 위상은 여전했던 셈이다.

이런 불만이 검찰 내부에 전반적으로 누적되어 있는 상황에서, 사법농단 사태가 검찰 입장에서는 돌파구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검찰은 이번 수사를 통해 최근 몇 개월간 미투사건이나 강원랜드 수사 등으로 조직에 쏟아졌던 비난 여론을 법원으로 돌리는 데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 검찰이 당분간 사법농단 수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지난 7월 20일에 이어 24일 다시 청구했지만 법원에서 또다시 기각됐다. 그럼에도 검찰 내부 분위기는 다소 느긋한 편이다. 7월 25일 한 검찰 간부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현직 대통령도 불법행위를 저지르면 검찰의 수사를 받는 세상인데, 대법원장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냐”며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국민은 대한민국에서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론을 등에 업었다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검찰의 이번 수사가 검경수사권 합의안의 국회 통과를 앞두고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청와대 주도로 발표했던 수사권 조정안이 9월 정기국회 때 국회로 넘어갈 예정이고, 각 당에서 발의한 몇 건의 검경수사권 조정안도 계류되어 있다. 어느 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느냐에 따라 수사권과 관련한 검찰과 경찰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법사위 소속의 한 야당 의원은 “검찰이 수사권 조정과 관련해서도 유리한 고지를 잡으려면 ‘적폐청산’이란 코드에 계속 맞출 수밖에 없다”며 “검찰이 본업인 수사를 제대로 한다는 인상을 줄 때 수사권 조정과 관련해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박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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