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째 매달 이승만포럼을 열어온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 지난 8월 14일 우남 이승만 애국상을 수상했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9년째 매달 이승만포럼을 열어온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 지난 8월 14일 우남 이승만 애국상을 수상했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장면 세 가지. 1950년 여름 충청남도 당진의 한 교실, 담임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김일성 장군 만세!’ 학급이래봐야 한 학년에 2개인 작은 초등학교였다. 소년은 1학년 때부터 늘 반장이었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외쳤다. ‘김일성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삼창은 여름 내내 이어졌다. 소년은 ‘붉은 소년단’ 단장을 맡아, 동네 어른들을 앉혀 두고 김일성 선전 연설을 했다. 머슴을 두고 산 지주계급이었던 소년의 집이 그해 여름을 버텨낸 건, 어쩌면 소년의 만세 삼창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60년 4월 19일 서울 혜화동 서울대 캠퍼스. 어찌 하다 보니 선봉이었다. ‘부정선거 다시하라!’ 피켓을 든 동기들이 청년 옆으로 바짝 붙어섰다. 서울 대학로에서 광화문 중앙청까지 걸어갔다. 시위대는 다시 경무대로 향했다. 지금의 청와대다. ‘부정선거가 민주주의냐!’ 높아지는 구호 어딘가 총소리가 들렸다. 청년의 친구가 쓰러졌다. 서울대 문리대 3학년생이었던 김치호는 배에 총알 세 발을 맞았다. 병원 이송 직후 숨졌다.

2018년 8월 14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우남 이승만 애국상 시상식’이 열렸다. 사단법인 ‘대한민국사랑회’가 주최했다. 상을 받은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은 수상소감의 대부분을 ‘우남의 진실’을 알리는 데 할애했다. 68년 전엔 김일성 만세, 58년 전엔 이승만 하야를 외쳤던 이가 바로 인 회장이다.

우남은 스스로 하야를 말했다

스물세 살에 한국 최초의 일간지를 창간한 언론인, 거리 투쟁으로 고종에게 입헌군주제를 요구해 관철시킨 정치인, 미국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를 오가며 2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딴 학자, 조선인으로 태어나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 눈을 감은 한국인. 모두 한 사람에 대한 설명이다. 우남 이승만.

생각해보면 역사 교과서에서 그처럼 윤곽이 흐릿한 ‘위인’도 드물다. 기자는 1990년대에 중·고교를 다녔다. 이승만이란 이름은 독립운동사에서도, 현대사 대목에서도 좀처럼 만나지 못했다.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설명을 종합하면 ‘운좋게 미국 유학까지 하고 해외에서 편하게 지내다 광복 후 대통령 자리를 꿰찬 인사, 4·19혁명을 불러온 독재자’쯤이었다. 요즘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이다. ‘친일파를 찾아내 법정에 세우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의 활동은 당시 친일 관료들을 많이 등용하고 있었던 이승만 정부의 갖가지 방해 공작으로 1년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미래엔 중학 교과서)

수상식 전날인 8월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인 회장을 만났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인 회장이 우남을 다시 보게 된 건 조선일보에 몸담고 있던 1995년이었다. “당시 광복 5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는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시회를 크게 열었다. 행사를 준비하며 우남에 대한 자료를 찬찬히 살펴봤다. 그때 깨달았다. ‘독재자가 아니구나.’ 그로부터 5년이 흐른 2000년, 디지털조선일보 대표를 맡고 있을 때였는데 4·19혁명을 전후해 열린 국무회의 회의록을 읽게 됐다. 이때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인 회장이 언급한 국무회의록은 신두영 전 감사원장이 작성한 회의록을 가리킨다. 신 전 감사원장은 1957년 6월부터 1960년 9월까지 국무원 사무국장이었다. 국무회의에 참석해 회의 내용을 속기한 후, 깨끗한 미농지에 먹지를 대고 정서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회의록은 모두 3부. 1부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하고, 1부는 국무원 사무국에 보존했다. 나머지 1부는 신 전 감사원장이 보관했다. 후에 공개된 게 바로 이 보관본이다. 인 회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일어나고 시위가 이어졌다. 사실 대통령 선거는 부정행위를 할 필요조차 없었다. 민주당 후보였던 조병옥은 선거일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이었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학생들이 죽었다. 김주열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떠올랐다. 4월 12일 국무회의록을 보면 우남은 이런 말을 한다. ‘선거(3·15 선거)가 잘못됐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없는가?’ 그때까지 이승만은 부정선거였다는 걸 몰랐던 거다. 각료들은 민주당이 시위 배후에 있다고 답한다. 이승만은 ‘내가 그만두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며 ‘연구해보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을 독재자라 할 수 있나.”

인 회장이 인용한 이날의 회의록을 보면 우남은 스스로 하야를 언급한다. 해당 대목이다. ‘어린아이들을 죽여서 물에 던져놓고 정당을 말하고 있을 수 없다. 무슨 방법이 있어야 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을 내놓고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이외는 도리가 없다고 본다.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이 없는가? (중략) 나로서는 지금 긴급히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사면하는 것이다. 잘 연구해보라.’

지난 8월 1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우남 이승만 애국상 시상식이 열렸다. ⓒphoto 뉴데일리
지난 8월 1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우남 이승만 애국상 시상식이 열렸다. ⓒphoto 뉴데일리

“4·19는 이승만의 마지막 성공”

인 회장은 “4·19는 이승만의 마지막 성공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4월 23일 이승만은 ‘부상당한 학생들을 만나겠다’며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예정된 국무회의도 취소했다. 이승만은 학생들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젊은이들이 장하다.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 우리 백성들이 살아있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다. 나는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발표를 라디오로 들었다. 이화장으로 달려갔다. 시민들이 몰려와 있더라. 우는 이들이 많았다. ‘자유당 놈들이 건국영웅인 우리 할아버지를 망쳐놨다. 가서 그놈들을 때려죽이자’ ‘만수무강하시라’…. 이승만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놀러들 오시오.’ 그 자리에서 직접 본 장면들이다. 이후 이승만에게 각국 수뇌들이 위로 인사를 보냈다. 이승만이 대만 장제스 총통에게 쓴 답장이 박정희 정권 때 발견됐다.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위로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내가 평생 바라던 똑똑하고 정의로운 백성이 국가를 위해 궐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인 회장은 줄곧 ‘사실’ ‘자료’를 강조했다. 정파적 견해가 아니라 사실관계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얘기다. 특히 해방정국 3년을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시기를 두고는 정파적 관점에서 쓴 책밖에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부산 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얘길 꺼냈다. 부산 정치파동은 1952년 6·25전쟁이 한창일 때 피란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첫 개헌파동이다. 대통령을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뽑는 간접선거제를 국민이 직접투표로 선출하는 직선제로 바꾸는 게 개헌의 골자였다. 사사오입 개헌은 1954년 개헌을 말한다. 1954년 개헌의 핵심은 ‘자유시장경제 도입’이라고 인 회장은 강조했다. “제헌 헌법은 주요 산업을 국유화와 공영화할 수 있고, 사기업도 항시 국유화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당시 인사들은 ‘민족사회주의’ 경제라고 자랑했다. 1954년 개헌안은 이 규정들을 전면 폐지했다.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한 거다.” 이 두 개헌파동은 3·15 부정선거와 함께 이승만 임기의 ‘과(過)’로 지목된다.

인 회장은 “역사는 오늘의 잣대가 아니라 당시성(當時性), 당대성을 먼저 연구한 후에 봐야 한다”고 말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 상황은 이랬다. 이승만은 미국과 막판 협상 중이었다. 한·미조약 발효까지 미루고 ‘단독북진통일’을 외치며 미국을 압박했다. 미국이 구두약속한 대규모 경제·군사 원조를 현실화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8억달러 원조안이 타결되고, 11월 18일 한·미방위조약 비준서가 교환됐다. 열흘도 안 돼 11월 27일 개헌안이 통과됐다. ‘이승만이 아니고는 전쟁복구자금도, 국군현대화도, 시장경제 발전도 맡길 사람이 없다’는 것이 당시 국민들의 보편적 인식이었다.”

전체주의와 싸운 자유투쟁의 삶

인 회장은 2010년 이승만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소는 매달 한 차례 이승만포럼을 연다. “9년간 포럼을 열며 자책감에 많이 울었다. ‘나도 공범이었구나.’ 현재 대한민국의 정체성 위기는 오랜 세월 진행된 ‘이승만 죽이기’의 필연적 결과다. 이나마 숨이 남아 있는 것도 이승만 덕분이다. 그가 만든 진짜 평화체제인 한·미동맹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남한을 걸고 벌이고 있는 도박이 과연 진짜 평화를 가져올까. 역사를 보면 노벨평화상을 탄 평화협정은 전쟁과 멸망으로 이어졌다.”

인 회장은 바로 이 ‘용미술(用美術)’을 이승만의 위대한 면모 중 하나로 꼽았다. “이승만은 미국에 희망을 걸었다. 미국을 잘 활용한다면 한반도에 민주주의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워싱턴과 뉴욕에서 가까운 조지워싱턴대학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 지도층과 네트워크를 쌓기 위해서였다. 미국인보다 더 고급스러운 영어를 구사했다. 미국 역사에도 통달했다. 독립선언서를 원문으로 줄줄 외웠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어떻게 용미를 할 수 있을지 뚜렷한 목적의식 아래 연구했다. 박사논문 주제 자체가 ‘미국의 힘을 이용한 중립’이다. 스승이었던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은 어떻게 ‘이승만’이 됐을까. 인 회장은 ‘꿈’을 꼽았다. “이승만은 젊은 시절, 조국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겠단 큰 꿈을 세우고, 그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의 요즘 젊은이들이 눈여겨볼 점이다.”

인 회장에 따르면 이승만의 생애는 한마디로 ‘전체주의와 싸운 자유투쟁’이었다. 그의 말이다. “20대 초반엔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왕조 개혁운동을 했고,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엔 외세 식민주의와 투쟁했다. 일본의 천황주의-군국주의와의 투쟁은 물론이다. ‘평등, 한 가지 빼놓고는 지독한 계급독재’라며 새로운 전체주의인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승만은 하야하는 순간까지도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야 담화문 중 일부다.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 동포들이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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