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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1호]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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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의 이승만을 위한 변명

“1919년 건국설은 역사를 소설로 만드는 것”

하주희  기자 

▲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는 ‘국부’란 표현 대신 ‘건국의 아버지들’을 쓰자고 했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올해 광복절 경축식의 주인공은 백범 김구였다. 행사 중반, 분위기가 고조되고 백범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이 재생됐다. 백범으로 분한 배우가 무대 세트에 등장해 연설을 했다.
   
   이 행사는 정부 수립 7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정부 수립 70주년이란 말은 문재인 대통령 경축사에 한 번 언급됐을 뿐이다. ‘건국 70년’이란 말은 아예 들리지 않았다. 얼핏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건국 70주년’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중요하다. ‘건국 70주년’을 부정하는 측은 1948년 정부 수립은 북한과 함께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건국이라 볼 수 없고 건국의 기원은 1919년에 수립된 중국 상하이임시정부에 있다고 본다. 경축식엔 우남 이승만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는 상하이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 양쪽 모두의 초대 수반이었다.
   
   지난 8월 14일 서울 광화문에서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를 만났다. 그는 ‘원조 사회주의자’에서 지금은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는 현대사 전문가로 변신한 인물이다.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 현대사’라는 저서는 우리 사회 좌파의 필독서인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만들어낸 역사인식의 프레임을 걷어내는 작업을 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매니아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에게 우리 사회의 ‘건국 논란’에 대해 묻자 잘라 말했다. “1919년 건국설은 말이 안 된다. 1948년 건국설을 부정하려 역사를 소설로 만드는 거다. 너무나 분명한 것을 논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황당무계한 짓으로 판명될 거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몽양 여운형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1948년 출범한 정부가 임시정부의 강령을 계승한다고 볼 순 있지만 상하이임시정부 자체가 요건을 갖춘 정부였던 건 아니다. 망명정부로 볼 수도 없다. 1919년 건국설을 주장하는 정치적 목적이 뭔지 모르겠다. 왜 굳이 48년 건국의 의의를 부인하는 걸까. 그때 좋은 나라가 탄생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잘 살고 있다.”
   
   
   “헌법 전문 왜 자주 바꾸나”
   
   주 대표는 건국 시점을 둘러싼 대립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데엔 좌·우파 양 진영 모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헌법만 봐도 그렇다. 전문을 왜 그렇게 자주 바꾸나.” 헌법 전문은 헌법 제정의 목적과 그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 나아가려는 방향을 담는다. 때론 본문보다 더 중시된다. 미국과 독일의 경우, 여러 번 개헌을 하면서도 전문엔 손을 대지 않았다. 독일은 1949년 제정 이후 40여차례 개헌을 했다. 전문에 손을 댄 건 단 한 차례다. 통일 직후였다. ‘통일을 성취할 사명’을 ‘통일을 완성했다’로 고쳤다. 전문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를 논하기에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 헌법 전문엔 프랑스대혁명이 아예 언급도 안 되어 있다. 한국은 9차례 개헌하면서 4번 전문을 바꿨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등장과 퇴장을 반복했다.
   
   주대환 대표에게 우남 이승만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우남은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해 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다. 그때부터 새로운 나라를 꿈꾸기 시작했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해 대한제국의 역적이 되지 않았나. 국체를 바꾸려 했던 젊은 이승만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었다. 당대 어떤 사람보다 명확한 비전과 시대인식 능력을 가진 탁월한 정치가였다. 대중 지지도도 높았다. 도산 안창호와 함께 만민공동회의 스타였으니까.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새로운 나라는 민주공화국으로 세운다는 걸 분명히 했다. 조선왕조 부활이 아니다. 예를 들면 정인보 선생이 쓰신 ‘광복절 노래’ 가사를 보자. 거기엔 자유, 평등, 민주정에 대한 얘기는 없다. 민족주의 정도다.”
   
   이승만의 과(過)는 무엇일까. “정치가로 너무 성공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독재자가 됐다. 1956년에 그만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때부턴 과가 더 많다. 1959년 죽산 조봉암이 간첩죄로 사형당했다. 이승만과 조봉암은 아버지와 아들 뻘이다. 스물몇 살 차이가 난다. 정치적 적수가 아니었단 얘기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도 그렇다. 굳이 할 필요가 있었을까.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개헌이라고 후에 평가한다 해도, 당시 국민들은 그런 성격의 개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개헌을 하고, 부정선거를 치러 4·19로 쫓겨나기까지, 스스로 자초한 거다. 이기붕 등 자유당에서 주도했다고 하지만 최종 책임은 결국 대통령에게 있는 것 아닌가.”
   
   가장 저평가된 우남의 업적은 무엇일까. “농지개혁이다. 분명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당시 국제정세나 상황이 농지개혁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해도, 직접 해낸 건 평가해야 한다. 농지개혁 안 했으면 한국은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다.”
   
   좌파 진영에서 우남에게 붙인 꼬리표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친일파’다. 사실일까. 주 대표의 설명은 이렇다. “말도 안 된다. 일단 당시 개화파 잔재들 자체가 친일 경향이었다. 일본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친러’도 ‘친청’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때의 독립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아관파천 이후엔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이었다. 독립문 건립, 독립협회 창설, 독립신문 창간 모두 일본이 뒤에서 지원했다는 얘기도 있다. 주변국 중 문명을 받아들인 게 일본이다. 영국과 미국도 친일이었다. 친미는 한국 독립운동의 기본 노선이었다. 이승만은 그 노선을 흔들림 없이 지킨 사람이다.”
   
   둘째, 해외 독립운동 세력을 분열시키고 제대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비난이다. 독립운동 공금을 유용했다는 죄목도 붙인다. 주 대표는 이렇게 생각한다. “독립운동 당시 파벌 다툼이 치열했다. 파벌들 간에 서로 죽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박용만은 중국에서 독립운동가가 쏜 총에 죽었다. 독립운동 시절의 이승만 비난은 파벌들 사이의 비난에 기초하고 있다. 다 믿으면 안 된다.”
   
   셋째, 이승만은 김구와 시종일관 대립했다는 역사 기술이다. 주 대표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김구와 이승만을 대비시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김구는 이승만 팀의 멤버였다. 독립운동 시절 김구의 비전은 이승만의 비전에서 온 거였다. 김구가 어려운 가운데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킨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 김구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려는 건 허무주의다. 김구는 뭘 하지 말자는 쪽이었다. 하다못해 북한 정권이라도 세웠나. 건국을 끝내 반대했다. 김구를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건, 마치 조선시대에 정몽주를 충신으로 기리고 정도전을 역적 취급한 것과 같은 거다. 일종의 집단적인 정신분열이다.”
   
   마지막으로, 이승만 때문에 한반도가 분단됐다는 지적이 있다. 주 대표는 “타파되어야 할 잘못된 견해”라 일축했다. “정치 지도자로서 이승만의 판단력은 굉장히 높이 살 만하다. 미 군정보다 더 빨리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미 군정의 지시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했다. 북한에선 1946년 2월에 이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사실상 북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거다. 이승만의 판단력이 빨랐던 거지, 이승만 때문에 분단이 된 게 아니란 얘기다.”
   
   
   ‘역사 건너뛰기’ 한 역대 정권들
   
   ‘국부’로 불렸던 우남이 광복절 경축식에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사실상 격하된 이유는 뭘까.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박정희 정권부터 이승만을 강하게 부정했다. 물론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4·19세대와 5·16세력은 여러 면에서 한 덩어리와 같다. 이들에 의해 세대 혁명이 일어났으니까. 두 세력은 이승만을 밟고 일어나야 할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도 마찬가지다.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시기를 제외하면 탄생 직후부터 한국 민주정은 신생 독립국 치고는 잘 운용됐다. 대통령은 임기를 지키고 규정을 준수했다. 이승만이 사사오입 개헌까지 한 것도 법을 지키면서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서 아니었나. 그런데 역대 정권들은 앞의 정권을 부정하면서 스스로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다.”
   
   실제 YS정부는 스스로를 최초의 민주 정부로 규정했다. 역사 건너뛰기는 DJ도 못지않다. ‘국민의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받드는 유일한 합법적 정부’라며 ‘1948년 정권 수립 후 50년은 권위주의와 독재정치의 시대’라 규정했다.
   
   주 대표는 이승만 비난은 둘째 치고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중국을 봐라. 중국은 마오쩌둥을 완전히 지우지 않는다. ‘공칠과삼’ 식으로 안고 간다. 중화인민공화국을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다. 대한민국 역사를 직시하고 대한민국을 만든 사람들을 긍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미 군정하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이 민주정이 되도록 도움을 줬다. 그런 미 군정 시대를 누구도 잘 얘기하지 않는다. 항일운동만 얘기한다. 지금도 항일운동 중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자기 정체성을 독립운동가로 혼동하고 있다.”
   
   주 대표는 이승만을 긍정하는 측도 방향과 전략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 박사의 역할이 컸다는 건 인정한다. 건국을 그가 혼자 한 건 아니다. 독립 이후 건국에는 해공 신익희, 죽산 조봉암, 인촌 김성수 이런 분들의 역할이 컸다. 자신들이 속한 진영을 대표해 꿈을 품고 건국에 참여했다. 많은 이들이 함께 이뤘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고립된다. ‘건국의 아버지들’이란 표현을 쓰자는 이유다.”
   
   그는 ‘국부’란 표현을 이제 쓰지 말자고도 했다. “미국은 쓰는데 왜 우리는 안 되느냐, ’국부’나 ‘건국의 아버지’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하는데 마찬가지 아니다. ‘국부 이승만’이란 표현엔 역사가 있다. 1950년대 한국에선 이승만 대통령 단 한 사람을 국부로 지칭했다. 4·19로 그 개념이 부정되지 않았나. 국부를 강조할수록 4·19를 부정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지는 거다. 어리석은 전략이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와 별도로 국부란 단어 자체가 이미 오염됐다.”
   
   결국 중요한 건 해결책이다. 70년 전 역사를 둘러싼 대립은 어떻게 해소될까. “통일이 대한민국 주도로 되면 된다. 그땐 대한민국 중심으로 역사가 서술될 거다. 그러면 정리된다. 나는 1948년 건국이 기적이라 생각한다. 운이 좋았다. 영·미가 주도하는 민주 진영이 파시즘에 대항해 승리한, 세계사에서 아주 짧았던 순간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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