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나진과 러시아의 하산을 오가는 열차. ⓒphoto 러시아 철도공사
북한의 나진과 러시아의 하산을 오가는 열차. ⓒphoto 러시아 철도공사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EU) 본부 앞에는 ‘유럽 통합의 아버지’라 부르는 로베르 쉬망 전 프랑스 외무부 장관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룩셈부르크 태생의 쉬망 전 장관은 1950년 5월 9일 장 모네 프랑스 경제계획청장의 구상을 바탕으로, 당시 무기 제조 자원인 철강과 석탄을 초국가적인 기구가 공동 관리하고 공동시장 운영을 통해 전쟁을 막자는 이른바 ‘쉬망선언’을 발표했다. 석탄과 철강은 당시 산업의 기초로서 유사시 군사물자로 전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생산량은 국력과 군사력을 측정하는 기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총칼을 들고 싸웠던 적국들이 석탄과 철강을 함께 생산하고 공유하며 판매하자는 쉬망선언은 비범한 발상의 전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쉬망선언에 따라 1951년 4월 18일 프랑스·독일·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창설했다. 이들 6개국은 1957년 3월 25일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를 설립하는 내용의 로마조약에 서명했다. ECSC와 EEC 및 유럽원자력공동체는 1967년 7월 1일 통합을 통해 단일 기구를 만들자는 합병조약을 체결하고 유럽공동체(EC)를 출범시켰다. EC는 1993년 11월 1일 마스트리히트조약을 체결하고 유럽연합(EU·European Union)을 창설했다. EU는 쉬망선언이 발표된 5월 9일을 ‘유럽의 날(Europe Day)’로 정하고 매년 기념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제73주년 광복절 및 정부 수립 70주년 기념사에서 ECSC를 모델로 삼아 한국·북한·중국·일본·러시아·몽골 등 동북아 6개국과 미국이 함께하는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제안했다. 문 대통령이 제시한 동아시아철도공동체는 한국과 북한이 한반도종단철도(TKR)를 구축해 중국횡단철도(TCR), 시베리아횡단철도(TSR), 몽골종단철도(TMGR) 등 유라시아횡단철도와 연결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유럽 대륙까지 물류 교통망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문 대통령은 “ECSC가 EU의 모체가 됐다”면서 “동아시아철도공동체는 우리나라의 경제 지평을 북방 대륙까지 넓히고 동아시아 에너지공동체와 경제공동체로 이어지고, 동북아 다자평화안보체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어떻게 탄생했나

유럽 통합은 문 대통령의 기념사 내용처럼 경제 협력을 통해 시작됐다. 물론 유럽 통합의 근본적인 목적은 전쟁을 막고 평화와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럽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특히 6000만여명을 희생시킨 2차 대전을 겪은 유럽 각국은 더 이상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유럽 통합의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주창한 인물은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였다. 처칠은 1946년 스위스 취리히대학에서 연설을 통해 “유럽이 평화와 안전, 자유 속에서 살 수 있게 유럽합중국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위대한 정신의 프랑스와 위대한 정신의 독일의 화해 없이 유럽의 부흥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후 프랑스 정치가 장 모네는 2차 대전 이후 독일과 프랑스 접경지대인 루르와 자르 지역의 석탄과 철강을 공동 생산하고 관리할 공동기구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이를 ‘평화를 위한 생산의 연대’라고 불렀다. 쉬망은 모네의 생각을 바탕으로 ECSC 창설을 제안했다. 쉬망선언에 대해 당시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가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ECSC가 출범하게 됐다. 아데나워 총리는 프랑스와의 화해와 유럽의 통합이 독일의 부흥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상호 신뢰를 통해 유럽 통합을 위한 각종 기구와 제도를 만들면서 EU를 강력한 정치·경제 공동체로 발전시켜왔다. EU에는 유럽 29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이 제의한 동아시아철도공동체가 ECSC처럼 추진될 수 있을까. 문 대통령의 구상이 실현되려면 무엇보다 대북제재를 완화하거나 폐기해야 한다. 그 선결 조건은 북한의 비핵화다. 하지만 현재 미국과 유엔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CVID) 비핵화를 이행하기 전까지는 제재를 조금도 풀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북한의 비핵화를 검증한 이후 제재를 해제하고 체제 보장과 국교 정상화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 광복절 제안은 전제조건이 전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하나의 ‘구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철도·도로 연결 사업과 관련해 “올해 안에 착공식을 갖는 게 목표”라고 밝히는 등 미국과 유엔 안보리의 제재도 준수하지 않겠다는 의도까지 보였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북한의 비핵화 이행이 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북한과의 철도 및 도로 연결 계획을 올해 안에 추진하는 것은 미국을 분노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윌리엄 브라운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교수도 “문 대통령의 발언이 트럼프 정부를 화나게 만들었을 것”이라며 “추후 제재 해제를 전제로 한 발언이라도 시기상조로 보인다”고 밝혔다.

북한의 비핵화가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동아시아철도공동체가 구축되려면 동북아 각국의 상호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 ECSC가 EU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유럽 각국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통합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의 상호 신뢰는 기독교 문명, 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라는 공통의 가치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럽 통합의 시작인 ECSC가 가능했던 것은 프랑스·독일·이탈리아와 베네룩스3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한 국가들이었기 때문이다. EU는 지금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거부하는 국가들을 회원국으로 가입시키지 않는다. 실제로 EU의 회원국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봉, 인권, 자유 그리고 법치에 대한 존중이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들끼리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동유럽 국가들이 EU에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된 것도 옛 소련이 붕괴된 이후 공산주의 체제를 폐기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체제였던 동독도 유럽 통합 과정에서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문 대통령이 동아시아철도공동체 참여국들로 상정한 한국·북한·중국·일본·러시아·몽골·미국 중에서 민주주의 체제를 지금까지 제대로 갖추고 유지해온 국가는 미국·일본·한국밖에 없다. 북한은 말 그대로 전 세계에서 유일한 3대 세습독재 체제의 ‘김씨 왕조’ 국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국가이자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인권 탄압국이자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정치후진국으로 분류된다. 러시아도 사실상 일당 독재국가나 다름없다. 몽골은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아직까지 각종 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다.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이 있는 국가들이 무조건 경제 협력만을 위해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동아시아가 유럽과 다른 점들

유럽 통합의 또 다른 조건은 시장경제 체제라고 볼 수 있다. 유럽 각국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특정 국가가 자원을 독점해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국가를 무력으로 지배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됐다고 보기 때문에 물자의 교환이 자유로운 시장경제 체제가 중요하다고 간주해왔다. ECSC가 EEC로 확대됐을 때 회원국들은 로마조약에 따라 상품·서비스·자본·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는 장벽을 대거 철폐했다. 특히 EEC는 1968년 7월 역내 관세를 폐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EU 출범의 법적 토대를 제공한 마스트리히트조약도 상품·서비스·자본·노동력에 대한 모든 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히 EU의 단일시장 토대를 마련했던 솅겐조약도 사람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런 조약들이 체결될 수 있는 바탕은 ECSC에서 만들어졌다.

동아시아철도공동체 참여국들 중에서 제대로 된 시장경제 체제를 갖추고 있는 국가는 역시 미국·일본·한국밖에 없다. 북한은 지금도 계획경제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국가라고 볼 수 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공산당이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경제정책을 짜고, 시장을 운용·관리하는 시스템이다. 러시아는 국가의 역할과 권한을 강조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추구하고 있다. 몽골도 시장경제 체제를 추구하지만 아직까지는 미흡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들 4개국에선 인적·물적 자원이 자유롭게 이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경우 주민들은 이동의 자유가 전혀 없다. 북한에선 거주지를 함부로 옮길 수 없고 여행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때문에 북한에서는 외국을 자유롭게 나간다는 꿈조차 꿀 수 없다. 각종 상품이나 자원도 국가의 허락 없이는 수출할 수도 없다. 중국도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있다.

유럽 통합의 저변에 깔린 가치는 기독교 문명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면서도 이슬람 국가인 터키가 지금까지 EU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럽 각국에서 이슬람 난민들의 수용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동아시아는 유교와 불교 등이 혼재돼 있다. 북한과 중국에는 종교의 자유조차 없다. 게다가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고,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러시아정교회를 믿고 있다. 공통의 가치가 무엇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더욱 중요한 점은 유럽에선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가 없지만, 동아시아에선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들이 경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은 중화민족주의를 앞세우면서 중국몽 실현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특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부국(富國)과 강군(强軍)을 함께해야 한다”면서 중화민족주의를 강조해왔다. 이 때문에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중국에 맞서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과거 전쟁과 식민지배에 따른 상처를 아직까지 봉합하지 못하고 있으며 영토분쟁까지 벌이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도 영토분쟁으로 평화조약조차 맺지 못하고 있다. 한·일 관계 역시 역사와 영토 문제 등으로 밀접하지 않다. 게다가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은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자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동북아 다자평화안보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미·중 패권 경쟁의 시각으로 볼 때 중국이 그동안 추진해온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도전해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한 전략적 승부수다. 중국은 철도 등 개발도상국의 기초 인프라 시설에 대규모 투자를 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동아시아철도공동체는 어떻게 보면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도움만 줄 수 있다. 미국은 중국의 일대일로에 맞서 인도·태평양 전략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전략에 일본·인도·호주가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동아시아철도공동체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별로 없다.

남북통합 철도 구축에 160조 필요

동북아철도공동체를 구축하려면 무엇보다 한국과 북한을 잇는 한반도 종단철도를 완성시켜야 한다. 한반도 종단철도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경의선을 타고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간 뒤 중국 횡단철도로 접속되는 노선, 서울과 수도권에서 경원선으로 원산으로 간 다음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다 청진을 거쳐 남양에서 만주 종단철도로 접속되는 노선, 또 청진에서 나진과 러시아 하산을 거쳐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접속되는 노선 등 3개다. 3개 노선의 철도를 건설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 한국교통연구원은 남북통합철도망 구축에 최장 30년에 160조원이 필요하다고 추정했다. 이런 막대한 비용을 누가 댈 것이냐가 문제다. 북한은 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한국의 민간 기업들도 이런 자금을 투자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한국 정부나 중국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일대일로의 연장선상에서 한반도와의 철도 연계를 추진하고 있다. 한반도 철도를 중국 동북지방의 발전 회랑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은 물론 한국은 중국 경제에 더욱 종속될 수밖에 없다.

남북 철도 공동점검단이 지난 7월 24일 경의선 철도의 북측 연결구간 중 사천강 철도 교량을 점검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남북 철도 공동점검단이 지난 7월 24일 경의선 철도의 북측 연결구간 중 사천강 철도 교량을 점검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또 다른 문제는 막대한 비용에 비해 실제로 경제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 물류는 이미 철도에서 선박으로 넘어갔다. 2만1000TEU급 선박은 한 번에 무려 2만여개의 컨테이너를 수송할 수 있다. 철도의 수송 규모는 60TEU에 불과하다. 앞으로 2만8000TEU급 선박이 보편화하면 선박 운송비는 더욱 떨어질 것이다. 현재 철도 운송비는 1마일당 2.5달러다. 이에 비해 1만TEU급 선박은 1해리(1.15마일)당 0.7달러 수준이다. 한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수출 물량의 경우 철도 수송보다는 해상 수송이 훨씬 저렴하다.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 내륙으로 가는 물류의 경우 철도가 경제성이 있을 수도 있지만, 유럽행 물량은 해상 운송을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북극 지역의 얼음이 완전히 녹으면 북동항로가 새로운 유럽행 수송로가 될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동아시아철도공동체라는 담대한(?) 구상이 경제와 평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는 너무 성급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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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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