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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7호] 2018.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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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核 폐기로 가는 길

북한은 남아공이 될 수 없는 이유

이춘근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지난 5월 10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접견한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photo 뉴시스
북한 핵 문제의 기원은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오래된 문제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에 혼쭐이 난 후 김일성은 중국, 특히 소련의 미적지근한 지원에 실망해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추겠다는 망상을 가지게 되었다. 김일성은 1960년대 이미 ‘북한은 핵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이 핵을 사용하면 우리도 핵을 사용할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린 적도 있었다.
   
   북한 핵 문제가 진정한 국제 문제로 등장하는 계기는 냉전이 종식되던 무렵인 1989년의 일이다. 미국의 정찰위성이 영변 지역을 감시하던 중 핵 재처리시설로 판단되는 건물을 발견했던 것이다. 북한은 영변 시설을 핵 발전용, 평화용이라고 우겼지만 그곳에는 발전소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송전선이 없었다. 북한이 ‘방사화학 연구소’라고 우기는 길이 약 180m에 이르는 긴 건물은 이미 사용된 폐기 연료봉으로부터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추출해낼 수 있는 재처리시설임이 확실했다.
   
   북한은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도 어겼다.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핵시설 보고임무를 충실히 하지 않았으며 사찰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냉전 당시라면 소련의 강력한 통제를 기대할 수 있지만 소련이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북한의 핵폭탄은 심각한 국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2001년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사상 최대의 공격을 당해 단 수십 분 만에, 그것도 본토에서 3000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당한 미국은 다음번 테러는 핵폭탄에 의한 테러일 것이라고 확정하고 테러리스트들에게 핵폭탄을 팔아먹을 가능성이 농후한 나라로 북한을 지목했었다. 테러리즘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태에서 북한의 미사일 능력도 계속 증강되었으며, 북한의 핵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하자 미국은 이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상이 북한의 핵 개발이 국제정치 문제로 비화하는 과정에 관한 간략한 역사다.
   
   
   평화적으로 핵 폐기한 유일한 사례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오바마와 같은 여유가 없었다. 트럼프는 자신의 임기 중 북한의 미사일이 미국에 도달하는 상황에 직면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오바마 재임 때까지만 해도 북핵의 위협은 그것이 테러리스트들의 수중에 흘러들어갈 수도 있다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북한이 직접 미국을 향해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그래서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완전한 파멸(Total Decimation)’을 당할 것이냐 아니면 핵을 포기하고 ‘미국의 보호(Political Safeguard)’를 받겠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압박했다. 그래서 열린 것이 지난 6월 12일 상가포르 미·북 회담이었다.
   
   이후 북한이 결국 핵을 포기하는 방안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팽배했다. 그런데 3개월 이상이 지난 현 시점에서 북한이 과연 핵을 순순히 포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기대보다도 의혹이 더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은 온갖 꼼수를 써가며 핵의 완전한 폐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과연 북한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핵을 폐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핵을 만들었다가 포기한 나라가 있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에 관한 역사를 살펴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핵보유국이 핵을 폐기한 역사적 사례가 있었는지를 찾아보고, 있었다면 북한도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교훈을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수많은 국가들이 핵을 보유하려고 노력했는데 핵 보유에 성공한 나라는 애초 예상보다는 훨씬 적었다. 1970년대의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2000년대가 되면 핵보유국이 적어도 수십 개국에 이를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2010년대도 후반으로 접어든 현재 핵보유국은 10개국이 넘지 않는다. 즉 선진국들의 핵확산 방지 노력은 그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소련(현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외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공식적인 핵보유국이며 이스라엘은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지만 핵보유국임이 확실하다. 이들 8개국 외에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분류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핵을 개발하려고 노력했지만 좌절된 나라들은 리비아, 이라크 등이며 현재 핵 보유 노력 때문에 미국, 이스라엘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 나라가 이란, 시리아 등이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핵을 만들었다가 그것을 완전히 폐기한 나라가 하나 있는데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Republic of South Africa·이하 남아공)이다. 리비아와 이라크의 핵 개발 저지는 평화적인 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라크는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을 당하기도 했고, 미군에 의해 점령당하기도 했었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미국과 핵폐기 약속을 했었지만 결국 반란군에 의해 잔인한 죽음을 당했다. 결국 평화적인 방법으로 핵을 폐기한 나라는 남아공 한 나라뿐이다. 그렇다면 남아공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 나라의 경험이 북한 핵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남아공은 1948년 이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식 인종차별적 통치가 지속되던 나라였는데 남아공을 식민 통치했던 영국이 이런 방식의 통치를 거부했다. 그 바람에 1961년 아파르트헤이트로 통치하던 아프리카너당(Afrikaner Party)은 영연방에서 탈퇴했다.
   
   1966년 나치스를 추종하며 아파르트헤이트 통치 방식을 고집하던 존 보르스터(John Vorster)가 남아공 총리에 당선됐다. 1973년 남아공 정치는 경제 불안과 더불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폭력적 흑인 정치 세력인 아프리카민족의회(African National Congress)의 대두로 인해 점차 폭력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1973년 11월 30일 유엔 총회는 결의안 3068호를 통해 남아공 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꾸짖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인류를 향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로 규탄당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아프리카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에서 민주화가 진행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모잠비크와 앙골라가 반란세력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남아공과 이웃해 있는 모잠비크의 반란세력은 인종차별로 인해 고생하는 남아공의 흑인들을 지지했다. 모잠비크와 앙골라는 남아공의 아프리카민족의회 소속 게릴라를 위한 은신처가 될 수 있었다. 남아공 바로 북쪽에 있던 로디지아 역시 1973년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한 후 무장 게릴라가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가 끝날 무렵 흑인이 통치하는 짐바브웨공화국으로 독립했다.
   
   
▲ 넬슨 만델라. 그가 남아공 대통령이 되면서 남아공은 완전한 비핵화를 이룰 수 있었다. photo 뉴시스

   이스라엘과 손잡고 핵 개발
   
   1973년의 위기는 보르스터 정부로 하여금 과학적인 핵 연구를 공식적인 핵폭탄 제조 계획으로 바꾸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남아공은 우라늄이 풍부한 나라로서 핵폭탄을 제조하려던 이스라엘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라였다. 두 나라가 긴밀히 연결된 배경이 있다. 1973년 욤키푸르(Yom Kippur)전쟁에서 심각한 안보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에 설사가상 격인 일이 일어났다. 욤키푸르전쟁이 끝난 후, 1974년 아프리카 신생독립국 거의 전부가 이스라엘과 국교를 단절한 것이다. 이웃 나라들로부터 야기되는 실질적인 안보 위협에 당면해 있었던 이스라엘과 남아공은 유엔으로부터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부랑자로 낙인찍히고 있는 공통 운명의 나라가 되었다.
   
   두 나라가 당면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었다. 욤키푸르전쟁에서 심각한 패배를 경험한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핵무기 개발 계획을 은밀하게 진행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공개적으로 남아공과 거래해 남아공으로부터 50t의 우라늄을 수입하게 된다. 특히 골란공원에서 행해진 대대적인 탱크 전투에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은 밀집된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핵폭탄인 중성자탄(Neutron Bomb)을 개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핵실험을 할 수 있는 장소도 필요했다.
   
   1974년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즈와 남아공 총리 보르스터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은밀히 만나 전략적 협력과 상호방위 협력을 추구할 것에 동의한다. 공식적인 문건은 나올 수 없겠지만 전문가들은 이때 이스라엘이 남아공의 핵 개발 계획을 기술적으로 지원했다고 믿고 있다. 그 대가로 남아공은 이스라엘에 우라늄과 핵 실험장으로 쓸 수 있는 칼라하리사막을 제공했다. 1970년대 후반 유엔은 결의안 3379호를 통해 이스라엘과 남아공의 협력을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주의와 이스라엘의 시오니즘 사이의 성스럽지 못한 동맹(unholy alliance)’이라고 비난했다.
   
   1976년 소련은 남아공의 핵무장을 막아야 한다고 미국 측에 제의했고 핵시설 폭격 작전까지 제안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남아공의 핵무장을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은 주변의 신생독립국으로부터 야기되는 안보 위협에 핵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남아공의 핵무장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남아공의 국가안보를 미국이 보장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보르스터의 뒤를 이은 보타 총리 역시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사용 가능한 핵폭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1979년 9월 22일 이스라엘과 남아공은 태풍이 몰아치는 와중에 남대서양의 한 섬에서 대기권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 실험의 효과에 관해서는 정치적 이유로 인해 가타부타 논쟁이 있었지만 이 사건 이후 5년이 지난 1984년 이스라엘은 중성자탄을 양산(量産)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남아공도 1982년 4월 우라늄 U-235 핵폭탄의 첫 번째 원형을 만들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연평균 1발씩 핵폭탄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남아공의 핵폭탄은 지름이 약 2피트(60㎝), 길이 6피트(1.8m), 무게 약 2200파운드(약 990㎏)에 이르는 것으로서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과 비슷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제 버카니에(Buccaneer) 폭격기 혹은 이스라엘과 함께 개발한 사정거리 1000마일(1600㎞)짜리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었다.
   
   이후 상황은 더 악화됐다. 1985년 쿠바군 3만1000명과 3000명의 동독 및 소련군 자문단이 앙골라에 주둔했고 이는 남아공에 대한 심각한 안보 위협이 되었다. 남아공은 이 무렵 평화를 위한 협상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를 공격할 수 있는 핵무기를 배치해놓았다는 사실이 후일 밝혀진 바 있다.
   
   
   소련의 몰락이 결정적 배경
   
   이랬던 남아공이 어떻게 핵을 포기했을까. 핵을 보유했다가 폐기한 유일한 사례인 남아공은 세계 정치의 급격한 변화로 말미암아 핵을 보유하게 만들었던 국제환경이 저절로 해소되는 상황을 맞이했던 나라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아프리카에 개입했던 소련 공산주의가 스스로 몰락하는 운명에 처했던 것이 가장 중요한 배경이다. 1988년 12월 남아공은 자국의 북서쪽 국경을 접하고 있던 나미비아와 평화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는데 소련, 동독, 쿠바의 지원이 없는 나미비아의 좌파 정권이 그 자체 힘으로는 남아공을 위협할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몰락하고 동독이 몰락하는 와중에 앙골라에 파견되어 있던 쿠바군도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를린을 동서로 가르고 있던 장벽도 무너졌다. 이 무렵 남아공도 스스로 변했다. 더 이상 인종차별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지속될 수 없게 된 것이다. 1989년 9월 14일 대통령에 당선된 드 클레르크(de Klerk)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와 함께 핵무기도 폐기할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1989년 11월 실제 남아공의 핵시설을 폐쇄하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1990년 2월 흑인 민권운동가 넬슨 만델라가 수십 년의 옥살이에서 석방되었고 같은해 7월 남아공은 핵무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7월 10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요구에 응했다. 1991년 9월까지 남아공은 6개 핵폭탄을 해체하였다. 해체된 부품들은 평화적 목적을 위해 재활용되거나 폐기되었다. 핵 개발 관련 문건들도 모두 폐기되었다.
   
   핵 폐기 그 자체는 쉬운 일이었지만 핵 과학자들이 실업자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100만달러 정도의 퇴직금을 받지 못할 경우 가장 돈을 많이 내겠다는 나라 혹은 인물에게 핵기술을 누출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들 중 일부는 파키스탄 핵 과학자A. Q. 칸의 네트워크에 합류했고, 다른 나라로 이민 간 사람도 있었다. 요하네스버그에 정교한 기계 상점을 차린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남아공이 핵을 폐기하는 데 소요된 자금은 2008년 화폐 가치로 환산할 경우 약 6억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핵을 폐기했다는 남아공에 몰락한 소련의 핵 과학자 500명이 난민처럼 유입되는 일도 벌어지자 국제원자력기구는 과연 남아공이 정말로 비핵화를 단행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다.
   
   1994년 5월 10일 넬슨 만델라와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남아공의 정권을 장악했고 이로 인해 남아공은 완전한 비핵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체제의 민주주의가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지 여부에 대해 수많은 남아공 과학자들은 의심의 시선을 보냈다. 이들 중 일부는 다른 나라의 핵 개발로 눈을 돌렸다.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리비아의 카다피는 핵 개발을 위해 남아공 핵 과학자들을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아공이 핵을 폐기한 유일한 국가가 된 데는 이처럼 국제정치의 변화와 남아프리카 내부의 정치 체제 변화가 맞물린 놀라운 상황의 반전이 있었다. 남아공의 경우를 현재 북한의 상황에 적용해 본다면 이렇게 가정할 수 있다. 북한을 위협하던 미국이 붕괴되고, 미국의 지원을 받던 한국이 허약한 상태로 남게 되어 더 이상 북한이 위협을 느끼지 않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북한의 국내 정치가 변해 김씨 왕조가 끝나면서 주변국들과 유사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북한의 주체사상 체제, 소련의 몰락을 미국의 몰락, 그리고 남아공을 위협하던 주변국들이 소련, 쿠바, 동독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약체 국가가 된 상황에 비유하면 남아공의 핵 폐기가 과연 한반도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 여부가 판단된다.
   
   우선 미국이 망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러니까 북한이 변질될 가능성, 즉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넬슨 만델라 체제로 바뀌는 것 같은 체제 변화가 북한에서 일어날 경우에만 북한 핵 폐기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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