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김대년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 photo 성형주 조선일보 기자 / (우) 김용희 A-WEB 사무총장 photo 이덕훈 조선일보 기자
(좌) 김대년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 photo 성형주 조선일보 기자 / (우) 김용희 A-WEB 사무총장 photo 이덕훈 조선일보 기자

지난 9월 27일 김대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40여년간 몸담아온 공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김 전 사무총장은 1979년 9급 공무원으로 공직에 입문했다. 31세에 8급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옮긴 이후 중앙선관위 선거연수원장, 관리국장, 기획관리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쳐 2016년 11월 장관급인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이 됐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가 임기 두 달을 앞둔 시점에 갑작스럽게 사퇴한 배경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선관위 안팎에서는 ‘전·현직 선관위 사무총장 사이에 차기 선관위 상임위원을 둘러싼 암투가 있었다’는 전언이 흘러나온다. 김대년 사무총장이 사퇴 소회를 밝히면서 자신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인물로 김용희 세계선거기관협의회(A-WEB) 사무총장을 지목하면서 선관위 내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A-WEB 사태’ 촉발한 업체 밀어주기 의혹

이번에 김대년 전 사무총장은 ‘중앙선관위가 A-WEB의 보조금 사업을 지도·감독할 위치에 있기 때문에 최근 짙어지고 있는 A-WEB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사퇴 성명서에서 “A-WEB 사태로 촉발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제가 사퇴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며 “김용희 A-WEB 사무총장도 결자해지의 자세로 책임지고 사퇴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밝혔다.

김대년 전 총장이 지목한 ‘A-WEB 사태’는 김용희 A-WEB 사무총장이 전자투표기 제조업체인 국내 기업 ‘미루시스템즈’의 투표시스템 수출사업에 관여하면서 업체 밀어주기에 나서고 있다는 의혹에서 시작됐다. 이와 관련 선관위는 지난 3월 김용희 A-WEB 사무총장을 검찰에 수사의뢰했고, 김 사무총장은 배임 등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중앙선관위가 전직 사무총장을 수사 의뢰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A-WEB은 후발 민주주의 국가들의 민주적 선거제도 정착을 지원하기 위해 2013년 중앙선관위 주도로 출범한 선거관리기관 협의체다. 세계 111개 국가가 참여하는 세계선거기관협의회는 선관위와는 별도의 민간기구이지만 사실상 선관위의 예산지원과 통제를 받고 있다. 김용희 A-WEB 사무총장은 2014년 11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중앙선관위 사무총장과 A-WEB 사무총장을 겸하고 있었다. 선관위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면서 현재는 A-WEB 사무총장만을 맡고 있다.

선관위의 검찰 수사 의뢰 이후 A-WEB 사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지난 8월 9일 경기도 과천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실에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 사람들이 방문하면서부터다. 주한 DR콩고 시민단체 ‘프리덤파이터’의 대표단이었다. 이들은 김대년 전 사무총장에게 “한국 기업이 DR콩고에 터치스크린 투표시스템을 지원한다고 하는데 부정선거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니 대한민국 선관위가 DR콩고 선거위원회에 시스템 도입을 하지 말라고 권고해달라”고 밝혔다. 오는 12월 23일 치러질 DR콩고 대통령 선거에는 미루시스템즈의 터치스크린투표시스템(TVS)이 사용될 예정인데, DR콩고의 높은 문맹률 및 인터넷·스마트폰 등 IT기기 경험 부족, 열대기후 환경 등의 이유로 TVS 사용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었다.

앞서 이 같은 우려를 인식한 한국 외교부는 2016년 5월 DR콩고 TVS사업을 공적개발원조(ODA) 시범사업에서 탈락시키고 유권자명부시스템 개선과 데이터센터 구축 사업만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자 DR콩고의 선관위(CENI) 측이 DR콩고의 예산으로 한국의 전자투표 시스템을 구매하겠다고 나섰다. 이후 민간기업인 미루시스템즈가 DR콩고 선거위원회와 직접 계약을 진행했다.

이 과정을 두고 중앙선관위와 A-WEB의 입장이 엇갈린다. 중앙선관위는 A-WEB에 대한 감사결과 보고서를 통해 “김용희 A-WEB 사무총장이 미루시스템즈의 영업활동을 지원하고 있다”며 “A-WEB이 주관하는 장비시연회·ODA 사업추진 출장에 미루시스템즈 관계자를 동행시켜 (미루시스템즈가) 주요 사업정보를 알게 해 결국 사업을 독점 수주할 수 있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김용희 A-WEB 사무총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문제라고 지적한 DR콩고 사태는 정부보조금을 받고 진행하는 ODA 사업도 아니고 DR콩고 선거관리위원회와 한국 기업 간의 사적 계약일 뿐이데 우리(A-WEB)가 어떻게 이를 지원하고 관여할 수 있겠나”라고 해명했다. 김 사무총장은 “DR콩고는 A-WEB 회원국이다. DR콩고 선관위는 선거데이터센터를 구축하면서 동시에 터치스크린투표시스템(TVS)을 도입하려고 했고 A-WEB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국내에 지난 10여년간 터치스크린투표기를 생산, 판매하는 업체는 단 한 곳뿐이다. 그래서 계약이 진행된 것인데 (선관위 측은) 마치 ‘MS오피스 프로그램을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만 사는 것은 업체 밀어주기’라는 식의 주장을 펴고 있다”라고 밝혔다.

김용희 A-WEB 사무총장은 선관위의 A-WEB에 대한 감사가 자신에 대한 ‘표적감사’라고 주장했다. 그는 “선관위는 2017년 6월부터 8월까지 2개월간 A-WEB의 ODA 사업 보조금과 관련해 감사에 나섰다. A-WEB은 비정부 간 국제기구이고 자체 감사기구와 외부 회계법인의 감사를 동시에 받고 있는데, 선관위가 직접 회계감사에 나선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라고 밝혔다. 또 “A-WEB이 ODA 사업을 시행하고 있는 엘살바도르 현지의 한 1인 인터넷매체에 기자명도 없이 오른 기사에 ‘한국의 미루시스템즈로부터 현찰 다발을 받았다’는 내용이 실린 것을 문제 삼기도 했다. 매체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도 없이 이를 비리혐의로 확정해 ‘특별감사’에 나섰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선관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국정감사와 중앙위원 인사청문회에서 A-WEB 사업의 특정업체 장비 독점에 대하여 문제제기가 있어 감사 필요성이 높아졌다”며 “감사는 중앙선관위 위원들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특정인이 주도해서 감사를 결정할 수 없다. 표적감사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전·현직 총장의 권력다툼인가?

양측의 주장은 여전히 팽팽히 맞서고 있다. 심지어 A-WEB 사태는 점점 ‘전·현직 선관위 사무총장의 권력다툼’으로 비쳐지고 있다. 이들이 격돌하고 있는 현 시점이 오는 12월 선관위 상임위원의 교체 시기와 맞물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관위 상임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이지만 주로 전직 선관위 사무총장이 임명돼왔다. 선관위의 한 관계자는 “상임위원은 비상근인 선관위원장과 국무위원급인 사무총장 사이를 연결하는 자리라고 보면 된다. 선관위 내부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이 그 역할을 맡기에 적절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김대년 전 선관위 사무총장은 오는 11월 임기를 앞두고 있었고 김용희 A-WEB 사무총장은 아직 선관위 상임위원직에 오르지 않았다. 전·현직 선관위 사무총장을 두고 누가 상임위원에 임명될지 저울질이 오가고 있었다는 게 선관위 안팎의 말이다. 선관위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이미 지난해부터 상임위원직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상임위원회는 일종의 합의제 기구라고 보면 된다. 외부 추천 위원들은 선관위 내부 사정을 잘 모르지 않겠나. 그러다 보니 내부 출신 상임위원이 사실상 선관위 요직의 인사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욕심이 날 수밖에 없는 자리일 것”이라고 귀띔했다.

국회에서 ‘2차 격돌’ 예고

이 같은 시선을 의식했던 탓일까. 김대년 전 선관위 사무총장은 직원들에게 보낸 ‘위원회를 떠나는 소회글’에서 “우리 위원회가 세 부류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는 김용희 A-WEB 사무총장이 사퇴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부류, 또 하나는 관망하는 부류, 나머지는 김용희 총장이 복귀하길 기다리는 부류”라고 밝혔다. 이어 “저를 옭아매려했던 프레임, 현직 총장이 상임위원 가려고 싸운다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민간인으로 복귀한다”며 “의혹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면 거두어달라”고 당부했다.

김대년 전 사무총장과 김용희 A-WEB 사무총장 모두 ‘차기 선관위 상임위원’을 둘러싼 무수한 소문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김대년 전 사무총장은 “위원회 안팎에서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져 나왔다. 지금 모든 과정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퇴는 순수한 결단”이라고 말했다. 그는 “검찰 수사가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는데 임기가 끝날 때까지 결론이 나지 않으면 누가 이 사태를 책임지겠는가”라고도 했다. 김용희 A-WEB 사무총장 역시 “선관위 상임위원은 가고 싶다고 해서 가는 자리가 아니다. 선관위 사무총장 시절 A-WEB 사무총장을 겸하면서 이미 각종 수사를 받았던 터라 공직에 대한 미련도 없다”고 밝혔다.

전·현직 사무총장의 격돌 이후 직원들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지난 9월 4일 중앙선관위, 17개 시도선거관리위원회, 249개 구시군 선거관리위원회 소속 6급 이하 2200여명 직원들을 대표하는 전국협의회 소속 행가위원장(행복일터가꾸기위원회 위원장)들은 ‘김용희 사무총장 사퇴촉구 결의문’을 내고 김용희 사무총장의 즉각 사퇴를 촉구했다.

이에 대해 A-WEB의 직장인협의회의 한 관계자는 “성명서를 내면서 심지어 A-WEB에 찾아오기까지 했다. 왜 선관위 6급 이하 직원들이 모여 A-WEB 사무총장 사퇴를 요구하는지 의문이다. 문제가 있다면 A-WEB 직원들이 나서서 사퇴를 촉구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A-WEB은 선관위 산하기관이 아니라 전 세계 111개 회원국의 협의체인데 그동안 선관위 특별감사에 시달리며 독자적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가 돼버렸다”며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A-WEB의 추락한 명예에 관한 공식적인 문제제기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와중에 ‘제2차 격돌’도 예고되고 있다. 김대년 전 사무총장과 김용희 A-WEB 사무총장은 오는 10월 16일 열리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중앙선관위 대상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돼 나란히 출석할 예정이다. 김대년 전 선관위 사무총장은 “사퇴를 했기 때문에 사무총장으로서 이번 국감을 마무리 짓지 못하게 되어 안타까웠었다. (증인 출석) 기회가 주어져서 오히려 감사할 정도다. 당당하게 모든 문제를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희 A-WEB 사무총장 역시 “그동안 A-WEB의 위상이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정상화가 시급하다. 국감을 통해 무엇이 진실인지 밝히겠다”고 밝혔다.

조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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