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0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참석해 질의에 답하고 있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 ⓒphoto 뉴시스
지난 10월 10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참석해 질의에 답하고 있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 ⓒphoto 뉴시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고 있다. 작년 6월 취임 이후 1년 넘도록 청와대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그늘에 가려 있던 강 장관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런 평가를 듣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10월 4일 보도된 미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다. 이 인터뷰에서 강 장관은 “처음부터 (핵) 리스트를 요구하는 것은 그 후 이어질 검증과 관련한 논란 속에 협상을 교착시킬 위험성이 있다”면서 “한국은 미국에 북한 핵무기에 대한 신고 요구를 미루고, 협상의 다음 단계로서 북한 핵심 핵시설(영변)의 검증된 폐쇄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고 있다”고 밝혔다. 제안의 내용도 논란거리였지만, 외신 인터뷰에서 항상 청와대의 입장을 되풀이만 하던 강 장관이 기존에 공개된 적 없는 새로운 안(案)을 내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뉴스’로 받아들여졌다.

청와대는 강 장관의 제안에 대해 사전에 논의된 것이 아니라면서도 “새로운 접근법, 창의적인 접근법”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외교가에서는 “핵 리스트 신고를 미루자고 하다니 청와대가 하고 싶어도 공개적으로 하기 힘든 얘기를 강 장관이 총대를 메고 해준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즈음부터 비핵화 협상이 교착에 빠진 것은 미국의 ‘선(先) 핵 신고’ 요구와 북한의 ‘선 종전선언’ 요구가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다. 신속한 협상 진전과 남북 경제협력 재개를 원하고 있는 현 정부로서는 내심 미국이 핵 리스트 신고 요구를 거둬들였으면 하고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정착된 비핵화 프로세스의 출발점인 핵 신고·검증을 보류하자고 공개적으로 제안하는 데는 상당한 정치·외교적 부담이 따른다. 바로 그 역할을 강 장관이 나서서 수행한 셈이다. 강 장관은 WP 인터뷰가 보도된 날 신문을 보고 외교부 간부들에게 “기사가 잘 나왔다”면서 자기 뜻이 잘 반영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폼페이오 장관 등장으로 힘받은 공식라인

강 장관이 변화한 배경에는 6개월 전 취임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의 관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전임자였던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신임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허버트 맥매스터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컸었다. 이는 우리 청와대와 외교부의 역학관계에도 영향을 줬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맥매스터 보좌관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한·미 관계를 주도하는 동안, 국무부라는 중요한 ‘끈’이 떨어진 외교부는 별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3월 틸러슨 전 장관을 경질하고, 대북 대화를 직접 주도해온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새 국무장관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이런 상황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맥매스터 전 보좌관까지 존 볼턴 현 보좌관으로 교체되자, 정 실장 대신 강 장관이 전면에 나설 기회가 왔다는 기대감이 외교부에 감돌았다. 4월 말 폼페이오 장관이 취임한 직후부터 우리 외교부는 국무부와의 ‘공식 라인’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 강 장관과 폼페이오 장관 사이에도 견고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로부터 약 6개월이 흐른 지금, 강 장관과 폼페이오 장관은 그야말로 수시로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 외교부 간부들의 주장이다. 외교부 고위간부 A씨는 “두 장관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도 수시로 주고받으며 언제든 연락하는 관계”라고 말했다. 국장급 간부 B씨는 “예전에는 청와대가 직접 미국과 협의를 한 뒤 필요한 부분만 외교부에 알려줬지만, 지금은 외교부가 먼저 미국으로부터 필요한 내용을 듣는다”면서 “강 장관이 폼페이오 장관과 협의를 하고 나면 청와대도 그 내용이 궁금해서 ‘빨리 보고하라’고 독촉하는 그런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변화 속에 강 장관은 전에 없던 자신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감이 붙으면서 말이 많아진 강 장관의 변화가 위태롭다는 지적도 많다. WP 인터뷰 발언을 두고도 외교가에서는 “핵 신고가 중요하다는 것은 동맹 미국의 입장인데, 외교장관이 동맹국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깎아내리면서 어떻게 외교를 하겠느냐”는 비판이 많았다. 전직 고위 외교관 C씨는 “외교장관의 본분을 모르는 언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7일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만난 강경화 장관. ⓒphoto 뉴시스
지난 10월 7일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만난 강경화 장관. ⓒphoto 뉴시스

섣부른 자신감이 위태롭다는 지적도

이런 우려는 결국 10월 10일 외교부 국정감사에서 두 건의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 이날 강 장관은 “금강산 관광이 (안보리) 제재 대상이라서 못 가는 것이 아니라 5·24 조치로 정부가 금지해서 못 가는 것 아닌가”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질문을 받고 “그렇다”라고 답했다. 금강산 관광은 5·24 조치가 아니라 2008년 박왕자씨 피살로 중단됐는데 잘못 답변한 것이다. 강 장관은 또 “5·24 조치를 해제할 용의가 있나”라고 묻는 이 대표에게 “관계 부처와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2010년 북한의 천안함폭침으로 도입된 5·24 조치는 남북 경제협력을 강력히 제한하는 우리 독자 제재의 기반이다. 외교장관이 그 해제를 검토 중이라고 말하자, 남북 경협을 서두르기 위해 대북제재를 빨리 풀려는 당정(黨政)의 내심이 여당 대표와의 문답을 통해 드러났다고도 여겨졌다. 하지만 이 발언이 갖고 온 외교적 후폭풍은 대내적 논란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연일 비핵화 전까지 대북제재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다음 날 직접 “우리(미국) 승인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란 말로 ‘경고’를 보냈기 때문이다.

강 장관은 국정감사장에서 폼페이오 장관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군사 분야 합의서 내용을 보고 ‘격노’해서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보도를 인정하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한·미 간에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외교장관이 인정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앞서 이 보도에 대해 “폼페이오 장관이 힐난, 격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던 외교부 대변인실만 머쓱해졌다.

이 보도를 통해 폼페이오 장관과의 관계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매끄럽지는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도 강 장관에게는 타격이 됐다. 워싱턴 사정에 밝은 D씨는 “사실 폼페이오 장관은 강 장관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강 장관은 정권 핵심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해 미국이 알고 싶어하는 사안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차라리 서훈 국정원장이나 정의용 실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을 만나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만 공식 카운터파트라서 어쩔 수 없이 강 장관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허약한 기반 위에 놓인 강 장관의 자신감이 어디로 이어질지 외교가는 지켜보고 있다.

김진명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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